울타리를 넘는 예수님의 상상력 | 김광석, 김희헌 | 2019-11-03

by 김희헌 posted Nov 03, 2019 Views 20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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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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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를 넘는 예수님의 상상력 (1:1-4, 2:1-4, 살후 1:1-4, 11-12, 19:1-10)

2019.11.03 창조절 열 번째 주일 / 김광석, 김희헌

 

안녕하세요? 저는 섬돌향린교회에 다니고 있는 김광석이라고 합니다. 이제 섬돌향린에 다닌 지 2년 정도 되었는데요. 이렇게 향린교회에서 하늘뜻펴기를 할 기회를 제게 주셔서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섬돌향린교회를 다니면서 섬돌향린의 교우라는 점이 언제나 뿌듯했는데 이렇게 향린교회에서 하늘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시니 무척 감사드립니다. 제가 평신도 강단교류를 향린교회로 간다니 반가워하며 향린에 안부를 전해달라는 섬돌향린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향린교회의 분들 앞에 서니 떨리기도 하고 꼭 만나고 싶던 분들이라 설레고 기쁘기도 합니다.

여기 계신 대부분의 향린교회 교우님들은 저에 대해 잘 모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렸듯 섬돌향린교회에 출석한지도 다른 분들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그다지 향린의 공동활동에 많이 참여하지도 못해서 저를 처음 보시는 분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소개를 잠깐 하자면, 저는 지금 수원의 한 편의점에서 삼 년 째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편의점 알바생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서른일곱이니 학생은 아니므로 편의점 알바노동자 내지는 점원 정도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문학에 뜻이 있어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몇 년 전부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문학을 하고 싶고, 특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인데요.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릴 적 읽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주었던 울림은 제가 문학을 하고 싶도록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십수 년 전 한 방송사에서 소개되어 한 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었는데요, 이 소설은 인간세계에 내려온 한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인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오라는 하느님의 명을 지키지 못한 천사가 날개를 잃고 그만 지상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사람들과 지내라는 숙제를 받은 천사는 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나 교훈도 좋았지만 천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 속 사람들의 천사를 대하는 태도가 참 흥미로웠습니다. 천사가 단지 거리의 부랑자인줄 알고 무시했던 사람, 또 그럼에도 인정을 베풀었던 사람 그리고 그를 일개 구두장이의 조수로만 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 저는 이 이야기 밖에서도 참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그가 입은 옷을 보고, 그의 직업과 나이를 보고, 그의 상황과 사회적 위치를 보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 옆의 누군가가 천사일 거라는 생각은 오로지 제가 어릴 적 읽은 아름다운 동화 속의 이야기일 뿐일까요?

제가 일 하고 있을 때 가끔 시험 준비하시죠?” 하고 묻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아마 저를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으로 알고 건네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제게는 편의점 일은 꾸준히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 다른 어엿한 직장을 준비하는 과정 정도의 일로 치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또 한 번은 거나하게 취한 한 남자 손님이 와서는 빤히 쳐다보더니 못났다!” 하고 나간 적도 있습니다. 편의점 노동자로 일하며 동전 던지기, 반말하기, 무작정 들어와 담배 달라고 하기 등 멸시와 하대를 당하는 일은 일상과도 같습니다.

남 탓만 할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편의점 일을 하며 깨달은 점이 많습니다. 저는 제가 살면서 길 위의 식사를 할 줄 몰랐습니다. 전에 시장에 다니면서 시장 상인 분들이 도시락을 꺼내놓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불쌍하고 가엾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습니다. 그게 제 삶이 될 줄은 모르고 말이죠. 저는 매일 점심을 먹는 것이 고역입니다. 무엇보다 가만히 앉아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서럽습니다. 원래 법으로는 네 시간 당 30분 씩 휴식하도록 되어있지만 대부분의 편의점이 사정상 그럴 형편이 못됩니다.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계산을 하고 안내를 해야합니다. 그러다가 음식을 엎은 적도, 돌아와 보니 퉁퉁 불어터져 그냥 버려야했던 적도 있습니다.

정말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한 치도 자기를 벗어나지 못할까요? 왜 옆 사람의 일이 자기일이 될 줄은 모르며, 힘들어 하는 사람의 고통과 비명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버리는 것일까요? 오늘 밤 천사가 우리 집에 찾아온다면 쫓아내지 않고 잘 대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요?

우리는 삭개오를 대하는 예수님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을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세리 삭개오를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한 뒤 그의 집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눕니다. 삭개오가 왜 나무에 올라가서 자신을 바라봐야 했는지 예수님은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일부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그와 기꺼이 친구가 되려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삭개오 한 사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쉽게 판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의 입장이 되어보고 삭개오의 변화가능성을 믿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목수로 일하는 아무개의 몇째 아들로 여겨졌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으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도 들어야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며 자기의 과거를 떠올리며 나도 삭개오처럼 참 많은 차별과 오해를 당하고 있는데하고 동병상련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또 혹시 삭개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것은 아닐까요? ‘연로한 어머님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악하게 굴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아버지의 강요로 세리가 된 것은 아닐까, 혹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하고 말이죠.

아쉽게도 삭개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성경에는 그 뒤로도 삭개오가 정말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삭개오가 그랬을 것이라 믿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누구보다 낙인찍히고 편견에 싸인 삭개오를 여러 사람 가운데 골라내고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행위, 그 자체로 예수님이 의도하고자 한 바를 이미 다 이루었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 모든 이의 변화가능성과 입장을 고려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또 설령 힘들게 남을 용서하고 회개하도록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 말을 번복할 수도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는 아이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힌 범인이 자신은 하느님을 만나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아이의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환대하거나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은 무척 조심스럽고 세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환대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변절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상상해보고,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무엇보다도 이러한 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미래를 무한히 상상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판단이 서면 기꺼이 손을 내미는 자세. 이러한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성적지향이 다르고, 몸에 장애가 있고, 나이가 적거나 많고, 조금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고 거대한 벽을 만들어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에 맞서 우리는 예수님의 상상력을, 낙관을 그리고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연대라는 말은 이제 흔한 말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누구나 연대를 말하고 환대를 말합니다. 힘이 없는 자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가진 자와 권력자에 대항 할 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연대할 수 있는 몸밖에는 싸울 수 있는 수단이나 무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흔히 진보를 주장하고 사회 비판적이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는 사람들이 겉모습만보고, 말하는 누군가의 어투만 보고, 나이만 보고, 성별만 보고, 그가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만 보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은근히 배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저는 제가 이렇게 섬돌향린에 다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시 저는 가족이 다니는 지역의 한 대형교회를 다녔는데요. 그 때는 엄혹한 현실에 지친 나머지 교회라는 보호막 아래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만족하며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노조운동을 만나고 페미니즘을 만나며 제가 얼마나 좁은 틀 안에 갇혀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성소수자 친구들이 겪는 고통은 저로서는 그동안 상상할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외모 때문에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설령 어렵사리 일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여자, 남자로 확실히 구분된 화장실 때문에 고민해야했습니다. 마음을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는 친구나 애인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으며,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되는 모습을 저는 줄 곧 지켜봐야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렇게 고통 받는 많은 분들이 섬돌향린에 와서 지친 마음을 달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문턱까지 와서는 발길을 돌리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섬돌향린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너무도 심하게 성소수자를 단죄하고 차별하기 때문에 교회 일반에 가지는 공포감과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섬돌향린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울타리 바깥을 볼 줄 모르게 된 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환대 받았던 것은 잊고, 그동안 저 자신에게 심한 말로 상처주고 저를 이용했던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깨는 사람들 없이 그저 저와 마음이 맞는 섬돌사람들과 이렇게 오래 지내고 싶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진보와 정의를 외친다면 저 또한 삭개오를 정죄했던 군중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성소수자 차별을 반대한다면서 막상 교회를 찾은 성소수자를 경계하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면서 같이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하기를 꺼리며, 페미니즘과 퀴어를 말하며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을 배척하려던 제 안의 생각들을 돌아봅니다. 이런 저를 깨우치려고 이천 년 전의 예수님은 몸소 행동으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은 아닐까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겉모습이 아니라 가능성을, 성별과 나이가 아니라 편견과 혐오의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지를 세심히 살펴보고 이미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었던 예수님의 그 넉넉함을 저는 배우고 싶습니다.

경계 너머의 존재까지 환대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안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앞으로 교회에 더 많아 진다면 교회를 향한 발걸음은 더 늘어나고, 언젠가 이 세상 자체가 교회가 되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하늘뜻펴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김희헌)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자기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적대하지 않고 맞아들이는 것은 오늘날 중요한 윤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적으로 시급한 사안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 이주노동자, 난민, 성소수자를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과 인식전환이 필요합니다. 한국사회가 이 문제에서 많이 뒤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교회는 더 뒤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법무부가 발표한 <2018년 난민신청 및 처리 현황>을 보면, 지난해 한국에 난민신청을 한 사람은 16,173이고, 그 가운데 심사가 진행된 사람은 3,879이며, 이 중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144이라고 합니다.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29.8%인 반면, 우리나라는 3.7%입니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예가 작년 1221일 앙골라를 탈출하여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루렌도 은쿠카씨 가족입니다. 인천공항에서 구금되어 287일 동안 공항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언론에도 여러 차례 나왔으니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본래 앙골라로 이주한 콩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조국 콩고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세 차례의 전쟁과 내전에 휩싸였습니다. 풍부한 광물 자원을 둘러싼 적대적 대결이 벌어지면서, 공식집계만으로 오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긴 길고 잔인한 전쟁이 거듭되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해마다 기아와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 사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루렌도 씨는 이웃나라 앙골라로 이주하여 차별을 무릅쓰고 살았습니다. 언어의 차이와 몸에 찍힌 백신 자국으로 인해 ‘2등 시민취급을 받았습니다. 앙골라에서 매달 쫓겨나는 콩고 사람이 삼십만 명이 넘는 열악한 상황을 버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중 루렌도 씨가 몰던 택시가 경찰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영장도 없이 특수 경찰에게 잡혀가서 생명의 위협을 당합니다. 그 사이 아내는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루렌도씨는 그날 바로 짐을 쌌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팔아서 17,500불을 만들어, 출국허가를 얻기 위해 공무원에게 5천불을 챙겨주고, 여섯 식구의 항공료로 1만불을 들였습니다. 그가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인권이 보장된다는 나라 중에 당시에 곧장 떠날 수 있는 곳이 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8시간의 비행을 거쳐서 한국에 도착했지만, 루렌도 씨네 가족은 공항에서 난민심사 자체를 거부당했습니다. 소위 가짜 난민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그리고 공항 탑승구에 방치된 채 여섯 명의 가족이 열 달 가까이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10월초에 있던 2심 재판에서 승소하여 비로소 입국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기다리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낯선 이웃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이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최근 들어 환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거론되는데, 거기에는 근대의 산업문명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 들어있습니다. 자연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했던 농업문명의 시절에 인류는 하늘을 경외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문화를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산업문명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이윤을 창출하는 경쟁 속에서 적대적인 존재가 되어갔,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인류가 사는 방식은 지구별 위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방식과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착한 마음씨만으로 선한 세상이 지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복잡하고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한편에 대한 환대는 다른 편에 대한 적대가 되고, 환대가 가능하려면 그것을 가능하도록 떠받치는 수고/고통이라는 그림자가 동반됩니다. 따라서 적대와 환대는 우리 삶에서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느끼게 됩니다.

이웃을 위한 선()이 가족에게는 악()이 되고,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이 부족 이기주의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현실에서 무조건적인 환대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며 절망하게 됩니다.

철학자 자끄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적대와 환대가 얽힌 사례로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땅에 살 때, 롯은 두 명의 천사를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합니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님들을 데리고 놀겠다며 내놓으라고 합니다. 롯은 그럴 수 없다며, 대신 약혼자가 있는 두 딸을 내주겠다고 말합니다. 소돔 사람들은 기분이 상해서 이방인인 주제에 어디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느냐며 당신을 먼저 혼내겠다.고 달려듭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롯은 소돔을 탈출하게 되었고, 그 도시의 멸망이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환대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이방인에 대한 롯의 환대가 마을 사람들의 적대를 불러오고, 그 적대에 맞선 롯의 선한 대응이 딸들에게는 거대한 폭력이 되고 마는 이 이야기는 환대와 적대가 뒤엉킨 우리 세계의 복잡성을 드러냅니다.

이방인을 환대하는 데에는 위험과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라고 하는 철학자는 참된 나됨’(being myself)이란 낯선 얼굴을 한 타자에게 응답하는 책임의식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낯선 존재의 부름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할 때, 무한한 존재에 대한 증언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답기 위한 조건을 예언자들의 정신에서 찾자고 제안합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109-36, 147)

예언자 하박국은 기원전 7세기 말에 남왕국 유대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묘사를 들으면, 세상은 위태로웠고 사람들은 서로 적대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품는다또는 씨름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품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과 씨름 했을까요?

그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는 그 시대의 적대적 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1장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이 고백은 눈앞의 폭력과 갈등에 대한 분노의 고발이자, 적대감으로 얼룩진 삶에 배인 허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탄식은 하박국만의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도 그와 같은 고통을 내면화하여 절규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22:1)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탄식이 되었습니다. (15:34)

하박국의 탄식과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박국서 2장에 나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의인은 믿음(emunah)으로 산다! 하박국의 이 발견은 성서의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가 되어 바울에게까지 전해지고, 심령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개혁정신을 이끄는 말씀이 되었습니.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3:11)

이제 믿음은 율법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갇힌 편협한 정신이 아니라, 모든 차별의 벽을 뛰어 넘고자 하는 웅대한 정신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적대적 관계를 해체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요, 복잡한 세계 속에서 어긋나는 사랑환대의 꿈을 잃지 않도록 버티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는 날을 기다리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주의 날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바울은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린다면, 믿음의 공동체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커지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랑과 환대를 통해 교감하며 함께 지어가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각자 자신들의 바람을 실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품고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환대와 적대가 뒤엉킨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좌절과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향해 비틀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우리 교회와 향린공동체, 이 땅의 모든 믿음의 공동체를 위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했던 기도를 하며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전 1:11-12)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님은 손가락질 당하던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님, 어서 내려오세요. 오늘 내가 당신 집에서 묵게 해주세요.

이 말씀은 적대의 장벽을 허무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신 뜻에 합당한 평화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세워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