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 김희헌 | 2019-12-01

by 김희헌 posted Dec 01, 2019 Views 26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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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2:1-5, 13:11-14, 24:36-44)

2019.12.01 대림절 첫째 주일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새로운 해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아기 예수를 모실 자리를 우리 안에 만드는 기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도록 우리를 성육신의 사건으로 초대하는 시간입니다. 이 초대는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는 초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비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초대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임마누엘의 경험은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게 하며, 세상을 적대적인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친구와 같이 더불어 사는 삶이 되도록 합니다. 성서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이뤄졌다고 증언하며,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증오와 핍박의 도구를 녹여서 하늘의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깊은 열망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가장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삶에 모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내적으로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바람이요, 외적으로는 역사의 어둠을 뚫고 정의와 평화를 꽃피우려는 바람입니다. 이런 바람을 가진 대림절의 기다림에는 세상에서 겪는 경험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온전한 삶에 대한 간절함을 품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는 누가 앞서 나가느냐 하는 선후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누가 높이 올라가느냐 하는 고저의 문제에 시달립니다. 더욱이 이념의 시대를 지나야했던 분단국가의 국민들은 좌우의 문제까지 풀어야 했습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를 지나가는 우리 안에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삶(integrity)에 관한 열망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간절해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원적인 열망입니다.

이런 열망에는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꿈도 함께 얽혀 있습니다. 공평하고 공정한 세계를 지어가려는 인류의 모험보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내일을 꿈꾸는 청춘의 분투에는 거룩한 무엇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굳이 종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늘의 소망을 이 땅에서 이루려는 대림절의 열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림절의 꿈, 주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자 하는 마음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인류의 심정에 대한 증언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 심정이 흐려져서 욕망이 되고, 그 마음이 왜곡되어 갈등도 일어나지만, 그 모든 것 안에는 하늘의 꿈을 품으려는 간절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림절 첫째주일의 말씀은 깨어있음에 관한 주제입니다.

 

[깨어있는 공동체 / 마태복음 2436-44]

대림절의 신앙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깨어있기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간을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는 날을 알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이런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노아 시대의 삶을 예로 듭니다. 성서에서 노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회상됩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거나 (11:7), ‘의로운 삶을 알리는 전령처럼 이해되었(벧후 2:5), 물 위에 뜬 그의 방주는 구원과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벧전 3:20).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노아의 믿음과 의로움에 대한 언급이 사라집니다. 대신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한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시대가 먹고 마시는일에 사로잡힌 나머지, 홍수로 인해 모두 휩쓸려가기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어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42절과 44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예수님은 깨어있어라고 말씀합니다. 깨어있다(γρηγορέω, be aware)는 말은 자신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분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에는 개인이 누릴 행복에 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밤낮으로 달려간다고 해서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자기 머릿속에 그려놓은 행복을 이루는 것 예수님의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는믿음에서 솟아납니다. (1:45)

성서의 지혜는 우리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전에, 먼저 그 꿈 자체를 재구성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공동체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을 때에 자신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래리 크랩,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 28/43)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깨어있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도덕적 기준을 위반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패하거나 깨어진 적이 없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향린에 모인 우리 모두는 깨어지고, 실패하고, 상처 입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으며생명의 샘물이 흘러가도록 자신을 먼저 낮추어야 합니다. 시련의 시기에는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가 흘러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있는 신앙 공동체는 세상의 질서와는 다르게 움직입니다. 자신들의 강함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이 상대방을 움직이도록 합니다.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슬픔이, 서로를 멀어지게 만드는 두려움과 수치의 장벽을 부수도록 합니다. 서로를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소망의 자리를, 위대한 성공에서 찾기보다는 공공연한 실패에서 찾는 공동체야말로 깨어있는 공동체입니다.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 67-8)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예언은 그런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평화를 향한 예언자의 꿈 / 이사야서 21-5]

예언서의 첫 장을 연 이사야는 평화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예언자가 태어난 시대는 혼돈과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그가 예언활동을 시작하던 때에 남왕국 유대는 분단국의 불안정과 비애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결속력을 잃고, 사대주의적 외교에 휘둘렸습니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옆 나라인 아람과 동맹을 맺고 공격하자 (주전 735), 유대는 당시에 가장 큰 힘을 가진 앗시리아 제국의 그늘로 들어가고 맙니다. 결국 앗시리아 제국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먼저 점령하여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고 (주전 721), 남왕국 유대는 총독을 파견해서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으로 삼게 됩니다.

유대가 이토록 불안정한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부적으로 통합적인 정치를 할 수 없는 불신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약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에 주어진 권력을 활용했고, 사법적 공평함을 잃은 사회는 불평등을 키워갔습니다. 종교는 허례허식에 빠져서,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는 영혼을 길러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회적 동력은 이리저리 찢겨져 분산되었고, 그럴수록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득세하며 정치를 더욱 사대주의적으로 처리해 간 것입니다. 그 시절의 어두움이 매우 깊어서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내일의 기약이라고는 없는 마지막 때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의 시기에 예언자가 주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는 열망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을 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할 것이다.

세상의 어둠에 지치고 여윈 사람들, 이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주님의 길(derek)’을 따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갈망하는 주님의 평화는 힘의 대결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친밀한 삶의 관계 속에서 구현된다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4절에 나온 예언자의 비전입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예언이 미가서 41-3절에도 나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두 예언자가 함께 동일한 꿈을 꾸는 것은, 그 시대가 갈망하고 있던 주님의 길에 대한 사람들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예언의 꿈은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시대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도 이사야의 시대와 비슷한 명암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대결정치에 함몰되면서 점차 미궁에 빠지는 듯합니다. 작년에 한반도에 불어온 평화의 바람도 희미해지면서 대화의 문이 닫히고, 남북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불평등한 한미 군사동맹에 기초한 사대주의적 외교가 지속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는 요원해지고 있습니다. 실제 칼과 창을 들고 싸우지는 않지만, 흑백논리와 혐오담론에 물든 피폐한 정신이 정치를 물들이고, 종교마저도 갈등의 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품은 예언의 꿈이 우리 민족의 마음에서 힘차게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앞길이 모두 막혀서 마지막 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마침내 주님의 길을 따르자고 외쳤듯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은 하늘로부터 열립니다. 구원을 바라는 유대 사람들에게 이사야가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하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는 다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급진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를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말씀이 우리를 마침내 변화시킬 것이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새롭게 지어질 것이라는 믿음에서 희망을 피어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성서는 외칩니다. 오너라,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구원을 꿈꾸는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성서는 주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새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은총의 연대’ / 로마서 1311-14]

로마서에서 바울은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빛의 갑옷을 입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복음이 삶을 주도하는 영적 공동체가 되는 방법입니다.

먼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는 일상적인 시간 크로노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시간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에 주목합니다. 반복되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구원의 시간을 분간해내는 것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안다는 것구원(soteria)이 가까이오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밤이 깊다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12절 말씀처럼 밤이 깊어도 낮이 가까이 온 것을 압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듯이, 앞길이 막힐수록 하늘 길이 열리는 것을 믿습니다.

필요한 것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고, 어둠의 행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깨어남은 육체적 성실이나 철학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깨어난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그 분을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 삶을 두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20)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간 힘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요한 것은 은총의 연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에 서로의 믿음을 싣고 함께 나아가는 삶에서 신앙의 공동체가 구성됩니다. 이 은총의 연대를 임마누엘의 축복 속에서 펼쳐가는 것이 신앙공동체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시대의 절망을 이겨내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작동하는 힘은 사람들을 양극화로 갈라내며, 공동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과 땅의 고통으로 인해 번민하는 사람들 사이를 점점 크게 벌리는 것이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신앙인들 역시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예수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빌면서 나아갑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를 새롭게 하는 고백이 솟아오르기를 빕니다. ‘하나님,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우리가 주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겠습니다.’ 이 기도가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새로운 믿음의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흐르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이사야가 품은 예언의 꿈이 힘차게 일어나게 하십시오.

마지막 때에 이른 사람들주님의 길을 구했듯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은 하늘로부터 열립니다.

대림절에 임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따라,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