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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독사의 자식들에게 구원이 있는가? | 박희규 | 2019-12-08

by 이성환 posted Dec 13, 2019 Views 436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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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2-08

독사의 자식들에게 구원이 있는가?(사 11:1-10, 롬 15:4-13, 마 3:1-12)

2019.12.08 대림절 둘째 주일 / 인권주일

박희규 목사(이화여대 상담학, 미국장로교회)

 

 

대림절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다시 뵐 예수님을 생각하며 마태복음 안에서 씨름한 결과를 가지고 하늘뜻펴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이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신약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할 때 마태복음 1장을 대하면서 살짝 좌절하십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긴 족보에는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을 듯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시작하는 마태복음에 담긴 비밀들을 알기 시작하면 이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보다도 흥미진진해집니다. 이 족보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다윗 왕의 자손으로 이어보는 왕족의 족보입니다. 분명 왕의 족보인데 지극히 자세 안 나오는 소위 아랫것들이 등장합니다. 시아버지를 속여 그의 아들을 낳는 다말, 창녀였던 라합, 이방인 룻, 다윗왕과 바람을 피운 여인 밧세바, 그리고 처녀로 애를 배어 돌 맞아 죽어야 할 죄를 지은 마리아 등, 왕의 족보에 들어가면 안 될, 지워져야만 했을 여인들이 마치 이 족보의 하이라이트인 양 나타납니다. 왕족이되 깨끗하지 못한 핏줄을 가진, 부끄러워해야 할 여인들의 피가 섞인 왕족으로 오신 예수님의 하늘나라는 세상 나라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마태복음이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몰고 오시는 하늘나라, 그 왕국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시면서 이 세상의 왕궁이 공황에 빠집니다. 아주 먼 나라에서 동방 박사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헤롯의 궁전에 나타납니다. 그리고서 새로 나신 이스라엘의 왕을 찾습니다. 사실 개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을 외국인들이 와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찾는다 한들 “웃기고 있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일입니다.

 

그러나, 워낙 이스라엘의 정통 왕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꼭두각시 왕으로 왕좌에 앉아 있었던 속 좁고 불안한 헤롯이라는 왕에게는 꿈자리를 불안하게 만들 악몽 같은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 외국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는 어디서 태어날 수 있는가? 싹수를 잘라버려야 나와 내 아들들의 왕궁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에 헤롯 왕은 그 나라의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구약성서의 예언들을 샅샅이 조사해 베들레헴이라는 곳을 지목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후, 예수님의 가족은 이집트로 정치 망명을 하였고, 헤롯은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립니다. 즉 역적의 씨를 말리는 작업을 합니다. 헤롯에게 이렇듯,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사실은 자신의 권력과 왕궁을 위협하는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었고, 이렇게 하여 세상의 왕국과 예수님이 몰고 오시는 하늘나라가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기존 종교 체제에 대한 저항세력이었습니다. 율리우스 시저에게 잘 보여서 유대 땅에 대한 접근권을 얻은 아버지의 권세를 물려받아 주전 37년에 마카비 형제들이 이뤄 놓았던 하스모니안 왕국을 정복한 헤롯은 유다를 로마제국의 충실한 식민국으로 키워갔습니다. 에돔 사람과 유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 밑에서 유대인으로 교육을 받으며 자란 헤롯은 유대인들에게도 잘 보여야 그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보수합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에 따라 1000명의 제사장들, 즉 레위인들을 고용하여 성전 공사를 감당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헤롯의 성전은 로마제국 아래에서 친로마세력의 유대교의 파워 베이스가 되었고, 헤롯이 뽑아낸 제사장들 중 소위 사독 제사장의 후예라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과 기타 다른 계통의 후예라 하는 제사장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대제사장은 어떤 때는 사두개파에서 어떤 때는 바리새파에서, 또 혹은 두 파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뽑히곤 했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어마어마한 세금을 뜯기고, 폭력을 당하며 언제 어디로 끌려갈 지 모르는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고 있던 식민지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악의 근원과 결탁하여 돈과 권력을 쥐고 하나님에 대해 권위적인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종교 체제에 저항하여,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에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성전에서가 아니라 강물가에서 하늘나라를 외치던 세례자 요한은 기존 종교를 비판하는 새로운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여 많은 이들이 요한에게 나아옵니다. 오랜 전통을 명목으로 정치권에 고개 숙인 종교인들의 위선에 질려버린 민중이, 폭력과 거짓에 지친 이들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무리 지어 그에게 나아옵니다.

 

이 무리에 묻어서 몇몇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왔습니다. 저는 오늘 이들에게 눈을 돌려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저랑 너무도 닮아서 자꾸 그들에게 눈이 갑니다.

 

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힘의 근간이 되는 제국에 맞서는 다른 왕국이 도래하고 있다는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수긍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그룹에 대한 비판이자 배반이었습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성전을 떠나, 도심을 떠나 광야로 몇 시간 걸려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은 그 비판을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이고 결단력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소문에 퍼지면 자기 공동체로 돌아갔을 때 어떻게 욕을 먹고, 혹은 그 공동체에 계속 살아남아 있을지 모르는, 위험부담이 큰 과감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에 발을 들여놓고 제가 끊임없이 해오던 작업, 즉 기독교 신앙의 모든 전제들을 들어 엎어 보고, 돈 앞에 타락해 가는 교회를 비판하고, 그 뒤에 작용하는 제국을 비판하고, 그 비판에 걸맞게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고 고민하고 노력해 온 저의 신학적 여정이 그들의 발걸음과 너무도 닮아서 그들에게 눈이 갑니다. 그리고 감히 여러분도 여기에 끌어들여 봅니다. 그들은 혹시 향린교회 교인들을 닮지는 않았는지요?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세례요한이 독설같이 내뿜는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렇게 나아온 이들에게, 즉 어찌 보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버리고 그와 연대하러 나온 이들에게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거기에 대고 저는 처절하게 되묻습니다. 저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면 저보고 어쩌라고요? 물론 제가 독사의 자식 같아 보일 때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나왔는데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면 어쩌라고요? 그래서 오늘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독사의 자식에게도 구원이 있는가라고 말이지요.

 

사실 이 질문은 제가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는 신학적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믿지 않는 부모님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단지 동네 아이들이 다들 교회에 나가니 너도 나가서 왕따 당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단순한 제안으로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재미로 교회를 다녔지만, 중학생 때 이후에는 믿음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열심히 씨름했던 것 같습니다. 수련회에 가면 다른 아이들은 은혜를 받고 울고 불며 기도하는데 저는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아 왜 나를 복음에서 소외시키시냐고 따지고 애걸복걸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다 보니 질문이 많았는데, 제가 교회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던졌던 수많은 질문은 믿음이 부족해서 질문한다는 답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문제는 구원이라는 것이 이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문제를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명제를 성경 말씀으로 제시해 주셔서 대충 해결 봤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을 자주 들었는데, 그것은 제게 상당히 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라는 요구가 내키지 않았고, 하나님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요구는 하나님이 제가 이룬 것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찮을 것까지 다 하나님이 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속 좁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저는 그런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를 저희 전도사님은 믿음이 없고 교만하다고 하셨고, 저는 제가 진짜 믿음이 없고 교만한가를 놓고 매우 깊이 고민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읽는 방법들이 좀 더 세련되어지고 있을 당시 마태복음을 읽고, 예전에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이신칭의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에서는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서, 가장 마음이 아픈 자들을 위해서, 가장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하늘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너무도 자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지가 첫째가 될 것이라고,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아지고,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아 질 것이라고. 

 

저는 부자로 크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게 크지도 않았습니다. 공부도 꽤 잘했기에 꼴지보다는 첫째에 가까웠고, 유학도 다녀올 수 있었고,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니 함께 공부한 많은 학자와 비교하면 갑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제가 선 자리에서 마태복음을 읽다 보면 다시 천국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천국에 간다면 그곳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가장 낮은 바닥에 자리 깔고 앉아야 할 것이라고 저는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제게 낮은 곳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주님이 낮은 곳을 향해 오셨으니 나도 적어도 그곳에서 기웃거리면서 할 일을 찾아야겠다고 말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가끔은, 주님, 이 정도면 저도 바닥을 치고 있지 않냐고 물을 만한 때도 있었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은 정말 낮은 곳에 있는 분들이 가지신 것보다 한참 더 풍부해서 저를 어느새 다시 든든한 곳에 세워 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낮은 곳이 어딘가,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까 기웃거립니다. 그러다가 찾은 일들이 결국은 높은 곳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들이었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딱 맞지 않습니다? 독사의 자식아 누가 너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 주더냐? 가슴이 찔끔합니다. 그러면서도 속상하고 억울합니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는 것은 좀 봐주시면 안 되냐고 대들고 싶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논하고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을 논하며 그에게 다가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처참할 정도로 비판할 때, 너무 아파 요한의 눈을 피해 그 사람 다음 말씀들을 좇다 보니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펼친 사역이 보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역은 사람들을 성전으로 오라고 합니다. 아무리 멀리 살아도 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요단강으로 오라고 합니다. 아무리 멀리 살아도 요한의 사역에 동참하려면 요단강가로 와야 합니다. 이 두 그룹의 종교 지도자들의 패러다임을 보고 젊은 예수님이 선택하시고 다가간 곳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에게 다가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고 물로 나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즉 앞으로 나름의 지도자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광야에 가셔서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받으시고, 나아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있는 이들과 세례요한과 완전히 다른 사역 방식을 선택하십니다. 어디로 오라고 하는 대신, 예수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기로 하십니다. 이렇게 찾아가 만나는 사역에서 예수님은 아프고 낮은 자들도 많이 만나시지만, 그가 요한을 선택하면서 부정하고 비판한 성전 사람들, 즉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도 자주 만납니다.

 

잠시 저와 함께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요한의 독설을 듣고 그에게 다가간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세례를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연대하자고 나아온 이들에게 그렇게 악랄하게 굴면 굴욕적이어서, 화가 나서, 아님 너무 멋적어서 세례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마 그들 그냥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세례를 받았다면 뭐라도 몇 자 성경에 남겨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껏 여러 비영리사회단체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곳에서 사역을 해본 입장에서 보면, 요한은 이때 정말 바보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면 잡아야지요. 연대해야지요. 그러고서 작전을 짜서 뭔가를 해 봐야지요. 그들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지요. 도움의 손길 하나하나가 아쉬운데, 적의 진영에서 내게 붙겠다고 결심하고 다가오면 뭐라도 해 봐야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요한과 다른 선택을 하신 예수님은 이 부분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시는지 궁금해 마태복음을 탈탈 털면서 읽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성전과 연관된 여러 종교인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주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들은 바리새인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주로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할하는 역할을 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과 가장 유사한 사역을 하는 경쟁상대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한 존중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유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을 재해석 하시는 작업을 하시는데, 그 가운데 해주시는 말씀 중 5장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펼쳐질 때, 23장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뒤를 이어 예수님이 그들의 행실이 어떻게 악한 지를 칼같이 비판하십니다. 사실 그렇게 그들의 행실을 비판하실 때는 세례요한이 썼던 독사의 자식이라는 독설도 사용하십니다.

 

5장과 23장 사이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바리새인들을 마주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자리에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관찰하고 이래저래 질문들을 던집니다. 귀신을 쫓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고 비판합니다.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제자들을 눈여겨 봤다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표징을 달라고 요청도 해봅니다. 모세의 법을 따라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지 않겠냐고 도전적인 질문도 해봅니다. 급기야는 그 시대의 가장 정치적이고 모든 사람을 취약하게 만드는 질문을 가지고 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들이 예수님께 도전장을 던지기 위해 던진 질문들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의 문제의 핵심을 자극하기에 지극히 지혜로운 대답을 요구했고, 그들의 “좋은” 질문 덕에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의 문제를 볼 수 있는 통쾌한 혜안을 제공하실 기회를 얻습니다. 그들이 던진 세금에 관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의 답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감탄하고 물러갑니다. 

 

실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한 때 열 받아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을지언정, 정작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는 이들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서로 비판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그들에게 다시 돌아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을 늘 허락하셨고, 그들도 그 공간에 와서 계속 부비적거리며 예수님을 알아 나갑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마태복음에 다시 등장하는 순간인데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하루가 지난 시점에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관찰했던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사흘이 되는 날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경비를 붙여달라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상기할 수 있었고, 덕분에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게 되어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이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 삼자의 목격자들이 생겨나게 한 재미있는 우연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이들을 관찰하는 제게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세례요한처럼 쳐내셨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제일 잘하는 것 논쟁으로 그들과 맞붙어 주셔서 그들이 계속 예수님과 만나게 해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기회를 얻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떠나갔고, 그후 삼십 여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은 헤롯가와 같은 그 지역 유지를 꼭두각시 왕으로 사용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로마 행정부를 이스라엘에 두는 정책을 펼치며 유대인들과 전쟁을 치룹니다. 그 결과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합니다. 유태인의 모든 신앙과 종교활동의 중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의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성전의 일을 맡고 있었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들 존재의 근간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유대교가 성전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 계속 논쟁거리를 가지고 왔던 바리새인들은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논쟁으로 유대교를 살려냅니다. 무슨 말씀이냐고요? 그들은 성경, 즉 모세오경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지혜로운 큰 스승들의 성경 주석들을 찾아냅니다. 종이의 한 가운데 성경 말씀 몇 구절, 미슈나라고 부르는 큰 스승의 주석을 써놓고, 성전을 잃은 후 그 말씀과 주석을 읽고 해석하는 몇명의 바리새인 선생들 즉, 랍비라 불리던 이들의 해석과 논쟁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 랍비는 이렇게 해석했다고 종이의 한쪽에 써놓고 다른 한쪽에 다른 랍비가 그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폈는지를 기록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논쟁을 겹겹으로 모아 성경말씀과 미슈나를 둘러싼 문서가 탈무드입니다. 성전 파괴 후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그들의 논쟁을 모아 그들의 새로운 경전인 탈무드를 만들어 나가면서 계속 그들이 누구인지를 묻고 그 정체성을 다져 나갑니다. 그리하여 성전이 없어도 신앙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것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랍비닉 유대교입니다.

 

독사의 자식에게 구원이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다…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선포했었습니다. 요한은 아마 예수님도 자기처럼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불같은 독설을 뿜으며 망해가고 있는 사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며 사실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실제 그는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은 왜 금식을 하지 않으시냐고, 급기야는 당신이 오실 분이 맞냐고 물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이 기대했던 사역과 그림이 맞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바리새인을 정권에 빌어 붙은 악한 무리로만 규정하고 그에게 나아온 이들도 그렇게만 봤던 세례요한이 보지 못했던 그들의 가능성을 보고 계속 받아들여 준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요한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역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몰고 오신 하늘나라는 어쩌면 세례요한이 상상하던 하늘나라보다 더 큰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보낸 사람들과 대화를 하신 후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저는 감히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 부른 저 같은 사람도 잘하면 하늘나라에 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봅니다.

 

사실 저는 누구에게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제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딱히 논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마태복음을 읽으면 끊임없이 저 자신을 점검해야 하기에, 절 점검하는 도구로 이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향린교회에 출석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그 동안 제 눈에 들어온 향린은 이래저래 제 마음에 쏙 드는 교회였습니다. 사회의 아픔에 눈을 돌릴 줄 아는 교회, 정의를 추구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공동체 안의 힘을 지혜롭게 나눌 줄 아는 교회, 평신도들이 신학적 지식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세워 나가면서 함께 눈높이를 높이고 시야를 넓히며 성숙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 번영과 성장이 아니라 알찬 성숙을 추구하는 교회….

 

제가 마음에 드는 부분은 아마 제게 시간을 주시면 계속 열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다 보니 번뜩 걱정이 되더군요. 나의 취향이 선한 취향인가 하고 말이지요. 제가 워낙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어서 말이지요. 제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주님도 다 선하다고 하실 지요. 혹시, 향린과 내가 너무 닮아 있으면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나 싶어 노파심에 여러분도 이 성찰에 초대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늘 뜻을 펴보기 위해 말씀과 씨름하고 이런 결론을 나름 내려봅니다. 아직은 가진 게 많아서 하늘나라가서 좋은 자리 차지하기는 글렀지만, 현재 있는 자리에서는 세례요한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더라고 요한에게 다가갔던 바리새인들처럼 살아 볼까 합니다. 그들의 교만과 위선을 주님 그토록 경계하셨으니, 그들을 거울 삼아 내 안의 교만과 위선을 점검하되, 그들이 예수님께 계속 다가와서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세상이 던지는 어려운 질문들을 예수님께 던져 볼까 합니다. 혹시 그것이 가진 자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예수님께서 알려주고 계셨던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무슨 답을 하실지 계속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답을 주시면 그 답을 가지고 더 큰 질문을 가지고 다가가 볼까 합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하늘나라 비밀을 주님께서 조금씩 더 털어 놓아주셨으니 말이지요. 하늘나라가 계속 우리의 삶 속으로 침범하는 이 시간 향린 교우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제 잠시 각자 자신의 마음에 가라앉는 것들을 살피며 침묵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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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겟타드래곤 2019.12.18 09:32
    이날 하늘뜻펴기를 직접 듣지 못해 글로써 읽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한 자들아! 자신을 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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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다 2020.07.02 14:10
    성경을 보는 관점에 마르크시즘적 냄새가 많이 납니다 민중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보는것같군요
    본인의 죄와 인간의 절대무능에 대한 이해가 없어보입니다

    본인의 정치적성향을 기준으로 성경을 보지마시고
    본인의 정치성향 본인의 계획 생각 주장 전부를 십자가에 내려놓고 성령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밖아주시길 기도하세요
    본인 인생주권과 인생의 자유를 다 그리스도께 내어드리고
    완전히 항복하란 뜻입니다

    그이야기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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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제목
2020-03-01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 김희헌 | 2020-03-01
2020-02-23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김희헌 | 2020-02-23
2020-02-16 생명을 택하라 | 김희헌 | 2020-02-16
2020-02-0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김희헌 | 2020-02-09
2020-02-02 복이 있는 사람 | 김희헌 | 2019-02-02
2020-01-26 예수의 조직론 | 이성환 | 2020-01-26
2020-01-19 자기 안의 부모와 먼저 화해하라 | 고영순 | 2020-01-19
2020-01-12 하늘이 열리는 사건 | 김희헌 | 2020-01-12
2020-01-05 어떻게 나아갈까 | 김희헌 | 2020-01-05
2019-12-29 예수와 만나는 자리 | 이성환 | 2019-12-29
2019-12-25 자기 몸을 내어주는 이 | 김희헌 | 2019-12-25
2019-12-22 요셉의 고민 | 김희헌 | 2019-12-22
2019-12-15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 김희헌 | 2019-12-15
2019-12-08 독사의 자식들에게 구원이 있는가? | 박희규 | 2019-12-08 2
2019-12-01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 김희헌 | 2019-12-01
2019-11-24 농부의 꿈 | 이세우 | 2019-11-24 1
2019-11-17 사랑은 언제나 그 곳에 | 조은화 | 2019-11-17
2019-11-10 산 자의 하나님 | 김희헌 | 2019-11-10
2019-11-03 울타리를 넘는 예수님의 상상력 | 김광석, 김희헌 | 2019-11-03
2019-10-27 변혁의 원동력 | 이성환 | 2019-10-27
2019-10-20 존재좌표 | 김희헌 | 2019-10-20
2019-10-13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 김희헌 | 2019-10-13
2019-10-06 복 있는 사람, 다 주는 사람 | 유연희 목사 | 2019-10-06
2019-09-29 oo 으로는 못가요! | 조은화 | 2019-09-29
2019-09-22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김희헌 | 2019-09-22
2019-09-15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 김희헌 | 2019-09-15
2019-09-08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 | 김희헌 | 2019-09-08
2019-09-01 역사가 지어지는 자리 | 김희헌| 2019-09-01
2019-08-30 뒹굴며, 놀며, 밥을 나누며 / 예수님과 함께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요 | 김정원 / 조래섭 | 2019-08-25
2019-08-18 마른 땅을 지나듯 바다를 건넌 사람들 | 김희헌 | 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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