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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 김희헌 | 2019-12-15

by 김희헌 posted Dec 15, 2019 Views 23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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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2-15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35:1-10, 5:7-10, 11:2-11)

2019.12.15 대림절 셋째 주일

 

[고통 속에서 자라나는 영적 분별력]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의 삶에 구원과 기쁨으로 오시는 분을 기다립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오시는 분에 대해서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밖을 향한 관찰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변혁에 가깝습니다. 대림절에 신앙인이 가진 과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임하시도록 자신을 변화시켜내는 것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우리를 향해 오시는 분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실 우리 안에 계신 분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다지요. “나에게 신의 목소리는 양심의 목소리요, 진리의 목소리이며, 내면의 목소리이다. 조용하고 작은 이 목소리는 하나이며 같다.” (193378) 우리를 향해 오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목소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도 그것을 말합니다. 삼위일체 사상이 증언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을 지어가시는 성부 하나님과 갈릴리 예수를 통해서 이 역사에 드러난 성자 하나님과 지금도 우리를 구원과 평화로 이끄시는 성령 하나님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은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근거한다면, 밖에서 강림하시는 분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오시는 분을 맞이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 안에 계신 분의 음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문제에 대해서, 16세기에 예수회를 창립한 수도자 이냐시오는 영적 분별력’(spiritual discernment)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란, 우리가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과 같은지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이냐시오는 여기서 내면의 나침반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는 일종의 나침반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목소리가 뒤섞여 있어서, 무엇이 참된 목소리인지, 무엇이 거짓 목소리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영적 분별이라는 것은 복잡하고 모호한 미로를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서, 인간 예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어젯밤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 찾아 왔어. 누군가 왔었어. 확실히 그는 하나님이었어. 하나님... 아니, 악마였을까? 그가 하나님인지 악마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을까? 그들은 얼굴을 바꾸지. 하나님은 때로는 온통 어둠으로 나타나고, 악마는 온통 빛으로 나타나지. 그러니 사람의 정신이 혼란에 빠지는 거야.’

우리는 여기서 분별이라는 행위에 얽힌 복잡성과 모호성을 봅니다. 우리가 분별하는 일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지침이라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성숙해가는 과정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동의할만한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은총을 경험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고통의 세계 가운데 피어나는 은총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모든 믿음의 용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비참한 인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는 기독교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잠자는 영혼이 깨어나는 과정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 때 깨어납니다. 물론 고통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고통의 경험은 우리를 더 성숙하고 자비롭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무감각과 이기주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감각에 달려있습니다. (존 니프시,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158-59)

고통 자체가 영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의 영성은 고통을 통해서 깨닫게 된 은총로부터 비롯됩니다. 진정한 영성은 고통 속에서 경험한 사랑에 의해서 촉발되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에 임한 구원의 경험을 따라 자라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계절에 우리 사회와 우리 공동체는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다림 속에 하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거친 광야와 같은 삶에 하늘을 향해 거룩한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길을 열망한 사람들 / 이사야서 351-10]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기원전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제1이사야의 예언집(1-39)에 속해있습니다. 그런데 포로 귀환의 약속을 다룬 35장의 내용이 제1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역사적 정황과는 맞지 않아서, 학자들은 오늘 본문이 포로기에 활동한 2이사야의 예언(40-55)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봅니다. 약속의 예언은 사람들이 광야를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자적 상상력은 광야와 사막이라는 절대적 고통의 공간이 기쁨과 희락의 공간으로 변하는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언자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와 사막은 더 이상 심판과 투쟁과 시험과 고통이 지배하는 두려움의 장소가 아닙니다. 예언자의 눈에는 그곳이 기쁨의 자리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가시적 세계만을 두고 보면, 고통의 광야는 진리의 공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염두에 두고 보면, 광야는 해방과 진리의 공간이 됩니다.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들의 바람대로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안목의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관점이 바뀌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은 저절로 변합니다. 일반적인 사회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선이 진리이고, 악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진리는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포용하며, 다만 선악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5:45, 22:10) 믿음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힘을 잃은 사람들과 두려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합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주고,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35:3-4a)

포로기의 두려움에 잠긴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갈 때의 비참한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열왕기하서 257절을 보면, 바빌론 군대는 시드기야 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한 다음, 그의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포로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역사의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이 트라우마로부터 모두 회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사막과 같이 메마른 삶에 시냇물이 흐르고, 샘이 솟아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이사야는 그런 예언의 눈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8~9절을 보면, 포로생활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돌아올 길에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을 걷게 될 사람의 자격에 대해서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9절은 더욱 분명하게,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자가 본 이 거룩한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황량한 광야를 마술처럼 밀어내고 만든 고속도로라기보다는, 포로기의 고통과 광풍을 견디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맘에서 자라고 자라다가 마침내 튀어나온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길은 악한 마음을 갖고 걸을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을 찾지 못합니다. 오직 은총의 세계를 맛보고 절망의 세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어둠 속에서 포로로 살던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약속, 그것이 가장 깊은 절망에서 가장 거룩한 길을 내는 역사의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시대와 장소가 다르지만, 오늘 한국사회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 긴 분단체제의 모순과 적폐가 민족의 평화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신자유주의 체제 자본주도의 열차는 여전히 폭주하면서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피폐한 영혼에서 빚어진 편견과 혐오의 목소리는 일그러진 정의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토록 오랫동안 남과 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광풍에 시달렸다면, 이제는 평화로 가는 거룩한 길을 걷자고 하는 예언이 우리 민족의 심장에서 튀어나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이해관계에 골몰하여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싸움을 그치게 할 대담한 상상력이 태어나면서, 새로운 문명을 담을 체제실험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역사의 미래, 공동체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느냐? / 마태복음 112-11]

마태복음서 본문은 두 개의 선문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이 제자를 예수께 보내서 물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의심과 회의의 분위기를 띤 이 물음은 사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이 품을만한 간절한 물음입니다.

예수는 이 물음에 대해서 우회적인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었던 이사야서 355-6절에 나온 예언보다 더 큰 성취가 이루어진 자신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의 사역은 보지 못한 사람이 보게 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고, 열광하며 따르거나, 아니면 반대로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의 잔치가 도리어 걸림돌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예수의 물음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이 물음으로 시작된 두 번째 선문답은 세례요한이라는 위대한 예언자를 염두에 두고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답은 물음 속에 담겨 있습니다. 광야에 가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세 가지가 제시됩니다. 흔들리는 갈대이거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거나, 예언자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세례요한과 같은 예언자를 보기 위해서 광야에 나갔다고 답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질문은 그 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을 비하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찾아 광야로 나간 사람들, 그들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라고 독려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그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물음이 됩니다. 그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거룩한 길에 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생명의 부름을 안고 살아가는가? 당신의 사랑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기독교 전체를 향해 묵직하게 던진 사람 가운데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공단지역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보고 종교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독일교회 전체가 나치즘을 옹호할 때에는 가톨릭과 연대하여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고, () 나치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요성은 정치활동보다는 신학사상의 혁명에 있습니다.

물론 그의 신학도 이미 백년 가까이 되었기에 우리 시대는 그의 가르침을 넘어 또 다른 과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이 여전히 빚지고 있는 그의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는 종교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합리적 지성에 의해서 모두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낙관적 진보사상이 낳은 파괴적 결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가 주목한 것은, 이 역사를 향해 밀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빚어낸 삶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역동적 모험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오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서고자 하는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실은 역동적인 기다림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내와 기다림 / 야고보서 57-10]

오늘 마지막 성서 본문 야고보서 5장은 인내와 기다림에 대해서 말합니다. 본문은 인내와 기다림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기에 앞서, 4장에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잘못된 삶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진리를 지킨다는 미명 아래 벌어진 분열과 분쟁, 그로 인해 지리멸렬해진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본문이 제시하는 믿음의 모습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여기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신실한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11:14). 이른 비는 곡식이 자라도록 땅을 부드럽게 하는 비, 늦은 비는 알곡을 여물게 하는 비입니다. 농부는 철따라 비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신앙인의 모습은 이렇게 비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은 신앙인의 특징이요 (3:12), 성령의 열매이며 (5:22), 사랑의 모습입니다 (고전 13:4). 성서가 요구하는 신앙은 신념에 대한 충실이 아니라,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영적인 겸손입니다.

가톨릭 사제이자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다림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시대를 물들인 대표적인 현상이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 두려워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하여 적대적이며 파괴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갈등과 대결이 일상화되어 있고, 용서와 화해가 어려운 시대에 필요한 영성은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를 향해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곧장 심판하시기보다는,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따라 무르익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때,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성령의 단비를 간절히 기다릴 때, 우리를 새롭게 하는 대림절의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하늘의 단비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메마른 대지를 적셔줄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거친 광야와 같은 삶을 위로할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다립시다.

포로기의 고통 속에서 거룩한 길을 발견한 사람들처럼

시련 속에서도 예수의 길을 분별하고, 그 길을 걸어갑시다.

지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정의와 평화로 오시는 분이 가시는 길에 우리도 참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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