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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무엇을 바라보는가 | 김희헌 | 2018-06-10

by 김희헌 posted Jun 10, 2018 Views 40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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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6-10

무엇을 바라보는가 (삼상 8:4-20, 고후 4:13-5:1, 마가 3:20-35)

2018.06.10. 성령강림절 3 / 총회선교주일 / 6월항쟁기념주일

 

[6월 항쟁과 향린교회]

오늘은 6.10항쟁 3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876월 항쟁은 군사정권의 폭압통치를 끝내고, 직접선거를 통한 제도적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있게 한 거족적인 시민운동이었습니다. 그 이후 헌법개정을 통해 수립된 소위 ‘87년 체제는 세계화의 열풍과 함께 도래한 신자유주의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많은 한계를 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항쟁은 비폭력투쟁을 통해서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전환점으로서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사건임입니다.

작년에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상영된 <1987>이라는 영화에 우리 교회의 이름이 조금 바뀌어 나왔지요. 교회가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어떡하나 염려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1987년부터 몇 년 동안은 우리 교회가 진통을 앓던 기간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향린교회를 외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적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일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역사책인 [향린40년]을 보면, 우리 교회의 역사를 일곱 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7년부터 몇 년 동안을 다섯 번째 시기로 정하고, 그 기간의 특징을 변혁하는 교회로의 발돋움과 시련 받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 제목은 당시 향린교회가 가진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보다 변혁적인 교회로 발돋움하려는 열망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적인 갈등을 심각하게 겪는 모습입니다.

첫 번째로, ‘변혁의 교회로 발돋움하려는 움직임은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홍근수 목사의 목회철학과 그것에 동의하는 교우들의 신앙정신에서 촉발되었다고 봅니다. 6월 항쟁의 계기가 된 박종철고문치사사건114일에 일어났는데, 그 주간은 홍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한 지 세 번째 주간이 되는 때였습니다. 홍 목사님은 그 주의 설교제목을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 더 희생되어야 하는가!”로 잡고, 정권유지를 위해 고문과 살인을 저지른 독재정권을 비판합니다.

그 다음 주인 125에 열린 제직수련회에서는 교우들이 즉석에서 추모순서를 갖고 조의금(67만원)을 걷기도 하였고, 2주 후에는 전교회적으로 고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예배 드립니다. 이렇게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515일에는 NCCK 가맹교단의 각 교회가 동시에 드린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위한 구국기도회가 우리 교회에서도 열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민주화운동의 상징성을 갖게 된 이유는 6월 항쟁의 실질적 지도부가 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527일 우리 교회 2층에서 결성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명동성당에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 행사가 경찰들의 봉쇄로 인해 막히자, 당시 청소년부 예배실로 사용하던 곳에서 기습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운동본부에는 향린교인 가운데 안병무 선생과 박영숙 권사가 공동대표로 참여했고, 김춘옥 집사(당시 민가협 회장)이 집행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의 순례지 가운데 하나로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우리 교회는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홍근수 목사의 진취적인 목회노선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6월 항쟁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교회는 내부문제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920일에 열린 당회수련회에서 홍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둘러싼 당회원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향린교회가 제도교회가 되기보다는 출애굽교회가 되고, 후방목회보다는 전방(前方) 목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홍 목사님의 목회철학에 대한 이견의 표출이었습니다.

두 달 후인 1129일에 열린 임시당회에서는 갈등이 심화되면서 당회마비사태마저 벌어지게 됩니다. 이 날 당회에서는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청년신도회가 안병무 선생을 성서대학 강사로 초청하기로 하고 이미 주보를 통해서 홍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는 안병무 선생의 강사 초빙건을 표결하여 7:2로 불허하게 됩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한 당회원이 당시 청년담당 전도사가 교회 청년들을 의식화시키고 있으니 그를 해임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로 인한 갈등으로 당회는 마비사태를 맞게 됩니다.

결국 교인들이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해당 장로의 인책을 요구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분의 사과와 당회원의 절충을 통해 잠시 무마되는 듯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교회 내분이 계속되면서 많은 교우들이 교회를 떠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담임목사 목회서신을 통해 교회창립기념주일을 대화합의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그렇게 4년 가까이 교회갈등이 지속되면서, 결국 교회는 재산문제로 노회에 제소하는 일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향린40년] 5장의 마지막 부분은 내분사건의 평가라는 소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 마지막 문단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내분사태는 창립 이래 38년간의 긴 역사를 통해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들에서 보아온 다른 분쟁들의 경우와는 달리 목사가 쫓겨나지 않고 목사 반대파들, 그것도 창립자들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교회의 실세를 이루었던 유력한 중진 제직들이 조용히물러갔다고 하여 교회 밖에서 그래도 향린은 다른 교회와는 다르다는 평이 없지 않았으나, 이런 칭찬마저도 목회자와 교인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고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땅에 떨어진 향린의 명예를 회복해 줄 수는 더욱이 없었다. 한마디로 하면, 교회내분 사태는 철저히 실패한 사건이었다. 향린교회는 내부의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는 성숙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향린40년], 337)

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런 평가가 내려진 후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지난 4년여 기간 동안 우리 교회는 또 다른 모습의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많은 목회활동이 갈등을 잠재우는 일에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갈등과 교우들의 상처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는 지금 진보적 교회라는 명예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내부를 재정비하면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에게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지.

 

[보이는 것을 바란 사람들, 삼상 8:4-20]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본문은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오던 때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종족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사사(士師)로 불리는 덕망을 갖춘 지도자에 의해서 통솔되던 사회체제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부패에서 찾습니다.

사무엘이 늙자 두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길(derek)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 치우친 재판을 했습니다. (8:3) 장로들은 사무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고, 그 해결책으로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5). 이들의 요청은 모순된 것이었습니다. 덕망으로 다스리는(shaphat) 일은 사사(shopetim, shaphat의 명사형)의 일이지, 왕의 일이 아닙니다. (melek)지배’(malak)할 뿐이요 (11), 사람들을 종(ebed)으로 삼을 것입니다 (17).

이렇게 어리석은 요청을 하는 장로들의 말에 사무엘은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청을 들어주라 하십니다. 주목할 점은 백성들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8:7b-8)

기도를 마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그것은 왕이 다스릴 때 벌어질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불가피하게 다가올 이 새로운 체제는 이방나라를 봐서도 알 수 있듯이’ (5) 희망적인 세계는 아닙니다. 왕이 지배할 때, 자녀들은 왕을 위한 군인과 시종이 될 것이요, 밭과 포도원의 가장 좋은 소출은 빼앗길 것이며, 종과 가축도 세금으로 공출당하다가, 마침내 자신들마저 왕의 종(ebed)이 되고 말 것인데, 그 때는 울부짖어도 이미 늦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왕이 덕망으로 다스릴’(shaphat) 것이라고 말하면서 (20),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가진 욕망을 그 체제를 통해서 이루고자 합니다. 그것은 왕이 자신들을 이끌고 나가서 전투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용감한 것인가요, 어리석은 것인가요?

이 이야기는 부족동맹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왕조시대로 전환하던 때의 사회적 고민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비극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덕망과 선의에 기초한 질서는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로들의 판단은 현실적이었습니다. 사사의 뒤를 잇는 후계자들은 부패했고, 왕의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불확실한 미래를 지켜줄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현재 보이는 확실성을 통해서 해소하고자 합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이 사무엘을 찾아와서 왕을 요구하는 논리적 근거는 이제 모든 이방나라들처럼’ (5)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상적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험이라기보다는 이미 이웃나라에서 벌어진 체제를 답습/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웃나라가 하는 것처럼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요청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요? 왜 그들의 요청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새로운 질서가 항상 희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불운한 결과가 예견된 사태라고 해서 희망이 모두 사라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제 이들은 왕조시대를 지나가면서, 눈으로 환히 목격할 수 있는 그 힘의 정치로부터 생겨나는 환멸의 시간을 이겨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역사에 토해내는 예언자가 등장하기까지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믿음, 고후 4:13-5:1]

고린도후서 4장의 본문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추구하는 믿음의 삶은 역설의 삶이요, 역설의 삶이란 형식논리가 지배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참 삶을 위해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죽음으로써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속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은총의 세계를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14절의 말씀대로,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실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삶에는 낙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16절은 비록 겉사람(exo hemon anthropos)은 낡아가지만, 속사람(eso hemon)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겉모습은 낡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987514, 시민항쟁의 기운이 높아가며 긴장이 고조될 무렵, 명동 길거리에서 시민들이 전투경찰과 대치할 때, 그들의 가슴에 최루탄을 쏘지 마세요라고 써진 리본과 카네이션을 달아주던 우리 교회 여신도회원들은 이제 80이 되었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늙어가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종교는 불로장생이 아니라, 인생의 비극적 무게를 짊어질 힘에 관심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새로워지는 속사람, 우리의 내면세계입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만일 속사람이 우리가 겪는 삶의 고난이 영원한 영광에 비해 가벼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종교는 자신의 사명을 거의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낡아간다는 인생의 비극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을 가볍고 일시적인것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크고 영원한영광을 향해서 무거운 인생을 밀고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우리는 조금 전에 함께 읽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는 까닭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51절을 보면, 그는 땅에 있는 장막집(oikia)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운 영원한 집(oikodomen)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의 사실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선택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겉사람인가 속사람인가, 보이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영원한 것인가? 땅의 집인가 하늘의 집인가? 이것은 어느 한편이 중요하고, 다른 한편은 부질없다고 보는 분리의 언어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것을 붙잡고자 하는 열정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바울이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클로스를 형제자매로 본 예수, 마가 3:20-35]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오늘 마가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활동하실 때 그들을 둘러싼 군중들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오클로스라고 불리는 이 무리는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돌보느라 빵 먹을 겨를도 없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렇게 사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고, 가족들 역시 그 소문을 듣고 잡으러 왔습니다. 주변사람들 모두 예수가 귀신들렸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30) 이들은 누구의 논리를 따라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grammateus), 다시 말해서 그 시대의 사회적 문법(grammar)을 만든다는 사람들의 논리를 따랐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귀신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고 있다고 악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귀신 쫓는 일을 어찌 귀신의 힘을 빌려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인 반박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격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의 삶을 귀신 붙은 삶으로 취급했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 역시 귀신들리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삶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그런 시각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말합니다. (3:29)

그리고 예수께서 여전히 오클로스(민중)들과 함께 삶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옵니다. 마가복음은 그 상황을 이상하리만치 자세히 묘사합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서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 예수로 하여금 밖으로 나오도록 부릅니다. 그러자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오클로스들이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묻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변에 앉아 있는 오클로스를 둘러보며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매정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류가 하늘을 우러러 추구해온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할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에 대한 갈망에 관한 것입니다.

 

[서로 용기를 북돋는 언어와 관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자매가 되기를 바라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신앙공동체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종종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의 율법에 갇혀 형제자매가 되어주는 일에 실패합니다. 바리새인은 이기심이나 탐욕에 이끌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실패는 율법 밖의 사람들 즉,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다 나은 제도를 꿈꾸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변화시켜 나아가지만, 자신이 가진 바람과 꿈이 자신의 한계가 되어버리는 비극을 맛봅니다. 인류는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키고, 사상과 제도를 정비했지만, 아직까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완벽한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요청되는 사람이 달라질 뿐입니다. 과거에는 남보다 우뚝 선 영웅이 존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늘날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늘날에는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주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격려와 용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 586)

65년 전 한국전쟁을 그치고 휴전협정을 체결하기까지는 159회의 본회담과 575회 공식회의가 있었다고 하지요. 그 많은 만남은 서로 격려하는 만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지요. 지난 427일 판문점에서 만난 두 정상이 서로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그 10초의 사건대립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자 용기를 북돋는 멋진 일이었습니다.

또한 두 정상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에 가본 적이 없는데, 중국이 아닌 북측을 통해서 가보고 싶다고 하자, 김정은 위원장은 지금은 우리 교통이 불비(不備)해서 모시기 민망하다. 준비해서 나중에 편히 모시겠다.”고 화답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새 시대가 열렸다는 증거입니다.

이번 주 선거를 통해서, 새 시대가 온 것을 보지 못한 세력들은 한차례 씻겨 지고 말겠지요. 우리 교회도 새 시대가 오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를 씻어내고, 서로 용기를 북돋는 공동체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바울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의 비결이

보이지 않는 은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다가오는 새 시대를 맞이하십시오.

새로운 관계를 이루기 위해

서로 격려하며,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는 일에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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