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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예수와 만나는 자리 | 이성환 | 2019-12-29

by 이성환 posted Jan 03, 2020 Views 18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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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2-29

예수와 만나는 자리(사 63:7-9, 히 2:10-18, 마 2:13-23)

2019.12.29. 성탄절1

 

2019년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올해도 이렇게 저물고 있습니다. 올 한해 잘 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 오는 2020년을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한 해를 돌아보는 자리입니다. 목회마당에 향린10대뉴스를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돌아보면 교회 안팎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북미간의 평화협정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가 가기 전에 금강산도 가고 옥류관에서 냉면도 먹을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무엇보다 이산가족의 감격스러운 상봉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것들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또 아쉬운 점은 향린 10대뉴스 1위를 차지한 김용희 님의 투쟁이 성탄의 소식과 함께 마무리가 되어 땅에 내려오기를 기대했었지만 아직도 철탑위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용희 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어 왔습니다만 아직 그 결실을 맺지 못한 점, 깊어가는 겨울 추위만큼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에는 부디 구습의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건들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남북 간의 대화의 장이 다시금 열리고 북미간의 통큰 결단을 통한 평화의 길이 열리고, 김용희 님을 비롯한 이 땅의 억울한 사연들이 하나씩 풀려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지난 주 중에 성탄절을 지냈고 아직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들도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아다시피 예수 탄생 설화는 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에만 등장하는데 두 복음서의 내용이 다릅니다. 물론 같은 점도 있습니다. 딱 하나, 예수의 탄생지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빵집 내지는 떡집입니다. 한신대가 있는 동네가 병점인데 우리말로 하면 떡가게가 됩니다. 베들레헴과 병점을 결부시켜 예수 탄생의 복음을 품은 곳이라고 해석했던 교수님이 생각납니다만 여튼, 이것 말고는 두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탄생의 배경 이야기는 전혀 달리 진행됩니다. 

 

먼저 부모의 거주지입니다. 마태는 유대 베들레헴이고 누가는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헤롯의 영아 살해 정책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 갔다 돌아와 안착한 곳이 나사렛이라고 나오고 누가복음에서는 나사렛에 살다가 호적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탄생의 장소입니다. 마태는 예수의 부모가 살던 집에서, 누가는 말구유에서 태어납니다. 빈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빈곤과 소외 가운데 예수가 오셨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 탄생 당시 방문했던 사람들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입니다. 예수 탄생 사건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마태의 유대 민족주의가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입니다. 여기에는 동방박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대와 온 세계의 구원자로 오신 이를 알아본 자들은 그런 학식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샘 노동에 시달리는 민중이었다는 것을 누가는 부각시키려고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탄생한 시점입니다.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시점으로 따져보면, 유대지역을 통치했던 헤롯왕이 죽은 것은 주전 4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2살 미만의 영아를 살해하라고 지시한 그 시점을 거슬러 셈을 해보면 예수 탄생 시점을 주전 6년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도 언급하듯이 헤롯이 죽고 나서 예수의 가족이 이집트에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정착한 것이죠. 이런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헤롯이 사망한 주전 4년 이후에는 탄생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 탄생 시점은 주후 6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첫 번째 호적등록을 실시한 시점이 주후 6년입니다. 당시는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입니다. 이때가 주후 6년에서 7년이니까 누가복음이 특정한 그 시점은 주후 6년 정도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서 특정한 주전 4년과 누가복음에서 특정한 주후 6년 사이에는 1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공생애 이후 세상에 등장한 예수의 나이를 그저 서른 세 살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도 사라지게 됩니다. 두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나이는 마태는 29세, 누가는 39세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둘 중에 뭐가 맞을까요? 복음서라는 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증언하는 책이지 위인의 생애를 다룬 전기가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는 이러한 우문도 없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각 각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의 시대상이 다른 것이고 그 각각 다른 시대 상황 속에 일어난 예수 탄생 사건의 의미를 달리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호적등록이라는 식민지 백성들의 고난이 부각 됩니다. 호적등록을 왜 했을까요?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겠지요. 보다 효율적으로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보다많은 재화를 수탈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같은 이유에서 로마의 호적조사를 보면 될 것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헤롯왕의 폭정을 고발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언급하며 헤롯왕의 영아 살해와 예수 탄생 사건을 결부시켜 놨습니다. 

 

이 두 복음서의 보도를 보아 각각 다른 시대상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고난이라고 하는 같은 상황을 증언합니다. 즉, 예수 탄생의 배경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사회모순이 뒤섞여있는 암울한 식민지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 모두 예수의 탄생은 고난 가운데 있었던 사건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 한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들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가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꾸어 말해 예수가 온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상황에서 예수를 만났습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기에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내 인생에서 예수를 만나는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서, 어떤 상황에서 처음 예수를 접하셨습니까? 

 

모태신앙과 같은, 아니 모태신앙이라는 게 언어모순이죠. 태중에서부터 어머니의 의사에 의해 교회 출석은 할 수 있어도 그때부터 신앙을 갖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모태출석 정도가 맞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여튼, 머리가 굵어지고 신앙이라는 게 생길 때 처음 접했던 예수, 아니면 성인이 된 후 어떠한 사건이나 회심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면서 만났던 예수. 그 처음의 자리는 어땠습니까?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천 년 전 예수가 온 이 땅의 상황이 고달팠던 식민지 시절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처음 예수를 만났던 자리는 평화롭고, 부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겁니다. 존재에 대한 고민, 온갖 모순과 죄로 인해 팍팍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그러한 와중에 예수를 뜨겁게 만나지 않았습니까? 종교라는 게 보이지 않는 미래와, 죽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찾게 되는 것 아닙니까. 무언가 결핍이 있을 때,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갈급해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우리는 절대자를 찾게 되는 것이죠.

 

저는 이 시점에서 제 얘기를 할까합니다. 정확히 말해 제 아버지 얘기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앙정보부 공무원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경희의료원이고 태어나서 세 살까지 살았던 동네가 이문동이었습니다. 아마 그 때 당시 아버지의 직장이 이문동에 있는 대공분실이 아니었나 추정하는 대목입니다. 이후 아버지는 소위 남산으로 직장을 옮기셨고 건강상의 문제로 퇴직하기 전까지 그곳에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제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기억나는 사건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 직장동료들이 집에서 회식자리를 몇 번 가진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용돈이라도 벌 심산에 담배 연기 자욱한 방에 들어갔고 그들이 하는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했던 것인지 전해들은 얘기를 한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할머니의 유언으로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갖게 된 가정예배 자리에서 때마다 펑펑 울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 소위 중정에서의 그 일과는 아예 무관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지 전으로 기억합니다. 동네 주정뱅이 아저씨 한 분이 집에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무슨 과에서 일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도 안되는 질문들을 제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리창이 깨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살짝 경기가 왔고 마당에 깨진 유리 잔해 위에서 뒹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어느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동네 어귀에 있는 가게 앞 평상에서 사이다를 마시며 진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그 아저씨는 평소 아버지가 하는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차에 술김에 그런 식으로 항의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힘없는 민중이 할 수 있는 화풀이였던 것이죠.

 

과연 아버지에게 예수란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의 삶 어느 자리에서 예수를 만났을까? 제가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서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7,80년대 당시 온갖 모순의 정점에 서 있었던 악명높았던 국가 기관에서 녹을 받으며 일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예수는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그를 과거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했습니다. 건강문제로 퇴직한 아버지는 퇴직금의 상당부분을 건축헌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 재정부실에서는 할렐루야 소리가 터져나왔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천지 어느 한군데 비켜서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처럼 예수의 복음은 이 땅 곳곳에 내립니다. 죄인에게도 의인에게도 햇빛이 내리듯이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든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미 품에서 평안히 잠든 어린아이에게도, 살인자의 칼 끝에도, 이 땅의 모든 학살과 죄의 모순이 넘쳐나는 곳에도 하나님은 존재합니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닙니까? 

 

잘린 손가락 부여잡고 나뒹구는 노동자의 모습 속에서 함께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봤다는 80년대 어느 민중교회 목사의 증언처럼 오늘 본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이 땅의 죄와 모순과 더불어 뒹굴며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이사야서가 증언하는 시대적 상황은 바벨론 포로기 고난의 시절입니다. 히브리서 또한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스스로 고난 중에 아파하는 이 시대의 민중이 되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탄생,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을 오늘 성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신 예수, 우리의 번민, 이 시대의 고난, 이 한반도의 분단의 모순, 이 시대 수 많은 민중들이 아파하는 그 고난의 한 정점에 예수가 오셨다. 그리고 그 예수는 죽음에 종살이 하는 우리를 그 지긋지긋한 죄와 모순의 세상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이게 오늘 성서가 전하는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힘겹고 고단한 삶의 자리에 계십니까? 바로 그 자리에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가 계심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 발짝 내딛는 결연한 믿음으로 새로 오는 한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힘들고 어려운 상황,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고 함께 나아 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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