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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하늘이 열리는 사건 | 김희헌 | 2020-01-12

by 김희헌 posted Jan 12, 2020 Views 39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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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1-12

하늘이 열리는 사건 (42:1-9, 10:34-43, 3:13-17)

2020.01.12. 주현절 첫째 주일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이 열린 사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찬양하는 주현절입니다. 이 세상에는 억압과 전쟁, 불의와 고통이 그 모습을 바꾸며 이어집니다. 45일 전인 지난 1129, 경마 기수였던 문중원님이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좀 먼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을 탄다는 것이 서민의 삶과 동떨어져있고, 또 경마가 사행성 오락에 가깝다는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곳 역시 인생의 애환과 가족들의 꿈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농성천막을 방문했습니다. 정부종합청사 옆의 천막 앞에는 시신을 안치한 차량이 있고, 그 앞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관하시는 스님과 아내와 다른 한 사람, 이렇게 세 분만 있는 것이 안쓰럽고 허전하여 저도 불공드리는 분들 뒤에 앉아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41년 짧은 삶을 스스로 마감한 그의 비애를 주님이 씻어주시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그의 뜻을 우리 사회가 이어가며, 그분의 가족을 돕는 손길이 있기를 빌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난주에는 온 세계가 긴장하며 지냈습니다. 미국이 이란의 군 사령관을 공항에서 살해하고, 이에 대해서 이란이 보복하겠다고 공언하자, 두 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다행히 이란이 전면전을 피하는 방식으로 조정된 보복을 하는 것에 그쳤고, 미국이 이를 확대해서 하지 않아서, 군사적인 교전보다는 정치적 외교로 풀어질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이 일의 발단과 책임은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미국에 있지요. 한 나라의 군대 수장을 테러와 같은 방식으로 살해한 것은 그 자체가 범죄행위요, 전쟁도발 행위입니다. 미국이 오랜 동안 세계의 경찰국가처럼 활동했지만, 그 실상을 알고 보면 깡패국가였죠. 오늘날 미국중심의 세계질서를 비유하자면, 조폭에게 검찰 권력까지 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한 미 대사 해리스는 세계의 화약고가 될 수 있는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군을 파병하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는데, 이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미국의 면모를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비굴함을 반복하지 않고, 한미관계를 자주적이고 대등하게 세워야지만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소란한데, 주현절의 시작입니다. 이 땅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그것을 하늘이 열린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서는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켜 하늘이 열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겁게 덮고 어둠이 걷히고, 진실과 평화가 세워지는 것을 가리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것에 관심합니다.

성서의 정신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적 폭압의 질서를 극복하려는 해방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두 가지 핵심사건이 있습니다. 출애굽과 십자가 사건입니다. 1성서는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고통 받던 노예들의 탈출한 출애굽사건을 동심원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2성서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벌인 십자가에 예수가 달려 죽었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셨다는 이야기를 동심원으로 하여 모든 활동이 펼쳐집니다.

성서의 시각은 제국주의자들의 패권적 입장이 아니라,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합니다. 또한 죽임당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하늘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해방적이고 신학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종교에는 이런 성서의 정신이 잘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가 제국주의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공주의와 패권주의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이러니한 현상입니다. 교회가 패권주의에 물들자, 진보적인 사상들이 탈종교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성서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 역시 탈종교적인 목소리를 띠어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치에 대항한 기독교 윤리학자 디이트리히 본훼퍼 목사의 세속화 신학이요, 해방신학의 북미주 파트너였던 토마스 알타이저의 사신(死神)신학입니다. 이 신학들은 신의 죽음과 교회의 죽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보다 세속적인 방식으로 신앙의 길을 찾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이후 20세기의 진보사상 대부분이 이렇게 탈종교적인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진보사상들이 거꾸로 재종교화하는 경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바울의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정치철학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주요도시를 돌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데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패권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지요.

그런 흐름 가운데 알랑 바디우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제국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재해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전략의 중요성을 충분히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죽고 난 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포섭되면서, 바울의 논리마저 제국주의화 되어 해석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자들도 바울의 전략을 예수운동의 보수화라고 평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에 대한 오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말했던, 피스티스(믿음), 엘피스(소망), 아가페(사랑)는 모든 패권적 질서를 극복하려는 해방의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최초로 세워지던 당시를 상상해 보십시오. 로마가 지중해를 둘러싸고 지배하던 시대에 유대 사회는 그 식민 질서에 봉사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종교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게 삶인가, 이것도 믿음인가하고 묻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지요. 그 가운데 예수의 아가페 정신을 모토로 삼은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일에 앞장 선 사람이 사도 바울이 있었죠. 그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돌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갔습니다. 그의 무기는 세 가지, 믿음, 소망, 사랑이었습니다. (살전 5:8)

새해를 맞으며 목사로서 자문해봅니다. 우리 신앙공동체는 무엇을 꿈꾸는가?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이 공동체에서 서로 부대끼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 교회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이것은 아마 저만의 고민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깊은 위기의식이 드리어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신학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의지가 약해졌거나 윤리가 모호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본질적인 문제의 부수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공동체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왜곡된 데 있습니다. 믿음을 구성하는 앎이 잘못되면 신앙이 길을 잃습니다. 소망을 지탱하는 뜻이 왜곡되면 영적 질병에 걸립니다. 사랑이 숨 쉬지 못하면 공동체가 사소한 일에서도 질곡에 빠집니다.

어떻게 다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볼 수 있는가? 주현절 아침 우리가 생각해볼 과제입니다.

 

[예수가 꿈꾼 모든 의를 위해서 / 마태복음 313-17]

마태복음 본문은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도리어 내가 선생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이 나에게 세례를 받고자 왔는가!’ 하고 만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요한을 설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나의 뜻대로 하십시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어봅시다! 결국 요한이 수락하여 예수께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리는 것을 예수가 보게 됩니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눈여겨볼 대목은 16절에 나오는 표현,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이 언제 벌어졌느냐 하면, 예수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모든 의(pasan dikaiosynēn)란 무엇일까요? 수수께끼와 같은 이 말은 앞으로 예수의 삶을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은 예언을 통해서 이어져온 오랜 기다림이요, 시대가 갈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갈구하고 있나요?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패권적 힘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삶을 빼내려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종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는 사람이 역사에 태어나는 것을 가리켜 성서는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흥망성쇠의 굴곡이 있습니다. 종교적 위기가 생기는 경우는 대부분 내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의 정신이 자기시대보다 뒤쳐져서 힘을 잃을 때입니다. 복음이 시대보다 뒤쳐졌다는 것은 복음이 시대적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말이요,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할 능력을 잃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한 무능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종교가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종교는 정복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대결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 전투적 종교가 되어갑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예수의 정신은 사라지고, 안전과 승리를 판매하는 황제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의 종교이자 율법의 종교가 되면, 더 이상 하늘이 열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서가 들려준 복음의 정신에 충실해야 합니다. 고통과 질곡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자비로운 방식으로 열고자 했던 예수의 정신이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의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려했던 바울처럼 믿음의 모험을 벌여야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솟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종 / 이사야서 421-9]

이사야서 42장에 나오는 본문은 종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이라니까, 무슨 전근대적 신분주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적인 고백에서 ’(ebed)이라는 말은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위해 순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하나님이 붙들어주는 사람, 하나님이 택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1)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2),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진리로 공의를 베풉니다. (3)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웁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말하시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당신의 종을 찾는 하나님, 이런 종이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란 본래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보다 고상하고 원대한 것을 향하여 한없이 복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 그것이 믿음의 영혼이 가진 특징입니다. 영원한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엘피스(ἐλπίς), 소망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아름다움과 힘은 소망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의 특징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면, 소망이야말로 이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에서 성스러움(sacred)을 느낍니다. 신앙인이란 세속적인 바람 너머의 소망을 구성해가는 사람입니다.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삶에서 생명의 진정한 가치와 기쁨을 찾는 뚜렷한 의식이 바로 소망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5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창조해 펴시고 땅을 만드신 다음, 땅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neshamah)을 주시고,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목숨’(ruach)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뜻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주님은 당신의 를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종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뜻이요 다짐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ănî Yahweh hū šəmî)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눈먼 사람의 눈이 뜨여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사건, 갇힌 이들이 풀려서 하늘로 향한 길을 걷는 사건, 그것이 하나님이 받고자 하는 영광이요, 하나님이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은 찬양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할 당신의 종을 찾습니다.

 

[예수의 증인 / 사도행전 1034-43]

사도행전 본문은 고넬료라는 로마군인의 집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증언하면서, 자신은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을 가리켜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했다면, 베드로는 증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증인이란 헬라어로 마르투스’( μάρτυς)입니다. 그 의미가 목격자(witness)보다는 순교자(martyr)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증인이란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증인은 말보다는 삶에 그 방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민족에 속한다 하여 편애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34-35)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당신의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38-40) 우리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증언은 이것입니다.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 조각 몇 개를 믿는 싸구려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해 열린 하늘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바라며 하나님께 나옵니다. 무언가를 갈망하며 예수를 찾습니다. 그 끝에 발견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수난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이 움직여온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풍요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그릇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방식으로 풍요로울 수 있는 삶을 추구합니다. 기독교는 그 삶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언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증언이 진실하다는 것은, 형제자매의 고난, 이웃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참된 특징은 고난의 친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가 이 고난의 친교를 망각하면, 가장 본질적인 삶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친교야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이 땅에 임하는 방식이요, 땅이 하늘을 여는 열쇠입니다.

종교적 진리는 교리나 제도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와 제도는 내용을 담는 형식에 해당됩니다. 베드로가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그 증언의 공동체, 삶으로써 그것을 드러내려는 증인, 마르투스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현절 아침,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힘써야 할 삶의 경주입니다. 기독교적 경주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밀고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우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늘이 열릴까요? 아니 어떻게 열려야 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나라는 사랑이 이기는 세계입니다. 사랑이 이기는 교회, 사랑이 승리함으로써 하늘이 열리는 주현절의 사건이 이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했던 예수의 삶은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한 베드로 또한 이 역사에서 열리는 하늘의 증인으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곳이 하늘이 열리는 곳입니다. 오늘 그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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