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00년 동안 세계를 장악했던 기독교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가 끝났다. 다시 쉽게 말하자면,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이 세계가 멸망하고 죽음 후 다른 세계로 이주해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교회 기독교의 종말론적 믿음은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 성서의 원초적인 종말론적 신학은 죽음 후의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세적이다. 즉 예수의 종말론은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배타적인 성전종교와 제국주의 신학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은 폐기처분해야 하며, 차별과 경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분배의 정의와 평등이 구현되는 새로운 세계, 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교회 기독교를 넘어서는 종교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 21세기 우리의 세계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완전히 전산망으로 연결되었고, 지구화된 미래 인간 세계 속에서 새로운 종교적 의미와 가치가 창출되고 또한 발전해야 한다.
비록 1차 종교개혁에서 교회로부터 하느님 나라에로의 비전은 무산되었지만, 지금도 많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세계가 우주적인 통합으로 화해되고, 서로에게 완전히 투명한 보편적 복지 세계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인도주의자들이며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오늘날 그 꿈은 어느 정도 세속화된 형태를 취하는데, 그 이유는 미래에 전 지구적 생태인도주의가 매우 열렬하게 소통되어 그것이 각 사람의 뇌세포가 되는 단일화 세계의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세계는 최소한 이 땅위에 건설된 하느님 나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가로막는 세력들이 아직도 교회 내부에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로 안간힘을 다하여 발버둥치고 있다. 예수의 선교는 교회를 세우는 것도 아니며, 교회에게 신임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예수는 목사들과 신부들에게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더욱이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예수를 믿어야 징벌을 면하고 구원받는다는 상업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는 전혀 그런 종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예수는 이 땅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다. 예수는 세계가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개혁되는 대변동이 당장 일어나야 한다고 외쳤다. 새로운 세계는 이 세계를 떠나 죽음 후 내세로 연기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예수의 새로운 세계의 질서는 보편적 복락 즉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구현되는 시대이다. 다시 말해 2%가 98%의 부를 장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빈곤과 질병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98%의 민중들에게 구원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예수는 생전에 자신의 꿈이 이루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대신 교회가 출현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다면 예수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시켜야 한다. 불행하게도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실종되었으며, 더욱 슬픈 일은 평범한 사람 예수가 성상의 자리에 군림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변형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내세적인 하느님 나라 즉 죽음 후의 형이상학적인 천국으로 변질되었고, 교회는 이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주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예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쳤는데, 교회는 참 사람 예수를 버리고, 내세를 위한 필수조건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맹신하는 믿음체계의 노예가 되었다.
오늘날 주류 사회의 교육과 종교와 철학의 기초가 되는 138억 년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별개의 존재로 생각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의미는 인간의 몸과 분리된 믿어야 하는 타자로 공중에 떠도는 존재가 아니라, 내면적인 깨달음과 온전한 삶의 방식과 종교적 요청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가 죽은지 2천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오지 않았다. 교회는 그 나라를 지연시키고 또 지연시켜, 죽음 이후의 하늘 나라로 변질시켰다. 다시 말해, 교회는 지금 여기 이 세계를 버리고 아무 의미 없는 다른 세계를 찾고 있다. 종교적 관심이 천상의 세계에만 그 초점이 확고하게 맞추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직무는 사람들을 이 땅위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심판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 되었다. 교회는 천국행 티켓을 강제로 팔아먹는 상업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순진한 사람들은 교회의 거짓과 은폐에 속아넘어가서 무작정 교회에 다니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상 교회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두려움을 심어주고 위협하는 독재자의 횡포를 일삼는다.
그런데 왜 교회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가? 가장 큰 원인은 교회 도그마에 대한 믿음이 영원한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억지주장이 설득력과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쇠퇴를 이해하기 위해 공산주의의 몰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가 몰락했을 때 사람들은 그 종말론적 약속을 더 이상 믿기를 중단했다. 사람들은 진짜 구원의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의 두려움을 악용하여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는 독재자는 다만 사람들이 그에 대한 믿음만큼만 강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표층적인 믿음을 보류하기만 하면, 독재자의 권위와 권력은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인식했다. 한편 교회의 쇠퇴의 경우는 공산주의의 경우와 사뭇 다른데, 그 이유는 교회의 강압적인 주장과 권위에 대한 정당화가 죽음 저편에 놓여 있는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죽음 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한, 교회의 주장들이 결정적으로 거짓임을 인식할 수 없다. 분명히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진실일 것이라며 무작정 계속해서 교회의 거짓과 은폐를 무작정 믿으려고 발버둥칠 것이고, 죽음이 다가올수록 계속해서 교회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따라서 믿음체계의 교회는 마치 공산주의의 독재자처럼 지상적 권위를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주장하고, 샤람들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박탈하고, 절대 복종을 강요한다. 교인들은 내세지향적인 종말론적 믿음의 노예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마치 마약에 심하게 중독된 증세를 드러낼뿐이다.
중보교회의 믿음체계가 교인들에게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는 종말론적 믿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종말론적 신학의 기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 역사를 구원의 역사 즉 유혹-타락-죄-회개-속량의 구원사를 처음 발전시킨 사람은 분명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선신 아후라 마즈다가 악의 세력과의 긴 전투를 행할 무대로서 이 세계를 창조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의 최후의 승리를 지상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 성서는 마치 조로아스터교의 창조 이야기를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보인다.
“최후의 날들은 늘어나는 사악함과 우주적 재난들에 의해 그 징후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구세주 사오쉬안트(Saoshyant)가 영광 중에 올 것이다. 그는 예언자의 씨에서 태어날 것이며, 기적적으로 호수 안에, 그리고 처녀 어머니 안에 보호될 것이다. 선인들과 악인 사이에 ... 큰 전쟁이 있을 것이며, 선인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먼저 죽은 이들의 육체는 부활해서 그들의 영혼과 결합할 것이며,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것이다... 구원받은 이들은 신들의 음식을 먹을 것이며,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영혼처럼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왕국은 다시 완전하게 만들어진 지상 위에 도래할 것이며, 복 받은 자들은 그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기뻐할 것이다.” (A Handbook of Living Religion, J.R. Hinnels;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성서를 기록한 고대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신학은 이렇게 조로아스터 신화 즉 마즈다 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조로아스터 신화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은 아마도 바벨론 포로기 (주전 587-538년) 동안에 이 사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서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때가 50여년의 바베론 포로기 동안 내지는 그 후였으며,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전환된 때도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 사상은 예수에게,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에 전달되었으며, 보다 최근에는 서구 역사주의와 정치적 유토피아주의에 전달되었다. 이 사상은 심지어 힌두교와 불교의 종말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사상은 북아메리카의 초기 역사에서, 북미가 신세계 그 자체라는 생각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또한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희망의 핵심이었다. 최근에 이 사상의 가장 유명한 표현은 19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아메리칸 드림 선언과 70년대 존 레논의 서정시 ‘상상해보세요!’(Imagine)이었다. [참고: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혹은 배화교(拜火敎)가 창시된 시기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다양하다. 이 종교는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수슈트라가 세웠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그리스어에서 변한 게 조로아스터다. 기원전 600년경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때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미 그리스 지방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sda)를 중심으로 선과 악 이분법으로 세계를 구분한 게 특징이다.]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대부분의 인간의 역사, 특별히 세계를 지배했던 서구 역사는 조로아스터 신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신화의 종말론적 신학은 이 세계를 포기하고 죽음 후에 다른 세계로 이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잘못된 이 세계는 끝이나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재건설하는 비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이 신화는 사람들을 전통주의라는 폭군으로부터 해방하는 용기와 힘을 주었다. 이 신화의 종말론적 사상은 우선 우리에게 미래는 과거보다 더 나아질지도 모르며, 더 나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낫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부여해주었다. 과거의 황금 시대에 정해진 행동 패턴과 표준에 영원히 속박되는 대신에, 사람들은 희망 속에서 이 땅위에 더 나은 세계가 건설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며, 또한 그것 이상으로,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은 어떨 것인가를 상상하도록 초대되었다. 그것은 단지 열망의 대상뿐 아니라, 가능한 행동의 목표가 되었다. 우리가 과거에 살았던 삶에 의하여, 우리는 그 새로운 세계를 위해 우리가 준비하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실제로 그 세계의 도래를 촉진시킬 수 있다. 최소한 우리는 그 새로운 세계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가 처음에는 새로운 가치와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 그 다음에는 실제로 그 새로운 가치과 더 나은 세계가 생겨나도록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인간적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초대한다. 다시 말해, 종교란 우리 자신에 대해 다시 상상하고 다시 창조하며, 우리의 가치를 투사하는 공동체적 방식이다. 종교는 초자연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인간의 더 나은 삶과 모두에게 더 살기 좋은 이 세계에 대한 것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