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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복이 있는 사람 | 김희헌 | 2019-02-02

by 김희헌 posted Feb 02, 2020 Views 21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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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2-02

복이 있는 사람 (6:1-8, 고전 1:18-31, 5:1-12)

2020.02.02. 주현절 넷째 주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계에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 중국에서 최초의 환자가 생긴 이후 한 달 새 빠르게 확산되면서, 벌써 삼백 명이 넘게 사망하고, 15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었습니다. 확진자 가운데 이천여 명이 중태라고 하니 이 위기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온 세계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염병과 같은 총체적인 위기가 오면,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서 보다 근원적인 성찰을 하게 됩니다. 바삐 사는 동안 보이지 않던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 때면 낯선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기일수록 함께 이겨내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서로 사는 곳은 다르지만, 세계시민의식을 갖고 공동대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위기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공포의 바이러스를 일부러 퍼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역감정이나 인종주의를 조장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보다 인간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불행한 선택일 것입니다. 도리어 위기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면서, 관성적인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에 책을 서너 권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진화하는 종교](Religion in the Making)라는 제목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종교론을 다룬 책이 있습니다. 약 백 년 전에 써진 이 짧은 책은 서술적인 설명보다는 직관적인 통찰을 줍니다. 이 책은 과학의 발전에 비해 종교가 쇠퇴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자신의 생각을 과도하게 비호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다른 생각으로부터 배우려하지 않는 자족적인 현학에 갇혔기 때문이요, 셋째는 열성분자들의 확신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A. N. Whitehead, [진화하는 종교], 137)

오늘 우리들 역시, 삶과 믿음을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신앙공동체를 가꾸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바친 분들이 계시지요. 또한 그 전통을 새롭게 잇기 위해 공동체에 합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하여, 또 무엇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오후에 새날청년회 교우들이 그동안 독서토론을 한 내용을 음악과 함께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격려합니다. 한 번은 새날청년회의 독서모임인 인문공화국에 참석하여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할만한 인간다움의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세대마다 관심하는 지점이 다릅니다. 제가 속한 세대는 사회적 신념에 자기 삶을 몰입시키는 시기를 살았던 것 같습니다. 독재와 분단의 시대를 이겨낼 비판의식을 기르는 것에 많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을 향유하는 능력, 자신의 자질과 개성을 계발하는 일에 둔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신앙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파커 팔머라는 사회운동가이자 영성가는 신앙의 목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인으로 부름 받은 자의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자기로 성숙하는 것이라고.

참된 자기로 성숙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존재의 결핍을 느끼지 않고 충만하며, 행위가 과도하지 않고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 모습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으로 나타난 믿음 / 마태복음 51-12]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는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으로 넉 주 동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산상설교를 가리켜 저항문학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가치를 뒤집는 혁명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의 첫 번째 이야기는 팔복, Beatitude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원문의 문학적 형식으로 보면 구복(九福)’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편의상 팔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해도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의 가르침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평지설교(6:20-26)의 병행구절과 비교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두 본문을 서로 비교하면 두 가지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형식상의 차이입니다. 마태는 팔복을 말하는 반면, 누가는 네 가지 축복과 네 가지 재앙을 말합니다. 누가가 복을 빈 사람은 직접적인 물질적 곤궁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여기에 네 가지 도덕적인 유형을 추가하여 축복을 전합니다. 온유한 사람(3), 자비로운 사람(5), 마음이 깨끗한 사람(6),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7)입니다.

두 번째의 차이는 내용상의 차이입니다. 누가의 언어는 명료하고, 구도는 간결합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면 부자는 화가 있고,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면 배부른 자는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렇게 가난과 굶주림의 물질적 의미를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가난과 굶주림의 영적인 의미를 덧붙입니다. 물질적인 가난함 자체가 아니라, ‘마음’(pneumati)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굶주림도 몸의 배고픔이 아니라 ()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는 이렇게 축복의 대상을 넓힙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마태가 예수의 말씀을 관념화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본래 말씀은 물질적인 가난과 배고픔이라는 사회학적 의미를 가졌는데, 마태가 그것에 정신을 덧입혀서 의미를 희석시켰다고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전통을 생각해본다면 마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가난이라는 말 자체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피난처가 없고, 그런 의지(依支) 자체가 영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서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40:17)

안병무 선생님의 해석을 따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마태복음에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가 선언하는 축복은 궁핍하고 박해 받는 수동적 대상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보다 능동적으로 도덕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에게도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안병무, [구걸하는 초월자], 270) 그것은 자기 존재의 조건에 의해서 신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존재를 극복하여 축복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여기에 마태복음이 말하는 축복의 비밀이 있다고 봅니다. 마태는 그리스어로 행복하다는 뜻의 마카리오이’(Makarioi)를 반복하여 말하는데,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그 행복을 느끼는 주체가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슬피 울며 박해를 받는 사람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는 없겠지요. 그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예수요, 그런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여기는 하늘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 있는 사람의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목표라고도 하겠습니다.

팔복의 가르침에서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부분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입니다. 8개의 문장은 두 가지 다른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와 여덟 번째 문장은 현재시제를 사용한 반면, 셋째부터 일곱 번째는 단순미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시제를 사용한 것은 같은 내용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장 하늘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밖의 축복은 미래시제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축복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의 어법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의 어법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위로하실 것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볼 것이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베푼 이 축복의 약속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형의 길 / 고린도전서 118-31]

오늘 서신서의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네 개의 파벌로 갈라진 그들에게 바울이 비통한 목소리로 요구한 말은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제시한 바울의 해답은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말씀(, logos)은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보면, 그 길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구원의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대변하는 사람들, 현자와 학자와 변론가들은 십자가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그 길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22절부터 세 가지 방식의 믿음의 길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세 가지 유형의 종교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첫째는 기적을 요구(demand)하는 길이요, 둘째는 지혜를 찾는(desire) 이요, 셋째는 십자가를 전하는(preach) 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끼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지혜가 되어 펼쳐집니다. 24절에서 말하는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이 자신의 소명이 된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길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힘이요 지혜가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세 가지 길에 대해서 말했지만, 실상은 두 개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klesis)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갈립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24, 26) 이것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길은 걸림돌이 되거나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모양은 기독교이지만, 자기로부터 시작된 종교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로써는 자신이 요구하고 갈망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은 사람,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힘이요 지혜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 깨달음을 얻는 바울은,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위해서 선택한 사람은 세상의 강자와 현자들이 아니라 비천하고 멸시받는 약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입니다. (5:17) 이 믿음에서 삶을 대하는 방식의 모든 차이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당신의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지어 가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교만과 기만의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고 상대방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보고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갖추게 됩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새롭게 열리는 세계를 원했습니다. 그 세계는 힘이 지배하지 않고, 약함이 보살핌을 받는 세계입니다. 기적과 지혜가 상대방을 억누르는 무기가 되지 않고, 믿음의 상상력이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세계입니다. 과거의 전통이 폐쇄적인 정체성으로서 군림하지 않고, 사랑으로써 성령의 친교를 일구어가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의 수사학이 아닙니다.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긍지와 기품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오랜 시간동안 성서의 신앙공동체가 간직해온 믿음의 전통입니다.

 

[주어진 것에 대한 분별 / 미가서 61-8]

오늘 제1성서의 본문 미가서 6장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갖는 마음가짐이 나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 사람(adam),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미가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분별이 필요할 때 참고할 내용은 5절에 나오는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부르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적들이 침략하는 위기 속에서 분별력을 잃은 모압의 왕 발락왕이 듣고자 하는 예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러주시는 것만 말하는 모압의 예언자 발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분별에 관한 것이요,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문제입니다. 신성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몸 밖이냐 안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들을 귀가 있어야 들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은 기적을 요구하는 길, 지혜를 갈망하는 길도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심을 받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는 삶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8절에서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거듭 말합니다. 존 니프시라는 신학자는 주님의 이 부르심’(klesis)을 가리켜, ‘우리를 운명으로 부르는 내적 목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목소리를 어떤 사람에게는 들려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침묵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두에게 이미 들려주셨고 또 들려주시지만, 어떤 이들은 듣고 어떤 이들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성한 목적에 관한 직관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여러 갈망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보편적인 것은 방향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기 삶의 목적을 더 깊고 더 충만한 인간이 되는 것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doing)를 묻고, 자신이 누구인지(being)를 묻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인간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만이 아니라 바알의 예언자도 그런 물음을 갖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발람은 모압 지역에 있는 바알 신전의 예언자로 보입니다.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가 민수기 22~24장까지 길게 나오는데, 2241절을 보면, 발람이 왕 발락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곳은 바알의 신전입니다.

예언자 미가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는 민족이나 종교의 차별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많은 목소리 가운데, 무엇이 기적을 요구하는 목소리인지, 무엇이 지혜를 갈망하는 목소리인지, 무엇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자는 목소리인지를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면서 서로 나는 바울파요, 나는 베드로파라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 안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무엇이 거룩한 목소리인지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은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깊이요, 둘째는 진정성이며, 셋째는 관대함입니다. 어떤 목소리를 따를 때, 우리 삶이 더 깊어지고, 더 진실해지며, 더 관대해지를 봐야 합니다.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도덕적인 목소리라고 해서 그것이 거룩한 목소리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자신의 잘잘못에 대해서 따지는 내면의 비평가가 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가리켜 초자아’(superego)라고 말합니다. 초자아는 도덕적인 규범이 내면화되면서 발달된 정신의 구조입니다. 그것이 확립되면 사사건건 관여하며 우리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으면 삶을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만들며, 우울증에 빠뜨리고, 때로는 자기를 혐오하게도 만듭니다. 때로는 그것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한다는 질책의 목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가장한 그런 목소리는 이 세상의 욕망과 규범을 대변하며 영적인 진보를 차단하는 목소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이 욕망하는 기적이나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걷게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미가는 주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이미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삶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진실해지며, 더욱 관대해지는 것입니다. 미가는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많은 피조물이 고통당하는 시대입니다. 이 전환의 시대에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미가 예언자는 말합니다. 행동할 때는 의롭게 하고, 사랑할 때는 부드럽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예언자 미가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행동할 때는 의롭게 하고, 사랑할 때는 부드럽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지금 하나님나라를 소유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우리 모두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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