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의 신앙의 핵심은 지금 여기(Here & Now) 이 세계에서 하루하루 어떻게 사람답게 의미있게 행복하게 자유하게 사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과 죽음 후의 다른 세계에 관한 것으로 전락했다.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세뇌시키기 위해 죽음의 두려움을 심어주고, 공포감을 조장하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라는 거짓과 무지함을 강요한다. 또한 죽기 전에 교회에 다녀야 구원받고,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상업적인 기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종교관은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결과들을 초래한다. 다시 말해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헛된 수고로 자신들의 한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계의 삶 곧 우리의 유일한 삶에 최선을 다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사후의 삶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포기할 때, 현재의 이 삶을 최종적인 삶이며 종교적으로도 고귀한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들은 죽음 지향적인 종교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의 이 삶을 최대한 선용하도록 하는 종교를 찾을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사후의 삶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종교적 관심을 쏟는 것이 종교 현장을 특정짓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은 죽음조차도 삶 지향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장례식(Funeral)이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그대신 고인이 우리와 함께 살았던 삶에 대한 경축의식(Celebration of Life)으로 그 명칭이 점점 바뀌어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천국환송예배 따위의 낡은 표현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오늘날 주류 사회의 교육과 종교와 철학의 기초가 되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우주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별의 죽음(폭발)은 새로운 별의 시작이며, 생명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죽음은 저주와 징벌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다.
종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종교는 일반 사람들에게 크게 두 가지로 착각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믿음체계가 만든 신조를 믿는 것과 교회(사찰, 성당, 회당, 사원)에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초자연적 믿음 체계에 동의하고 집착하며, 그러한 믿음들이 재연되고 기념되는 연중 행사를 지킴으로써 종교단체에 참여한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는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그런 것들 중 아무것도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어떤 두드러지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세계와 삶과 죽음에 관한 명백한 사실들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다. 그렇다면, 특히 교회 종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성취하는가? 사람들은 그로부터 무엇을 얻는가? 불행하게도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항상 두려움과 이기심과 우월적인 배타심으로 불안과 분노와 혼돈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예수의 종교, 예수의 기독교, 예수의 교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새로운 세계 즉 더 나은 세상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첫째로, 더 나은 세상에서는 종교가 더 이상 분리된 제도나 별개의 삶의 영역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가 과거에 그 역할에서 맡은 과제는 완수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삶의 모든 것이 경계 넘어 통합적인 연속체가 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 속에 흩어져 있으며, 정치적으로 군주제는 민주주주의로 대체된다. 사회적 서열의 모든 위계질서와 구분이 사라지는데, 그것은 마치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즉 모든 경계들과 차별들이 무너진다. (2) 둘째로, 삶 외부에는 더 이상 어떤 가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모든 가치가 본래적이 된다. 지금 여기 이 세계를 넘어선 그 이상의 (초자연적인) 실재는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중개적인 도구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며, 도구적 행동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 해방이나, 우리 자신의 영혼의 구원처럼 더 나은 미래나 장기적 선을 위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가치를 가져야 하며, 확증되고, 사랑받고,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제도화 내지는 도구화도 없기 때문에 어떠한 은폐와 기만도 없다. 아무것도 감추어진 배후가 없기 때문에 감추어진 동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 너머의 것이란 더 이상 없다. 모든 의사소통은 완전히 열려있고 투명하다. 밝은 태양빛이 영원하고 만물을 채우며(누가복음 12:16-20), 사람들은 전적으로 현재에 산다. (마태복음 6:25-34) 그리고 더 이상 일하고 걱정해야 할 미래가 없는 은퇴노인처럼 불필요한 욕심을 갖지 않고 차분해진다. (3) 셋째로, 그 새로운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외적인 권위나 성문법의 멍에 아래 있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모든 것이 자율적으로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다. 따라서 윤리학의 유일한 기초는 완전한 상호인간성이 될 것이다. 즉 윤리학은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으로 될 것이다. 모든 삶은 종교적 언어로 교제(communion)라고 불리는 것, 그리고 현대 언어로 의사소통이라 일컬어지는 상호 교환의 흐름이 될 것이다. 즉 사람들이 지키지도 않는 돌판이나 성서의 문자적인 외적 율법은 마음에 새겨진 법으로 대체될 것이다. (4) 넷째로, 인간들이 상호간에 그리고 세계와 완전히 화해하게 됨으로써 세계는 완전히 인간에게 적합해진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자연 세계와 인간의 사회적 세계는 일치한다. 인간의 문화는 완전히 지구화된다. 언어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인종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사라진다. 성서가 말하는 성령강림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는 경계 넘어 민족주의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이사야 25:6-9)
결론적으로, 그 새로운 시대에는 모든 삶이 통합적인 신성한 연속체가 되며, 삶의 모든 가치는 본래적이 되고, 윤리관은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으로 되며, 인간의 의식은 완전히 지구화된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원초적인 기독교 공동체는 그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했다.
예수가 죽은 후 2천년이 지난 오늘 교회는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지금 여기에 그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가? 또한 오늘날 교회와 종교가 쇠퇴하고 있는 상황은 어떠한가? 17세기에 이성을 통해 사회의 무지를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자는 계몽주의 사상이 주창되어 확산되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계몽주의 이래로 세속문화는 원초적인 종교적 꿈에 대한 역사적 실현을 향해 꾸준히 움직여왔다. 그것은 세속문화가 교회보다 더 긍정적으로 발전해갔다. 예를 들자면, 세속문화는 교회보다 더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이었으며, 더 일관되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했다. 세속문화는 더 지구화되었고 국가의 경계를 넘었으나, 반면 교회는 너무도 자주 단순히 부족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화자찬에 빠졌다. 매우 놀라운 것은, 세속문화는 제도적인 종교의 믿음체계를 믿지 않으며, 죽음 후의 삶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다. 오늘의 세속문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마지막 세상이며, 이 세상 너머에 어떤 다른 세계는 없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세속문화는 자신을 지금 여기에, 생명의 가치에, 그리고 생명의 새로운 종교에 헌신하고 있다. 이 처럼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믿기를 중단하게 될 때, 종교는 더 솔직하고 진지해진다. 더 나아가, 새로운 지구적 세계질서를 건설하려는 에큐메니컬(교회통합적) 시도, 유엔 그리고 일련의 국제기구들은 교회 안에서보다 세속 영역에서 훨씬 더 큰 진전을 보였다. 하느님 나라 형태의 인도주의적 윤리는 그 어느 교회 기구보다 ‘국경 없는 의사회’ (Medicine San Frontiers, 1977년에 결성되어 매년 3천 명의 의사, 간호사들이 자원봉사활동을 한다)같은 기구의 활동 속에서 더 발달되었다. 마침내 세속문화는 지구적 규모로 열심히 소통되고 있으며, 교회에서보다 훨씬 더 언론의 자유에 투신하고 있다.
계몽주의 이래로 세속문화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종교의 꿈을 계속 추구해왔으며, 상당한 성공을 이루어왔다. 세속문화가 건설해온 세계, 곧 유엔, 국제법, 민주 정치, 끊임없는 지구적 대화와 인도주의적 윤리학의 세계는 오늘날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인종적 및 종교적 차별, 빈부차별을 추방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이 새로운 세계는 교회의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훨씬 더 발전된 형태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세계를 버리고 죽음 후에 다른 세계에서의 삶에 메어달리는 종교는 쇠퇴해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기독교가 과거로부터 벗어나 보다 큰 외부 세계 안에서 계속 발전해오는 동안에도, 중보교회는 과거 안에 남아 있었다. 오늘날 내세를 꿈꾸는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없어도 좋다. 고대의 삼층 세계관에 안주하는 교회는 21세기 삼층 세계관의 주류 사회에서 분쟁만 일으키는 무용지물이다.
인류사에서 원초적으로 종교적 사상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유토피아적이었다. 사람들은 종교적 실천을 이 지상에서 불의와 폭력과 탄압과 착취를 척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생각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초자연적인 내세적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세적 희망에 관한 것이다. 종교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세계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꿈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공동체적 방식이다. 우리는 그 꿈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며, 그리고 어떻게 그 꿈이 모두 실현되도록 실제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표층적인 위로와 거짓된 확신을 약속하는 일에 몰두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집단적으로 포기하고 교회를 떠났다. 오늘날 흔하게 볼 수 있는 교회들은 일종의 교회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의 종교도 아니고 예수의 기독교도 아닌 사아비 종교이다. 교회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은 종교의 기능에 대해서 자아와 세계를 큰 그림으로 다시 그리고, 다시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방식이라고 인식한다. 종교는 우리가 어떻게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세계가 기술문명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는 때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고 투명하고 심층적인 종교를 더욱 필요로 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적이며 가치 창조적인 활동으로서의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개혁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종교개혁은 교회로부터 하느님 나라에로의 전환, 다시 말해 교회 그 자체를 정화하며, 죽음을 준비하기 보다 지금 여기에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자신을 쏟아붓는 것이다. 즉 교회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헛된 수고를 중단하고, 태양처럼 사심없는 자기희생의 자아에로의 변신이 곧 하느님 나라에로의 전환이다. 기독교인들의 과제는 공동체적 인간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고,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종교적 의미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살아있는 징표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수동적인 믿음(belief)보다 자율적인 영성(spirituality)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시 말해, 죽음의 두려움을 심어주는 믿음을 버리고, 죽음의 공포를 정복하는 삶을 심층적으로 살아가는 영성을 개발해야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보통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매우 초자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땅위에서 제한적인 시간 속에서 사는 인간이 죽음 후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불멸하는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삼층 세계관적 상상을 믿을 수 없다. 영원함은 지금 여기에 하루하루 순간순간 속에 있다. 영원함은 미래형이 아니라 지극히 진행형이고 현재형이다. 이 궁극적인 진리는 지난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에 담겨 있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 세계의 삶은 최종적이며, 이 삶 이외에 다른 세계의 삶은 없다.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언제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시간 속에 살면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행복의 비결은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과 배타적인 우월감이라는 독소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예수는 이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가르치고 몸소 살아냈다. 예수의 교회도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두려움없이 자유하게 살아야 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