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삼층 세계관에 기초하는 교회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분법적 차별과 분리이다. 다시 말해, 교회 안과 밖,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천국과 지옥, 거룩한 교회와 세속적인 세상,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 구원과 징벌, 부유함과 가난함 등이다. 교회의 차별과 분리 때문에 가정과 사회와 세계가 폭력과 혼돈에 빠져들었다. 교회 기독교의 이러한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의 가장 큰 원인은 교회가 항상 실재론적(實在論 Realism- 인간의 외부에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즉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이 객관적인 존재를 인정해야 하며 이에 입각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질서정연하고, 정교하게 구조화되고, 차별화된 신성한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우주의 출현 이전부터 존재했고, 미리 계획하고 설계한대로 세계를 창조했고, 지금도 세상에 개입하여 멋대로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예정론적 우주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그것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기독교는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하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론과 유신론적 창조론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상을 거부하며, 이러한 교회 기독교 신학을 폐기처분한다. 오늘날 무지함에 빠진 교회의 개혁과 가치있는 도덕적 및 종교적 정화를 위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신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다른 종교인들을 차별하고 오직 기독교인만 구원받는다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구원론을 맹신하는 교회가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원인은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비겁함과 무지함때문이다. 다른 종교들과 인종들에 대해 우월적인 차별주의와 배타주의를 합리화하는 교회는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삼층 세계관과 이원론적인 가치관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는 태초에 하느님이 세계를 일련의 차별과 분별의 행위로 창조했다는 괴상한 창조론을 믿는다. 차별과 분별이라는 말의 어원은 분리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특히 밀을 겨로부터, 그리고 일반적으로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들로부터 분리해낸다는 의미이다. 차별과 분별에는 분명히 평가와 심판과 재판이 개입하는데, 사람들을 피부색깔과 출신과 재산과 교육과 경험과 사상 등에 따라서 두 가지의 뚜렷한 다름이 나타나도록 지역화 또는 구조화한다. 즉 그 둘 중에 하나는 우선적이고 기초가 되며 규범적이고 투명한 우리(We)이며, 다른 하나는 이차적이고 어두우며 불안정한 타자(Other)로 규정한다.
기원전 5세기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은 서양 철학의 주요 전통과 유대교의 묵시문학 과 이후의 교회 기독교의 신학적 전통에 실재론과 차별주의를 확고하게 심어주었다. 플라톤은 질료와 형상은 존재의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선언할만큼 무척이나 이원론적이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그의 이원론적 용어들, 곧 시간과 영원, 형상과 질료, 존재와 과정, 외관과 실제 등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전통에서 항상 신성한 것과 속된 것, 거룩한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거룩한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 내부인과 이방인, 은총과 징벌, 구원과 저주, 천국과 지옥 등의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믿음체계가 형성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의 영향으로 기독교인들은 영혼을 인간의 몸과 분리된 존재로 믿고, 이 세계와 분리된 죽음 후의 다른 세계를 믿는다.
17-18세기에 사회의 무지를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자는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학문뿐만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사회 운동과도 결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 발표되면서 과학 시대가 시작되었다. 1859년에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은 물론 종교와 철학과 교육과 사회의 새로운 기초가 되었고, 우주진화 세계관이 주류 사회의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플라톤으로부터 멀어졌으며, 플라톤이 주입해놓은 거대한 이원론적 반대구조를 초월하거나, 폐지 혹은 해체를 시도해왔다.
한편 여전히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회 기독교 신학은 생존의 두려움 가운데 이원론적인 차별행위에 의해 생겨났으며, 매우 차별화된 신성한 우주론에 기초한다. 교회 기독교가 중세시대에 전성기를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 내지는 삼층 세계관의 그런 형태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는 자연과학에 의해 계시된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과거에 믿음체계가 강압적으로 주입시키려고 했던 이분법적이고 부정적인 차별주의에 대항하여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형태의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오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인도주의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횡포를 부리는 이분법적 차별과 탄압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한다. 또한 단순히 꾸밈없는 공동 인간성에 근거해서, 인종, 피부색, 종교, 성, 성적본능, 교육정도, 부와 사회적 직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한다. 인도주의는 사람들을 분류하거나, 다양한 가치척도에 의해서 그들을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는다. 예수는 반차별주의자였다. 즉 기존 사회의 이원론적이고 차별적인 제도와 가치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철저하게 반대했다. 예수는 이원적 차별과 분리를 거부했다. 하느님과 사람, 거룩과 세속, 정결과 부정, 성인과 평범한 사람,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사이의 어떤 분열도 반대했으며, 빛과 어둠,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 사이의 구분도 없앴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은폐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개방되어 있고 명시적이었으며, 모든 개체들이 경계 넘어 우주적으로 통합하여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철저한 반차별은 성서의 핵심사상이다. 예언자들과 예수는 중보종교의 희생제도와 십일조와 지키지도 못할 수백개의 율법 조항들을 비판했다. 특히 예수는 그것들은 구원의 길이 아니며, 종교적 행복도 아니며, 단지 가치없는 표층적인 믿음만을 부추긴다고 도전했다. 중보교회는 일반 신도들을 평생 동안 하느님과 교회에 의존하도록 손과 발을 묶어 놓는다. 따라서 신자들은 교회의 구원 기계장치에 의해 정기적인 용서와 은총의 주사를 받아야 하는 약물중독자들과 같다.
성서의 예언자들과 예수는 중보종교의 내세적 세계관과 구원 기계장치의 종말을 선포했다. 그들은 종교체제가 만든 이분법적 기준에 따른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등의 차별과 분리를 철저히 반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인 없이, 인간이 자율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종교체제가 만든 전통과 신조와 교리에 대한 믿음 없는(beliefless)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세계를 추구했다. 그들은 폭력과 억압이 없으며, 모든 개체들이 우주적으로 통합되어 지구화되고, 인도주의적이고 상호투명하고 평등한 인간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신적인 것이 더 이상 대상화되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내재하는 세계를 추구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언자들과 예수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계 즉 모든 차별과 분리가 사라진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건설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교회 기독교를 해체하고 예수의 하느님 나라 신학을 살아내야 한다.
계몽주의 이래로 가속화된 세속문화는 초자연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하느님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했으며, 20세기에 이르러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교회신학에 회의를 느끼고, 차별과 분리 없는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추구했다. 역사적 예수는 중보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예수는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로서, 그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살았고 또한 죽었다. 불행하게도 예수가 죽은 후 하느님 나라는 의도적으로 지연되었고, 상업화되고 정치화된 교회는 미봉책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희망대로 이 땅 위에 온갖 차별과 분리를 폐기하고, 평등과 정의의 통합적인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보다 그대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별과 분리의 믿음체계를 구축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하느님과 인간,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차별과 분리를 엄격하게 유지했다.
오늘날 세속적인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분리를 믿음으로 정당화하는 교회는 허황된 미사여구로 내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구원을 약속하기만 할 뿐, 실제로 심층적이고 현세적인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다. 교회의 시대는 끝났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내세를 꿈꾸는 망상에 빠져 있는 교회 신학은 믿음/천국-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교리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분리하여 혼돈에 빠트리는 위험한 일을 중단해야 한다. 오늘 인류 사회에게 절실히 필요한 급진적 신학의 첫째 목표는 교회 신학을 하느님 나라 신학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해체하는 일이다. 급진적 신학은 교회의 시대를 뒤에 남겨둔 채 앞으로 나아가고,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그 좋은 예로서, 회중주의, 퀘이커주의, 아메리카,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 민주주의, 인도주의적 윤리학 등이 등장했다. 낡고 오래된 교회는 예수의 정신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인 하느님 나라 신학을 이 땅 위에서 살아내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교회 자체를 절대화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단순한 중보종교체제와 교리적 믿음체계를 일종의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교회는 세속적인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차별하고, 자신을 세상과 분리하여 그 자체를 흠이 없고 틀림이 없는 것으로 선언했으며, 사람들에게 순종과 충성을 강요했다. 교회는 그 자체보다 더 높고 더 좋은 것에 대한 무지함과 무식함 때문에, 더 이상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채색된 베일에 은폐된 무용지물이 되었다. 세상과 사람들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교회는 더 이상 참된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스스로 참된 교회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 밖의 세속문화는 이미 삼층 세계관에 기초한 낡은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떠나 보내고, 우주진화 세계관의 통합적이고 진보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면서 꾸준히 발전해왔다. 오늘날 과학의 시대에 눈과 귀와 마음이 개방된 진보적인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추방하는 운동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인도주의적 윤리관, 반성차별(페미니즘), 반인종차별, 반종교차별, 반성적본능차별, 기후변화의 환경보호, 공정한 분배의 정의을 살아내려는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교회 안에서 교회 밖의 정직한 세속적 도덕성을 찾아볼 수 없다. 특별한 예를 들자면, 동성애자들을 대하는 문제에서, 교회는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의 세속문화로부터 종교와 인간과 생명의 심층적인 의미를 배울 필요가 있다. 교회는 종교-인종-성-성적본능-빈부-계급 차별에 철저하게 반대했던 예수에게 솔직해야 한다. 온갖 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포스트모던 세속 문화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세속적 실현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