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사상과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사실상 교회는 그 자신이 예수의 원초적인 정신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그 자신들이 신앙의 황혼기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의 미래에 큰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은 실망감과 허탈감 속에서 교회를 떠났으며, 교회가 막다른 지경에 빠져들어 쇠퇴하게된 원인은 자신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18세기 중엽 이래로 기독교 개혁 운동은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일어났어야하는 운동들이 교회 밖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자면, 인종차별의 경계 넘어 완전한 인간해방, 성차별을 페지하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인권, 신중심(神中心)의 윤리를 떠나 인간중심의 인도주의적 윤리, 자유 민주주주의적 정치학, 기후변화에 대한 자연보호 등이 발전되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 즉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이 존중되기 위해, 인간의 참된 행복과 구원이 구체화되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살거나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이 교회 안보다는 교회 밖에 더 많다.
기독교인들은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온전히 살기 원한다면 교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삼층 세계관적이며 초자연적인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21세기 교육과 과학과 철학과 문화의 기초가 되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초자연적 힘 또는 질서라는 것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만이 있으며, 지금 여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세상이다. 죽음 전과 후에 이 세계와 분리된 다른 세계는 없다. 하느님 나라 신학은 예수가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동정녀에서 탄생하고, 물 위로 걸어가고, 물을 포도주로 변형시키고, 그의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서 하늘 위로 올라갔고, 세상이 멸망하고 다시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등의 초자연적인 기적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 신학의 하느님은 믿어야만하는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자율적인 깨달음이며 온전한 삶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인 없이 스스로 직접적인 형태의 삶의 방식과 은유적인 표현이다. 하느님은 자율적이고 내면적인 깨달음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드러나는 세속적인 세상의 현실이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깨달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에 대해 이러한 희망을 가르치고 그러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애써왔다. 역사적 예수가 희망했던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 새로운 세계를 실현하는 것은 세속적인 전통에서 훨씬 더 실현하기 쉽다. 오늘날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차별하고 분리하는 공격적이고 항상 분노에 가득한 종교적 보수 우파 집단들은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방해하고 가로막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느님 나라 형태의 삶을 살아내는 방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 삶의 방식은 지금 여기에서 긴급하고 현세적이고 세속적이다. 다시 말해, 이 삶은 죽은 후까지 기다리고 연기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교회는 사용하고 있는 부족적이고 차별적이고 내세적이고 이분법적인 낡은 언어를 폐지하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현세적인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언어는 의식과 인식의 표현이다. 인간의 언어가 우주세계 전체의 그림을 그리고 만들어낸다. 교회의 언어가 새롭게 되는 것은 삶의 방식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 형태의 삶에 대해 교인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교회 밖의 ‘세상적인‘ 것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해서 폄하하도록 강요하는 교회의 전통적 이원론적 사고와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삶은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이원론(교회와 국가, 하늘 위 천국과 하늘 아래 세상, 천국과 지옥, 종교와 과학)을 떠났다. 하느님 나라 종교는 수동적인 믿음체계와 온갖 간접적인 중개인들(하늘에서 내려온 예수, 십자가, 신조, 성직자, 성례전)이 필요없으며, 자율적이고 직접적이고 비이원론적이다.
기독교를 개혁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교회 방식의 사고와 생활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하느님 나라 방식의 사고와 생활을 스스로 개발하고 살아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비종교적인 인도주의 자선단체의 봉사자들처럼 소리없이 이름없이 겸손하게 사는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의 기초는 종교적 신조 또는 수동적으로 억지로라도 믿어야 하는 믿음 또는 보상심리의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인간의 존엄성을 공평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방식의 삶은 탁월한 사람들과 전문인들만이 할 수 있는 힘든 일이 아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오늘날 이 새로운 실천적인 삶은 말이 되지 않는 말을 억지로라도 믿으라고 강요하는 중보교회 안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말이 되는 말을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가능하다. 또한 하느님 나라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순간순간에서 영원함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적인 영웅이나 장황한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끌어모으려는 선동가는 필요없다. 마틴 루터는 한때 개신교에서 영웅적인 천재로 특별한 자랑거리였으나, 오늘날에는 한물간 낡은 인물이 되었다. 대신에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전체적으로 세속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인식하고 살아내는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필요하다. 중보교회는 자신의 전통과 권력을 보호하기 위하여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쇠퇴하는 길을 택했다. 참 사람 예수를 배반하고 가짜 예수를 만들어 숭상하는 교회는 자신을 포기하고, 개방적이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직접적인 하느님 나라 형태로 변형되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느님 나라 종교는 간접적인 중개인 없이 자율적으로 직접 깨닫고 살아내는 직접적 종교이다. 교회는 진정으로 교회가 되기 원한다면 이 직접적 종교를 살아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속화된 형태로 개혁되어야 하며 채색된 베일을 벗겨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채색된 베일 뒤에 숨었던 중보교회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중보(仲保, mediator,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한다는 상업적인 거짓말과 은폐로 부와 권력을 누려왔다. 교회는 정교한 상징적 중보장치들을 창작하고, 이것을 거룩한 전통으로 합리화하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통제하고 착취했다. 오늘날 교회는 채색된 베일 뒤에 숨겨진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중보하려는 것이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너무나 두렵다. 이 세계 안밖에 신적인 영의 세계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 바깥(외부)이란 없으며, 우리의 세계는 138억 년 전 우연히 자연적으로 등장했다.
교회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우상들을 던져버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사심없이 마치 태양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갈 때에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구원의 길이다. 또한 우주세계의 모든 것이 우연성이고 자연성임을 긍정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두려움과 욕심에서 자유해질 수 있는 길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차별적인 경계는 없다. 죽음 없이 삶이 있을 수 없고, 삶이 없이 죽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여기, 순간순간에 영원함이 있다. 예수는 현실에 대해 긍정적인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교리적인 믿음 없고(beliefless), 초자연적인 하느님 없는(godless),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하느님 나라 형태 종교를 통해서만이 참된 행복과 심층적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이 직접적 종교를 살아내는 것과 죽는 것은 가치가 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