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선포된 생명 | 이성환 | 2020-03-29

by 이성환 posted Mar 31, 2020 Views 218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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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선포된 생명 (겔 37:1-14, 롬 8:6-11, 요 11:1-45)

2020.03.29. 사순절 다섯째 주일

 

[학살의 현장에서 생명을 말하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전북 임실에 호국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군경들이나 국가유공자들이 묻혀 있는 현충원과 같은 곳인데 이 호국원 서쪽 묘지가 끝나는 곳에 가면 정자가 보입니다. 처연한 묘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인데 그 정자 뒤편에는 생뚱맞게도 ‘부흥광산’이라는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표지판 밑에는 광산으로 통하는 내리막 계단이 있는데 입구는 철창으로 막혀있습니다. 그 표지판에는 이런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부흥광산은 일제강점기 번성하던 대규모 금광이었고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동족 간 이념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4.3항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948년 2월 26일, 남로당 임실군당은 단선반대 운동에 동참함과 동시에 밤에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의 무장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빨치산의 시작인 것이죠. 그들은 한국전쟁 직후 한때 임실군을 장악했지만 인천상륙이 이루어진 이후 국군이 다시금 그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순창과 임실의 경계에 있는 회문산에 집결하게 됩니다. 회문산은 빨치산 초창기 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그들은 이후 벌어지는 토벌작전을 피해 지리산으로 향하게 되고 중간 집결지로 폐광인 부흥광산을 택하게 됩니다. 이 첩보를 접한 군경들은 이 폐광을 습격했지만 출입구만 서른 개가 넘고 안에 갱도는 개미굴처럼 연결이 되어있어 오히려 역습을 당했고 그 와중에 빨치산들은 반대편 출구로 빠져나가 지리산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토벌대들은 좌익세력에 가담한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고 주민들은 다시금 그 폐광으로 숨어들기 시작했습니다. 4.3 때와 마찬가지로 식량을 구하러 나온 주민이 군경에 발각되면서 학살이 벌어지게 됩니다. 1951년 3월 14일 오전 6시 30분, 폐광에 있는 주민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탈출을 막기 위해 네 개의 출입구만 빼고 모두 봉쇄하고 입구에 솔가지와 고춧대를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사흘간 계속된 토벌로 폐광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질식사했습니다. 가장 먼저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죽었고 참다못해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이들이 257명이었습니다. 사흘 후 연기가 가라앉자 군경은 굴 안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을 끌어내 조사를 통해 몇 명만 살려두었고 나머지는 회문산 기슭에서 총살했는데 그 수가 79명이었습니다. 

 

폐광의 시신들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군경들이 지역주민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지만 두려운 나머지 시신을 수습해간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전쟁이 끝난 1958년 금광이 문을 다시 열면서 광산 인부들이 유골을 수습했고 폐광 입구 산기슭에 매장했고 합니다. 수백의 유골이 합장된 것이죠. 

 

저는 오늘 제1성서 본문인 에스겔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묵상하면서 이 사건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전북 임실에 있을 당시 저는 우연히 폐금광 학살 사건을 접하게 됐고 여러 자료를 살펴보며 현장 답사를 통해 장소를 특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함께 활동하는 목사님들과 함께 폐광 앞에서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간단한 기도회를 한 바 있습니다. 

 

오늘 에스겔서 본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9절입니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렇습니다. 에스겔이 목격한 마른 뼈들이 쌓여있는 곳은 학살터입니다. 살해당한 이들의 유골, 그 누구도 수습하지 않아 뼈들은 뒤섞이고 세월은 지나 말라버렸습니다. 회생은커녕 유골을 수습해 장례도 치르지 못한 고통과 공포, 한이 서려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에스겔서 37장 3절입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 날 수 있겠느냐?”

 

사순절 마지막 주, 그리고 총회에서 정한 제주4.3 기념주일인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한국전쟁 전후 이 땅에서 일어난 학살을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죽음의 자리, 죽임의 자리에서 생명을 말할 수 있는가? 기사회생이 불가능한 자리, 절망의 자리, 더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를 선언할 수 있는가?’

 

한홍구 교수는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의 밑바닥을 사진 한 장으로 표현합니다. 녹슨 철모에 난 구멍 사이로 핀 꽃의 사진인데요. 이것은 무얼 의미합니까? 역사의 밑바닥이죠. 죽음의 자리, 학살의 자리, 더 이상 희망과 회생을 생각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학살과 고통, 한 맺힌 그 절망의 자리에서 생명과 다시 삶을 말하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에스겔이 목격한 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사건은 이 땅 한반도의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른 뼈들에 생기가 돌아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여 마침내 엄청난 수의 군대가 되는 사건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유대 백성들의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전쟁부터 지금까지 평등을 이야기하고 혁명을 꿈꿨던 집단과 그에 동조했던 수십, 수백만의 생명이 죽임을 당해왔습니다. 마른 뼈들밖에 남지 않은 그 학살의 장소에서, 그 짐승의 시간에서부터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비춰보아 에스겔의 환상은 그저 환상이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이 일구어온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역사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과 평화, 정의의 길로 가는 노정 그 어름이겠지요. 그 길에 서 있는 우리는 하나님이 묻는 물음, “사람아, 이 학살로 점철된 이 역사가 살아날 수 있겠느냐”는 이 질문에 “예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죽음으로 가득한 이 땅에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주시면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덤에서 생명을 말하다, 요한복음 나사로 이야기]

 

오늘 복음서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복음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세월이 존재합니다. 뒤늦게 요한복음이 쓰여진 이유는 영지주의와 묵시문학 등의 이단사설로부터 예수의 복음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신약학자 바레트는 영지주의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신비와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고 묵시문학주의자들은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의 황금시대로 도피한다고 비판합니다. 둘 다 역사로부터 도피해 각각 영적 세계로, 또 다가올 미래에만 빠져있다는 것이죠. 요한복음은 이 둘을 거부하고 역사와 해석 사이의 역동성을 지키기 위해 서술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이 증언하는 사건이나 비유를 자유자재로 뒤섞어 놓습니다. 단 하나의 진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마지막 만찬을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 녹여내기도 하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의 자리를 세족식으로 바꿔놓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인 나사로의 부활사건도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로 진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부자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거지 나사로가 보입니다.

 

생전의 형편이 천국과 지옥으로 뒤집힌 상황을 한탄하면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얘기합니다. “조상님, 나사로를 시켜서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경고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죠. 누가복음 16장 29절, 31절입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방금 읽은 누가복음과 암시적으로 병행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2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그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은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불신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나사로의 부활사건에서 예수는 불신에 찬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고’, 즉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나사로의 부활사건으로 인해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에 빠지게 됩니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성전 정화사건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생명을 살리고 죽음의 길로 드는 역설적인 십자가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나사로이야기는 이미 부패가 시작된, 회생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자리에서, 무덤에서 생명을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택하라, 로마서]

 

에스겔의 마른 뼈,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다시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합니다. 에스겔서는 마른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살갗이 덮이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다시 살아나는 그 마지막 공정에 하나님의 숨결, 루아흐(ר֖וּחַ) 라고 하는 생기를 배치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는 과정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과거 창세 때 내린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다시금 죽은 이스라엘에 내려 그들을 일으키고 죽음과 절망으로 덮인 이 세상을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마른 뼈와 나사로의 부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죽음과 절망으로 상징되는 무덤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생명과 평화라고 로마서는 말합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는 육신과 생명을 대비해 놓습니다. 육에 속한 것은 죽음이고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이고 결국 그러한 육신은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반면 영에 속한 삶은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따르는 정의로 인해 삶을 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 생명이란 영생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시간과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육체의 소생이나 사후에 우주 어느 시공간으로 존재를 옮겨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회문산 폐광 산기슭에 버려진 마른 뼈들에 생기가 돌아 이 땅의 역사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정의와 평화의 기운이 가득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의 역사로 일구어 갈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든 가운데 있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봄은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완연한 이 봄날,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일궈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비록 절망 가운데 있지만, 이 땅에서 생명을 선언하고 생명을 일궈가는 사순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파송사]

 

비록 우리의 삶이 비루하고 낙심되더라도 

우리의 삶과 이 땅의 역사에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깃들기를

간절히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