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사 50:4-9a, 빌 2:5-11, 마 21:1-11)
2020.04.05. 종려주일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교회에서 만나지 못한 지도 한 달이 넘었습니다. 모두 잘 지내시는지요? 2월 말에 회중 예배 중단을 결정할 때만 하더라도 조만간 다시 모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제는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틀 전 지난 금요일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가 세계적으로는 백만 명을 넘었고, 국내에서는 일만 명이 넘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폭발적인 증가추세가 이어지면서 그 끝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국내에서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더 필요하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이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통은 가깝지만, 희망은 멀어 보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몰고 올 앞으로의 변화가 얼마나 낯선 모습일는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우리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예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 너머에는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암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 사태는 삶을 파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생활양식에 대해서 근본적인 성찰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일이 현실의 고통이 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두 달 전만 해도, 조금만 버티면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희망고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어쩌면 초대 기독교인들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들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자꾸만 미뤄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신중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주님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옅어져만 가는 믿음을 감내했고, 또 어떤 대담한 사람들은 바로 지금 예수가 와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이미 재림했다고 생각한 사람이든,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자신들의 생각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절충점을 만들었습니다. 구원의 시간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 신학적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의 재림,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coming)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복음서에 묘사된 종려주일의 장면을 생각해 보죠.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예수 옆에는 수많은 사람이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사람들, 그들은 미래의 주인공이 되리라 기대했을까요? 예수님은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는 젤롯당처럼 예루살렘의 식민체제를 일시에 전복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의 꿈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길은 당시에는 실패한 혁명가로 비칠 수밖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더욱 근원적인 변혁을 지속해서 밀고 갈 수 있는 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종려주일의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쓰신다 / 마태복음 21장 1-11절]
종려주일에 읽는 성서 본문에서 우리는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군중들과 예수와의 관계에서 생겨납니다. 군중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를 두고 환호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할수록 멀어집니다. 종려주일에 생각해 볼 첫 번째 주제는 이 ‘환호와 배신’ 사이에 있는 간격입니다.
마태복음은 비슷한 장면을 이미 앞에서 보여주었습니다. 16장을 보면, 예수와 제자들의 문답이 나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하는 스승의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을 잘해서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부터’(from that time on)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한 사실이 있었다고 마태복음은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베드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대응했고, 이 베드로를 향해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외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 16:22).
베드로와 예수 사이에서 일어난 긴장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됩니다. 8절을 보면, ‘큰 무리’(ochlos)가 나와서 예수의 일행을 맞았습니다. 가난한 민중들로 알려진 이 ‘오클로스’는 예수를 항상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사역이 시작될 때부터 동행했고 (마 4:25), 산상수훈의 청취자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7:28), 예수의 치유 사역을 목격하거나 경험했습니다. (12:15, 14:14, 15:30, 19:2) 그들은 무지와 몽매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통해서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환호하다가 나중에는 돌아섭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기대가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이 결코 고난 속으로 잠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중들이 기대했던 것과 예수께서 걸어간 길 사이의 간격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마태는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그 예언은 메시아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은 전쟁에 동원된 군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마태는 이 예언을 통해서 군중들의 환호 이면에 있는 예수의 진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길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환호받는 예수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구절은 3절에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를 끌고 올 때 누가 묻거든 일러주라고 한 말씀은 “주님께서 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귀 주인에게 전해야 할 말이었지만, 이 말에는 예수의 정신이 담겨 있고, 그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좌우명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적 인생관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쓰시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쓰신다’는 말은, 자기 존재를 빼앗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자신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피동성의 표현이 아니라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쓰신다는 고백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과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을 때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비롯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부정적인 삶으로 인해 생겨납니다. 이 두 가지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동전의 다른 모습입니다. 둘 다 하나님을 잃은 종교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개인적 만족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종교를 불문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이 우선합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삶이 잘못된 욕망에 지배되는 데 있습니다. 그 욕망은 집착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기중심적인 삶의 문제는 ‘하나님은 죽고 자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마저도 죽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자기를 부정하는 삶으로 대체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다고 해도 삶이 저절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신천지 포교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종교 교리로 자기를 죽인다 해서 믿음이 서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종교는 삶을 분별하고 자신을 올바로 세우는 데 관심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정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주님이 쓰시도록 자기를 바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쓰시려면,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참된 나’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쓰신다’는 예수의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하늘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바쳤습니다. 그것이 종려주일의 가르침이요, ‘환호에서 배신’으로 변해가는 시기를 견뎌내는 예수의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귀가 열릴 때 / 이사야서 50장 4-9a절]
예수의 시대 못지않은 불안한 시절을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제2이사야’라는 별명을 가진 이름 없는 예언자입니다. 그가 살던 때는 바벨론 포로기였고, 예언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사람들에게 ‘포로 생활로부터 회복’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어떻게 포로 생활을 견디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을까요?
제2이사야가 들려준 예언의 특징은 네 번에 걸쳐서 나오는 「종의 노래」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사 42:1-9, 49:1-7, 50:4-11, 52:13-53:12) 그것은 포로기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 자신의 경험이자,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무엇보다 포로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포로기를 살아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한 곳이 ‘종이 되는 삶’이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 50장은 세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매기고 받는’ 형식으로, 세 번에 걸쳐서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한 다음에 (4a, 5a, 7a, 9a절), 이어서 종의 믿음과 행동을 서술합니다. (4b, 5b-6, 7b-8절)
포로기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는 훈련된 입(learned tongue, 4절)입니다. 다음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된 귀(ready ear, 5절)요,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마음(prepared heart for learning, 6-7절)입니다. 이사야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면서, 위기의 시대를 이끌어갈 하나님의 종이 탄생한다고 봤습니다.
고통의 시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은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입이 열려있고, 귀가 열려있고,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시대를 향해서 열려있고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 시대를 위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져냅니다.
제2이사야는 「종의 노래」를 통해서 포로기의 사람들을 죽음의 늪에서 건져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에 흐르는 위대한 전통을 봅니다. 그것은 낮은 곳, 약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해방 정신입니다. 성서의 정신은 지배의 정신이 아니라 구원의 정신입니다.
[케노시스, 자기 비움 / 빌립보서 2장 5-11절]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물음 가운데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질문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것은 왜 그가 죽임을 당했느냐는 것보다는 왜 우리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졌고,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신학적 해명을 제시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롬 5:10-11, 11:15, 고후 5:18-20, 엡 2:16, 골 1:2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대표적인 고백이 오늘 빌립보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특징을 ‘자기 비움’(self-emptying)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사색의 결과는 아니라고 봅니다. 바울은 두 차례 유럽 선교 여행을 통해서, 마케도니아 지역의 빌립보(Philippi)에 신앙공동체를 세웠습니다. (행 16:13, 20:1-6)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적 이해, ‘종이 되기까지 자기를 비운’ 예수에 관한 서술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 묘사된 그 공동체의 상황은 ‘시기와 다툼’(1:15), ‘허영과 경쟁’(2:3)에 싸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공동체를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오늘 본문 5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바울이 갈등의 공동체에 전해준 소식은 ‘자신을 비우고 하늘에 순종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거룩한 길을 연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간의 길’과 ‘신의 길’이 대비됩니다. 바울은 이 두 길이 서로 만날 수 없는 반대되는 길이 아니라, 아주 역설적으로 일치되는 길로 봤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메시아적 특징을 어디에서 찾았느냐 하면, 종의 모습(μορφή, form)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낸 것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그가 이해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죽기까지 낮춤으로써, 이 세상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설명에서 기독교적 구상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낮은 곳에 내는 길이 거룩한 길이라는 이해입니다.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가진 종교적 사명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예수의 종교는 기적의 종교도 아니요, 지혜의 종교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고전 1:22-23) 그것은 고통과 위기의 시대일수록 낮은 곳에서 진리를 찾는 종교를 의미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계가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바이러스가 몰고 온 위기만은 아닙니다. 지구에서 생명의 발걸음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바이러스가 새삼스럽게 문제를 일으켰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위기는 인류가 구축해 온 생활양식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새로운 문명을 향한 진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습니다.
바이러스의 감염경로를 추적하고, 예방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오래된 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삶을 구성하는 거대한 연결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이의 삶과 엮여서 서로서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너의 질병이 너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만물의 연관 관계를 보면서 상호 책임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이 적자생존의 문명에 순응하도록 만든 힘의 복음을 내려놓도록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위기는 믿음을 낳고, 믿음에서 인간이 태어납니다. 부족한 산소 호흡기로 고민하는 사회에 자기 호흡기를 먼저 거절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자기 공간을 먼저 내어주면서 수십 년 누적된 지역감정을 털어내는 시민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위기 속에서 다음 문명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놓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대의 삶은 ‘문명과 안전을 혼동’했습니다. 그래서 문명을 누리는 삶이란 자신의 안전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담긴 비관(pessimism)입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새로운 믿음이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바울의 권고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온전한 열림입니다. 이 마음은 자기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신을 되찾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떠받치는 거대한 생명 세계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일 수 없는 아쉬운 고난주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교우들에게, 또 고통당하는 우리 시대에 충만히 내려서, 위기의 시대를 생명의 시대로 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침묵합니다.
[파송사]
‘주님이 쓰신다’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전합니다. 온 세상이 앓고 있는 이 고난의 시대에, 우리 모두 낮은 곳에서 새날을 여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따라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