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감염자 숫자가 가장 높은 미국에서, “하느님 믿으면 바이러스 면역성이 생긴다”고 주장했던 복음주의 목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그는 과학을 부인하고, 의사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하느님은 바이러스와 온갖 불치병을 막지 못한다.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하느님은 과거에 존재한 적이 없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선량한 사람들을 통제하고 탄압하고 착취했던 거짓과 은폐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오늘도 여전히 그런 하느님은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장사꾼들과 정치꾼들의 속임수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구원과 축복은 죽음 저 너머에서 시작될 뿐이라는 중보교회의 거짓된 가르침에 세뇌되어 참된 삶을 위한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이 독살되도록 방치하고 있다. 따라서 지구적인 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기에서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힌 교회는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에 빠져 위험을 무릅쓰고 예배집회를 고집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성서근본주의 교회들의 망상에 빠진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체계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으며,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오늘 19세기의 사상가 니체가 당시에 매섭게 교회 기독교를 고발한 말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니체의 고발은 자신의 저서 <적 그리스도>(The Anti-Christ)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나는 기독교를 저주한다. 나는 검사가 말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혐의를 죄목으로 해서 기독교 교회를 고발한다. 나에게 교회란 생각이 미칠 수 있는 최고로 타락한 집단이다. . .교회는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한 곳도 없다. 모든 가치를 부정적으로 하였고, 모든 진리를 거짓으로 했다. . .나는 교회 기독교를 하나의 거대한 저주라 부른다. . .기독교는 인류의 한 불멸의 오점이다.” 사회적으로 신뢰를 잃고 고립되어 쇠퇴하고 있는 교회 기독교는 이제 니체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
특히 중보교회는 철학자 니체를 (부정적인) 허무주의자 또는 염세주의자로 치부하고, 그를 적그리스도의 선봉장으로 정죄하는 무식함과 무지함을 중단해야 한다. 오늘날 니체의 서적들은 대학과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들 중에 하나이며, 니체의 사상은 전통적인 교회 기독교에 식상하고 회의를 느끼고 있는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니체의 서적들 전체를 신중하게 읽으면 그의 사상의 핵심은 부정적인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가 아닌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학창 시절에 전통적인 교회 기독교의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신앙에서 떠났다. 그는 교회의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은 현세적인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했으며, 이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인식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의 심층적인 사상은 그의 책들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예수에게 솔직한 참된 기독교인이었다.
전통적인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쇠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세속화’라고 폄하하고, 과학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과학이 모든 삶의 영역들의 기초가 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라는 우물 안에 감금되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시선을 외부 세상으로 돌려 자연계과 지구촌과 우주세계에 대한 관심 즉 세속화에 기울이게 되었다. 니체는 이것을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했으며, 현대화로서의 변화과정에 가치의 전이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전이는 과거의 변화보다 훨씬 철저한 것으로서, 단순히 오랫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가치들을 이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새로운 가치들로 대체된 것뿐만 아니라, 이 가치의 전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가치의 창조자이며, 어떤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도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저편>(Beyond Good and Evil)에서 이러한 가치의 전이를 모든 가치들의 ‘재가치화’라고 불렀다.
니체가 말하는 “모든 가치들의 재가치화”는 이 세계 이외의 저 너머 다른 세계의 와해 즉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영원한 도덕적 절대성이란 없다는 인식이다. 새로운 시대는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에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종교가 규정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을 재평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교회 기독교가 만든 영원한 가치들은 니체가 말하는 노예 도덕(slave morality)을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니체는 과거의 종교와 도덕성의 밑바닥에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는 강압적인 명령과 수동적인 맹종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승인에 억지로 의존하도록 만들고, 중보 교회의 권위에 절대순종하고 의존하도록 만들어 도덕적인 성숙을 가로막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질식시키고 인간 정신의 자유를 분쇄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연약하고 굴종적인 의존, 자기 확신의 결여, 정신적인 고통을 가지고 살도록 했다. 노예 도덕은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에 기초하여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것을 막으며,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생물종이기 때문에 창조적이기 위해서 그 시대의 통용된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니체는 모든 가치들의 재가치화를 통해 노예 도덕을 거부하고 주인 도덕(the master morality)을 살아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주인 도덕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도덕관이 아니다. 주인 도덕은 자율적으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도덕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치의 결정권자로 생각하며,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교회의 권위의 승인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이 가치들을 창출하고, 다른 사람의 자율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제도적 종교의 믿음체계가 만든 가치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맹신하고 굴종하는 노예가 되는 대신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인간적 조건이 갖는 도덕적 요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니체가 기존의 가치들을 새롭게 재가치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도덕이 필요없다거나 고삐 풀린 방탕한 삶을 주장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풀어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적 인간보다 더 심층적인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초인(超人 superman)에 대해 말했다. 즉 초인은 “약함 때문이 아니고 자유롭게 된 정신으로 인한 강함 때문에 관용하게 된 사람”이다.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Walter Kaufmann)
니체는 인간이 내면에 믿을 수 없을만큼 비인간적인 흉포함을 잠재성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인간의 삶은 절망적인 재앙으로 끝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의 깊은 계곡 위에 단단히 매어 있는 줄 위를 걸어가는 사람과 같다.”고 자신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에서 밝혔다. 다시 말해 줄 위에서 인간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동물적인 본성을 넘어 초인의 잠재성을 성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초인의 성취를 거부하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경멸하고 이 세계를 더럽고 따분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이 죽음 후의 다른 세계에서의 삶에 희망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에 독을 집어 넣는 이유는 다른 세계를 위해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분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초인이 되어야 한다. 초인은 지금 여기(Here and Now) 이 땅의 현세적인 의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하루하루 평범한 삶 속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진실되게 살아야 하며, 이 세계를 떠나는 초현세적인 망상을 버려야 한다. 오늘도 이 망상에 젖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인류사회를 분단과 혼돈과 전쟁과 테러 속에 빠트리고 있다.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선포하는 노예 도덕(slave morality)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의 삶을 부정하고,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여, 다른 세계에서 궁극적인 완성을 찾게 한다. 반면에, 주인 도덕을 살아내는 초인은 역사적인 인간 실존과 인간의 삶을 향해 예라고 말하는 삶의 긍정자이다. 삶 속에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모든 의미는 현재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이 중보교회의 형이상학적 내세주의에 정반대되는 니체의 실존주의적 입장이다. 매 순간인 현재는 무한한 의미를 지닌다. 현재는 영원의 속성을 갖는다. 니체는 영원한 순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저너머의 세계와 미래는 없는 것이기에, 단지 무한하게 순환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현재의 순간은 영원을 중개하고 영원에 참여한다.
교회가 고대의 삼층 세계관에서 상상했던 개인의 영혼불멸성 교리는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각으로 보아서 비상식적이고 낡은 교리이다. 과학이 밝히는 공개적 계시(Public Revelation)에 따르면 138억 년 전 우주는 우연히 자연적으로 등장했으며, 빅뱅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팽창할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 따르면 죽음이란 마지막 말이 아니다. 별들이 폭발해서 사라지는 것은 또다른 별의 탄생의 모태가 되고, 지구의 생명체들이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시작이라는 공개적 계시는 오늘 종교와 철학과 교육과 문화의 기초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최종적이다. 즉 유일회적이다. 우주세계에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로 분리된 두 개의 세계가 없다. 우리의 우주는 지금 여기 하나의 생명의 망으로 한 몸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따로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라, 경계 넘어 통합된 전체이다. 이것이 니체가 밝힌 영원한 순환이다. 영원한 순환의 진리는 도덕을 향한 동기를 제공했다. 즉 우리가 어떤 내용의 삶을 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매 순간은 영원한 성질을 가진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밝히는 초인(超人) 사상은 낡고 추악한 하느님 믿음에 대한 그의 대안이었다. “한 때 너희는 저 먼 바다를 응시하면서 하느님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초인을 말하라고 너희에게 가르쳤다. 하느님은 하나의 가설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가설 작업이 너희의 창조하는 의지를 넘어서지 않기를 원한다. 너희가 신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모든 신들에 대해서 잠잠하라. 그러나 분명히 너희는 초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곧 이것이 너희의 가장 훌륭한 창조가 되게 하라. . . 그리고 너희 스스로는 너희가 이제껏 세계라 불렀던 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 세계는 너희의 형상으로, 너희의 이성과 의지와 사랑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하면 너희 깨달은 자들은 이것이 너희의 참된 행복이 될 것이다.”
니체의 초인 사상 속에는 초월의 개념이 있다. 초인은 현재의 조건에서 인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초인은 인간의 조건 속에 있는 잠재적 현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인간 안에 내재한다. (절대적) 종말과 (절대적) 목적을 거부하는 니체는 초월과 내재는 균형을 이룬다고 인식했다. 니체는 “인간 안에 위대한 것은 (동물과 초인 사이의)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다. 또한 인간 안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줄을 타고 건너는 자이면서, 자기를 희생하고, 줄 아래로 떨어지는 자”라고 하였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에게는 강렬한 희망이 있었다. 그는 모든 가치들의 재가치화의 희망을 기대했고, 초인의 도래를 대망했다. 만일 인간이 초인의 출현을 허락할 만큼 저들의 도덕에 질서가 잡힌다면, 신의 죽음은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니체를 허무주의자라고 부르지만, 니체 자신은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교회 안밖에서 교회에 대한 회의와 허무가 확산되고 있으며 소요와 대 혼돈의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오늘 니체의 예언과 도전이 현실화되고 있다.
니체의 말들은 21세기에 인류의 의식이 성숙해지는 “새로운 시대”에 기독교인의 실제 모습과 실제 조건을 솔직하게 보도록 도전하고 있는 거울이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저 너머에 있는 하느님에게 호소할 수 없으며,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악용하는 교회에게 호소할 수도 없다. 기독교인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이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정직하게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연결된 팽팽하게 맨 줄 위를 걷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파멸시킬 수 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 지구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새로운 종류의 참된 인간을 향한 자율성과 잠재성과 가능성과 창조성 즉 초인을 향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니체가 자신의 저서들을 쓸 때보다 오늘날 더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인류의 밝은 미래와 참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질문이 되었다. 하느님이라는 개념으로 투사했던 여러 가치들과 대의들은 아직도 이 지구상에서 인류 자신에 의해서 실현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이것이 초인의 가르침을 통해 니체가 희망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최종 목표는 지금 여기 현세에서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