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62]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by 최성철 posted Apr 12, 2020 Views 174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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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세기 전,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영토확장을 위해 식민지 쟁탈전을 벌렸다. 이때에 전략적으로 성서근본주의의 선교사들을 가장 먼저 파견하여 믿음체계를 세우고 이어서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정복했다. 성서근본주의의 노예들이었던 기독교 국가들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을 정당화했고 특히 노예제도를 합리화했다. 이들은 비기독교 민족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면서 소위 이방인들의 고유 문화와 정신을 말살했다. 가장 불행한 일은 당시에 성서문자주의성서직역주의를 최선의 신학과 신앙으로 맹신했던 기독교 강대국들은 삼층 세계관의 내세지향적이고 이분법적인 구원론을 전세계에 퍼트리면서 타민족들을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의 비인간화의 수렁 속에 빠트렸다. 한국인들은 지구촌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일상생활화되면서 인류사회의 의식수준은 제국적교회 기독교과거의 패러다임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내는 현대인들은 성서를 더 이상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그대신 인간의 본성과 생명과 죽음과 우주세계와 하느님에 대해 과학에 기초하여 이성적이고 솔직하게 인식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현대과학과 인류학과 세계사를 이해하는 현대인들은 고대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도록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성서는 고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학형식과 표현방식에 따라 은유적으로 즉 시적이고 신화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책, 과학책, 교리집, 자서전, 백과사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 부활 이야기는 죽음 후의 내세론 또는 윤회론 따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 부활의 이야기는 기독교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만큼 기독교가 탄생한 기본 정신이었으며, 원초적인 예수 부활의 의미는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고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난 기적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부활이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 되고,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에 생기와 힘을 주는 이유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속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은 새로운 용기와 희망,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됨의 사건이다. 따라서 성서가 밝히는 예수 부활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이야기란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비겁함이 용감함으로, 편견이 포용으로, 이기심이 자비로, 불의가 정의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과거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새로운 힘과 비전의 시작이다. 예수 부활은 저 하늘 위에 인간과 분리된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지금 여기의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으로, 미래형의 내세적인 하느님이 현재형의 현세적인 하느님으로, 교회에 다니고 순종하는 사람들만 축복하는 부족적인 하느님이 자율적으로 깨닫고 경계 넘어 살아내는 우주적인 하느님으로 전환된 경이로운 체험이 부활의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 부활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 새로운 신앙, 새로운 인간이 시작된 새로운 이야기이다. 이제 현대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린 원초적인 새로운 이야기를 되찾아 수동적으로 억지로 믿는 신자를 떠나 보내고, 자율적으로 깨닫는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1세기에 선포된 부활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신앙과 삶에 필수적이다. 부활의 의미는 잠시 목숨이 끊겼다가 다시 소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생존의 두려움과 편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과거의 패러다임이 끝나고, 조건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사심없이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사건이다. 

 

2천 년 전, 인간 예수는 죽었다. 예수의 죽은 몸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며, 하늘 위로 올라간 일도 없었다. 성서는 예수의 몸이 다시 살아난 기적을 문자적으로 증명하는 책이 아니다. 성서가 밝히는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의 신앙과 삶 속에 역사적 예수의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선포이다. 다시 말해 예수 부활의 고백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열매라고 선언한 것이다. 예수의 정신은 이분법적인 구원론이나 부족적인 구속론이 아니다. 예수의 정신은 믿음체계가 만든 보상심리의 상업적이고 차별적이고 이기적인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의 정신은 삼층 세계관의 내세지향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거부하고,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세적인 삶을 살아낸다.

 

기독교인의 예수 부활은 믿어야하는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방식이고 표현이다. 다시 말해 부활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예수의 신성과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죽었다는 교리를 믿고, 예수가 재림하여 기독교인들은 천당으로 올려보내고 비기독교인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항상 새롭게 생기가 넘치게 사는 것이다. 부활은 죽은 후에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더 잘 살아보겠다는 허황된 꿈이 아니다. 부활은 오늘의 삶이 영원함의 연속이고, 영원함은 순간순간에 있다는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다. 부활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기 보다 스스로 100% 책임지고 만족스럽게 살면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부활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오늘의 삶의 길잡이다. 부활이 오늘의 삶을 인도할 수 있는 길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탄압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모든 인류가 보다 풍요롭고 화평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지구촌의 극심한 빈곤, 민족들과 종교들 사이의 유혈전쟁, 생태계의 파괴를 막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돌보며 살아가기 위하여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들이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하찮게 여기는 구조적인 불의를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부활은 내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생명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긍정적인 변화를 꿈꾸고 계획할 때에, 그리고 나의 마음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해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스럽고 영원히 거룩한 존재임을 확신하게 될 때에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 부활이었으며 오늘 기독교의 심장이다.  

 

종교는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깨닫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다. 종교는 부엌에서 정원에서 자연에서 장터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진리, 궁극적인 진리, 즉 하나님의 의미를 내면으로 깨달아 알고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종교는 타율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율적인 깨달음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시간과 자신을 위한 시간과 다른 생명들을 위한 시간을 분리하지 않는다. 종교는 나의 몸을 위한 시간, 나의 마음을 위한 시간, 나의 영혼을 위한 시간을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 종교는 숨쉬고 살아있는 순간들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聖俗)을 분리하지 않는다. 종교는 평범함 속에서 신비스러움과 비범함을 느끼는 것이다. 종교는 절망과 슬픔과 실패 속에서 희망과 기쁨과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참고: <예언자>(the Prophet), 칼린 지브란(Kahlil Gibran)) 예수 부활우주적인 종교의 의미를 인식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기독교인의 부활 작은 풀잎이 아스팔트 길의 작은 틈사이로 뻣어나오고, 나비가 무덤같은 껍질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 여러 동안 죽어있던 씨앗이 새싹으로 돋아나고, 갈색의 둥근 뿌리가 속에서 솟아나와 찬란한 색깔로 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 폭풍이 몰아치는 암흑의 밤이 지나가고 밝은 아침해가 떠오르고, 비가 하늘이 개이면서 무지개가 신비스럽게 떠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 어느 환자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건강해지고, 솔나무들이 죽음의 불길을 맞이한 후에 씨앗을 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 덩어리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고, 메마른 광야에서 봄철에 돋아나는 새싹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 끊임없이 닥아오고 있다. 이렇게 경이로운 일들이 어디에 있는가? 부활 새로운 이야기 보다 좋은 이미지나 비유나 은유로 설명할 있겠는가? 어떠한 언어나 상상력으로도 부활 위대함과 신비함을 적절하게 표현할 없다.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기쁨,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부활이다. 부활은 오늘 과거의 패러다임이 끝이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