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인 (행 2:14a, 22-32, 벧전 1:3-9, 요 20:19-31)
2020.04.19. 부활절 둘째 주일, 4·19혁명 기념 주일
올해에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연초에 선교부에서는 ‘역사와 해석 2020’이라는 주제로, 올해에 맞을 4·19 혁명 60주년, 5·18 광주 민주항쟁 40주기,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한국전쟁 70주기, 전태일 열사 50주기 등의 사건을 신앙인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구상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지만, 변화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진행합니다. 하늘뜻펴기에 참여해 주실 분은 박영숙 권사님과 김가흔 집사님입니다. 날짜가 임박해 부탁드렸음에도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박영숙 권사님이 4·19 세대로서의 경험을 들려주신 다음, 이어서 김가흔 집사님이 4·19 혁명이 주는 오늘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간단한 성서 묵상을 하겠습니다.
[벚꽃과 ‘4·19혁명’ 기념일 앞에, 박영숙 권사]
나는 올봄의 ‘벚꽃의 '화려함'이 '을씨년스러움'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일 것 같습니다. ‘4.19혁명’ 그 벚꽃의 화려함은 나의 역사 의식로 중요하게 구축되었고 반대로 벚꽃의 ‘을씨년스러움’은 데모대의 ‘희생성’으로 나의 감성 세계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그 날 숙명여대 문리대 사학과의 수학여행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그 시대, ‘창경궁’은 서울시민이 즐겨 찾는 봄나들이 장소였습니다. 그날은 ‘벚꽃’이 절정을 이루어 아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숙명여대 문과대 사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나는 고학년이 아닌 저학년의 봄 수학여행지로 가까운 ‘창경궁’이 선택되어 있었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습니다.
봄은 여성들에게 흥분의 계절이라 생각됩니다. 더구나 벚꽃의 절정기라면 밤 벚꽃 축제까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에, 여대생들이 창경궁을 찾다니 흥분은 당연했습니다. 그 환상적 벚꽃의 절정기, 여대생들이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왁자지껄 야단들이었습니다. “와 아아… 야 아아!!”하며 경탄하는 소리가 경악 같았습니다. 아니 경악이 환호성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춘객들이 그 여대생들을 바라보며 빙그레했습니다. 벚꽃을 핑계한 흥분, 그 ‘화려함’의 축제, 바라보는 눈빛들도 같이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내 기분 상태가 그랬습니다.
그 날, 내 가방에는 김밥, 삶은 계란, 그리고 오징어, 사과, 사이다 등 가득했습니다. 그 당시 창경궁을 ‘창경원’이라 불렀고 창경원 안에는 동물원도 함께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서울시민의 봄나들이 코스로 으뜸으로 생각되었고, 부모님 손 잡고 찾아온 아가들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화려했던 날이었습니다. 그곳, 벚나무들이 줄지어 활짝 펴있으면, 대낮인데 가로등 불 켜진 듯 지나치게 밝던 그 꽃길은 화려함으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꽃바람이 불어 심술을 부렸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그 화려한 벗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땅바닥이 하얀 카펫이 되며 비까지 내리니 ‘을씨년스러운’ 경관으로 바뀌며 쌀쌀 해졌습니다. 교수님의 호루라기가 우리를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신속히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며 우리를 흩으시고 재촉까지 하셨습니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1시쯤이었을까? 손에 든 가방은 무거운 채였습니다.
허겁지겁 창경궁 정문 방향이 아닌 그 반대쪽으로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뒤따랐다. 영문도 모르는 채 웅성거리는 사람들 따라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중앙고등학교 돌담을 넘는 사람들 따라 나도 같이 넘고 있었습니다. 광화문 쪽으로부터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점점 더 웅성거리며 말소리들이 거칠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구인가 알려주고 전달하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광화문 쪽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옆 사람에게 또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야단법석이었습니다. 큰 목소리는 또 더 큰소리로 옆으로 옆으로 소식들이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경찰이 때리고 짓밟는다는 소식, 학생이 도망가도 경찰이 곧 뒤쫓아가 학생들을 트럭에 끌어 올려 잡아간다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점점 더 급해졌습니다. 난 그때 ‘데모’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반독재 시민운동’이라는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습니다.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달리다 보니, 내가 산턱을 오르고 또 내리고 하며 뛰고 있었습니다. 효창동 집에 도착하니 벌써 어두워져 있었어요. 나를 모두 걱정하고 있던 우리 식구들이 반겨주니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을 먹었습니다.
나는 그날 들은 그 모든 말들이 무슨 의미로 쓰이는지 알지 못했고, 라디오 뉴스와 신문을 보고서야 우리나라가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역사적 위기를 맞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가 지나고 보니 내가 뉴스도 신문의 사설도 열심히 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나를 겨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세상을 읽어가게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 난 참 철이 없었고, 4.19혁명의 그 경험은 그 이후 나를 신문 사설 읽는 습관을 갖게 했고, 나의 역사의식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시절이 아주 중요한 내 경험세계를 오늘 발견하고 있답니다. 2020년 4.19 혁명기념일에 오늘 이 강단에서 내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를 불러낸 듯합니다. 이성환 목사님으로부터 4.19 기념일에 한 말 하라 하는 지목을 받고 순간 퍼뜩 든 생각이 ‘벚꽃’에 대한 ‘화려함’과 ‘을씨년스러움’이었는데 이러한 코로나 19를 통해 느낀 것과 같게 느껴집니다.
내 이성적 반응과 그 감성적 반응들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벚꽃의 절정, 그 ‘화려함’을 ‘4.19혁명’에 그 명예로운 역사적 사건으로 비겼고, 반대로 ‘반독재시민운동’을 하던 학생들의 희생을 ‘을씨년스러움’을 상징화시킨 내 생각들에 대한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들과 허허롭게 나누고 싶습니다.
[2020년의 우리에게 4·19의 의미, 김가흔 집사]
안녕하세요. 4.19 기념주일을 맞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향린교회 여러분은 4.19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왜 4.19를 기념하고 또 되새겨 생각하는 걸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1987년 개정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4.19를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의 일부로서 수용한다는 의미지요.
그 이전 헌법은 어땠을까요? 살펴보면 1962년 개정 헌법에서는 4.19의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지만 박정희 정권으로서도 4.19라는 사건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4.19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1962년 헌법에서는 5.16이 혁명이어야 했기 때문에 4.19는 의거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두환 쿠데타 이후인 1980년 헌법 개정 시에는 3.1운동만 남고 4.19도 5.16도 사라졌습니다. 결국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야 4.19가 혁명으로서 헌법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1987년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은 혁명적 계보를 강조하기 위해 4.19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4.19는 미완의 혁명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헌법 정신으로까지 상징되는 사건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박한 걸까요? 역사적으로 4.19에 대해 무엇이라 평가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4.19가 더 이상 죽은 혁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2020년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승만을 합법적으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하야’라는 절충적 해결책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이는 4.19의 주역이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렸고, 혁명 완수의 과제가 민주당 손에 달려 있었던 점이 가장 큰 한계라고 지적합니다. 혁명의 열기는 이승만의 하야 선언 이후로 지되지 못하고 급속도로 사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실시 된 총선에는 조봉암이 사형당한 이후 활동의 근거지를 상실했던 혁신계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했으나 대중들의 선택은 민주당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혁신계 정치인들의 통일 노선이 대중의 반공주의적 성향과는 달랐던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의 설 자리가 협소하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정치 구도와도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요.
문제는 민주당이 보수 정당으로서 혁명 정신을 계승하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혁명의 완수보다는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고, 심지어 반공법과 집회시위법 같은 혁명 정신에 위배되는 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더구나 어부지리 격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을 대신해서 정권을 책임지게 된 민주당은 생각보다 무능했습니다. 혁명 이후의 사회는 전보다 더 혼란스러웠고 사람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민주당의 한계가 5.16쿠데타를 불러왔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일 년여 만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함석헌 선생이나 김관석 목사처럼 위험성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지식인과 혁신계 정치인들까지도 이를 반겼던 것은 결국 민주당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정신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첫 번째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4.19의 정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어떤 이들이 혁명에 참여했고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19 하면 흔히 학생들의 시위라는 이미지가 강하지요. 실제로 학생들의 집단행동이 교수 집단과 일반 시민들까지 광범위한 동참을 불러왔던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부정선거에 항의해서 시위를 시작했던 것은 중고등학생이었지만, 4.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중고등학생의 시위에 영향을 받아 각 대학이 나섰던 영향이 크기는 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2월부터 산발적 시위가 있었고, 3.15 부정선거 직후에 마산 등지에서 크게 불붙었으며 결국 이승만의 하야 선언이 있었던 4월 26일까지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의 집단행동이 시작되었던 4월 19일을 타이틀로 내세운 것은 이런 대학생 참여가 당대에 가졌던 상징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대학생들의 참여가 정말로 그렇게까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였을까요? 혹은 대학생들이 발언권을 가져가면서 중요한 의미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1950년대 당시 대학생 집단은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나갈 예비 지식인이자 엘리트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안주했고, 사회의 변혁을 일으킬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중고등학생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지던 2-3월에 대학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4월에 학기가 시작했기 때문에 방학 기간에 본가로 내려간 학생들이 많아 조직적인 대응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변명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대학생 집단이 1950년대 내내 정부의 독재에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 시기 대학생 집단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학생 집단의 한계는 이승만의 하야 이후 산발적으로 지속된 대중의 시위를 금지하고 단속하며 자발적으로 질서유지를 위해 노력했던 데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대학생보다 더 참여도가 높았던 중고등학생 중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질서정연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민주 시민적 태도를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특히 고학생의 참여가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는 10여개의 야간고등학교 학생의 연합 조직인 협심회가 시위를 주도한 것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이들 학교 간 연합이 1950년대 학도호국단 제도와 관제 데모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부의 독재를 위한 억압적 정책이 역으로 독재 정권을 공격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물론 민주주의의 대의명분을 위해 움직였지만, 한편으로 이들이 바랐던 실질적인 변화는 자신들의 고단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 수에 비해 시위 참여도가 높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시 빈민과 부랑아 등 도시하층민도 4.19의 주역으로 손꼽힙니다. 고학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빈민의 당면한 현실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시위 참여 양상은 학생집단보다 훨씬 과격했어요. 1960년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는 마산 시위에서 이들 도시하층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하고 집기를 때려 부쉈으며 때로는 경찰을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전과 다른 중요한 한 가지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승만 물러가라’는 시위 구호가 처음 등장한 것입니다. 초기에 도시빈민의 폭력 시위는 다분히 현실의 고단함에서 누적된 울분의 표출에서 시작했습니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러한 울분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감지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언은 곧 전국적으로 퍼졌으며 끝내 현실화되기에 이릅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주로 낮이 이루어졌다면, 고학생과 도시하층민의 시위는 해가 지고 어두워진 시각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경찰의 발포도 밤의 시위에 더 많이 집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4월 혁명의 전체 과정에서 학생 희생자보다 도시 하층민의 희생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납니다. 이들 도시하층민 시위대는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도 시위를 지속하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 집단은 이들을 단속하고 금지했으며 이들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의 공을 독차지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4.19를 학생들의 시위로 생각하게 된 것도 어쩌면 이런 역사적 그늘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결국 4.19에 참여한 이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지만 그 안에는 각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관계라고 해서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대한 진정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어떤 변화가 절실한 집단이 더 많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 뿐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혁명은 단순 정치적 변화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을 수반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4.19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4.19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대중의 다양한 목소리는 막혔고, 노동, 통일, 농촌 등의 사회 각계의 분야에서의 요구는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촛불 혁명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민주당 정부는 1960년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며칠 전 치러졌던 총선에서 180석의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이 앞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은 매우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평화와 통일, 환경문제의 해결,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과 소수자 인권의 가치를 지키는 정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것이 민주당과 이 정부에 힘을 실어주었던 많은 이들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서 묵상, 김희헌 목사]
한국 현대사를 보면 한 국가가 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식민지배와 민족 분단, 외국군대의 점령과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 독재의 폭압 통치와 반란군인의 시민 살육, 자본의 만성적 수탈과 일상화된 냉전체제 등 고통에 물든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수난의 역사에 웅대한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오늘 60주년을 기념하는 4·19혁명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영욕으로 얼룩진 채 무심히 지나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시대를 구원하려는 뜻과 경륜이 흐릅니다. 이 뜻과 경륜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발자국을 남기고 역사의 증인이 됩니다. 바로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진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증인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예수의 죽음을 증언하는 제자들이 나옵니다. 열한 명의 제자와 함께 일어선 베드로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실패가 아니라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한 헛소리로 들었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스승이 걸어간 십자가의 행로를 못 마땅해했습니다. 그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영이 그의 마음을 밝혀주자, 두려움에 가린 것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십자가로 간 스승의 삶이 실상은 부활의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읽은 3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스’(μάρτυς, martyr), 즉 순교자를 뜻합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길을 생명의 길로 깨닫고, 자신을 밀고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수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은, 죽음의 형틀에서마저 신의 가슴 저민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수난의 역사에도 희망이 살아남아 이어집니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보다도 메신저의 자격입니다. 만일 그 말을 60년 전 학생과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과 같은 자가 한다면 억압의 흑색선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삼엄한 경무대 문을 밀어제치고 독재체제의 종식을 목놓아 외친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그들의 뼈아픈 희생을 진리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서의 핵심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역사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베드로전서 1장을 보면, 역사의 증인이 되어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거듭나게 만든 것은 일종의 각성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 심연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가 흐르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의 기독교적인 표현이 ‘부활한 예수를 통해서 얻은 산 소망’입니다. (3절)
새로 태어나 역사의 증인이 된 그들에게는 유산이 있습니다. 그 유산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땅의 결실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되었다고 할만한 것입니다. (4절) 그러므로 이 증인은 비록 시련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슬픔을 당하더라도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6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란 삶은 바로 이 믿음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 부활한 날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보면, 제자들은 스승을 죽인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세 번을 반복하여,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Εἰρήνη ὑμῖν) 하고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걷어낼 평화입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이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의 확실성에 관한 것입니다. 도마는 확실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손가락으로 못 자국을 만져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떨치고 평화를 얻는 일은, 도마처럼 자기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어 본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 20:29)
베드로전서 1장 8절도 같은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산 소망’을 갖고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가리켜 ‘믿음의 목표’(telos of faith)에 이른 삶이요,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9절)
오늘 우리가 4·19혁명의 정신을 따라 역사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이승만정권이 저지른 백색테러의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아직 걸어가 보지 않은 코로나 사태 이후의 삶을 위해서도, 산 소망을 갖고 성령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으로 얼룩진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역사의 증인들처럼, 우리도 남겨진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과제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역사의 증인들을 기억합니다. 예수의 수난에서 새 역사의 출발을 목격한 제자들처럼, 이들은 고난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도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산 소망을 안고 살아가면서, 역사의 증인에게 주어진 부활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