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슴이 뜨거워질 때 | 김희헌 | 2020-04-26

by 김희헌 posted Apr 26, 2020 Views 27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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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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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가슴이 뜨거워질 때 (2:14a,36-41, 벧전 1:17-23, 24:13-35)

2020.04.26. 부활절 셋째 주일

 

[인류에게 띄운 편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사태가 길어지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확산을 잘 차단하여 이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조심스럽게 활동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회중 예배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달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어떻게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섰지만, 점차 삶에 대한 성찰과 고통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이 한 편 있었습니다. 비비엔 R. 라이히라는 사람이 쓴 인류에게 띄운 편지’(A Letter to Humanity)라는 글입니다. 읽어본 분도 있을 것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지구가 속삭였을 때,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말을 걸어왔지만, 당신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소리쳐 외쳤을 때, 당신들은 오히려 귀를 닫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벌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을 일깨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지구는 도와 달라 외쳐왔습니다.

대규모의 홍수로 외쳐도 당신들은 듣지 않았고,

불타는 화염으로 외쳐도 당신들은 듣지 않았으며,

강한 폭풍과 돌풍에도 당신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양의 생물들이 오염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당신들은 여전히 지구의 외침을 듣지 않았습니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심각한 경고에도, 혹독한 가뭄에도,

지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받고 있는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고, 욕심은 멈추지 않고,

무수한 증오와 수많은 죽음이 날마다 일어나도

당신들은 그저 당신들의 삶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지구가 보여주는 수많은 징후를 알아내기보다는

최신 아이폰을 갖는 것이 더 중요 했습니다.

 

이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세계를 바로 그 궤도에서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자 당신들이 드디어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이 피할 곳을 찾게 하였고,

더는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은 이제 지구가 어떤 상태인지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는 것처럼 당신들은 고열을 일으켰습니다.

대기가 오염에 가득 찬 것처럼 당신들은 호흡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지구가 날마다 약해지는 것처럼 당신들은 연약해졌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편안함, 즐기던 외출,

그리고 지구의 존재와 그 아픔을 잊게 했던 것들을 당신들로부터 가져갔습니다.

세계를 멈추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깨끗해지고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단지 공장들이 오염물질을 내뿜지 않게 된 것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니스의 물이 깨끗해지고 돌고래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곤돌라가 멈추는 것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신들은 비로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벌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을 일깨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이 시간을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지구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당신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을 이제는 멈춰 주세요.

서로 싸움을 그치고, 물질적인 것에 매달리는 일에서 해방되세요.

 

대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시작해 보세요.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창조주가 있음을 다시 믿어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내가 돌아올 때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 올지도 모르니까요.

 

코로나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또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단지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전환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예수와 함께 한 시간 / 누가복음 2413-35]

오늘 복음서에서 읽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에 희미한 메아리로 남아 있던 기억을 누가가 매력 있는 이야기로 리메이크한 것은 특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서의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제자 이야기 이전에는 스승의 죽음을 맞은 제자들의 절망과 불확실함이 가득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빈 무덤을 보고 온 여인들의 증언에 대해서, 제자들은 어처구니없는 말’(idle tale)로 여깁니다. (11) 스승이 전했던 부활의 약속을 믿기보다는 낙심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런데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를 통해서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생겨난 패배감과 불신을 모두 씻어내고, 제자들은 다시 집결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저마다 뜨거운 가슴을 안고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짧은 로드무비 같습니다. 길 위에서 점차 익어가는 진리체험 사건입니다. 이야기는 날개가 꺾인 채 낙향하는 두 제자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대화하며 길을 걸을 때, 둘 사이에 부활한 예수가 끼어듭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이들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단지 낯선 동행자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며칠 전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에 대해서 진술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것이 단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꿈이 무너진 사건이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낙심하여 길을 걷고 있지만, 실상은 진리를 향한 그리움 가득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엠마오에 이르기까지 대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특히 낯선 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성경이 증언하는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 어떤 삶이 세상을 구하는 삶이며,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삶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어느새 집에 이르렀고, 나그네가 초대된 집에는 음식이 차려집니다.

이야기의 절정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에서 이릅니다. 빵을 들고 축복한 다음 나누어준 그 나그네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도상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집 안에서 이루어진 친교의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수는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스승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스승이 사라진 그 순간 제자들에게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허깨비를 보고 착각했다는 의심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마음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몸의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는가?” 그들은 심장’(καρδία)불붙는’(καιομένη, burning) 경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한 시간에 그들의 가슴은 뜨거워졌습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슴은 뛰었고, 가슴이 뜨거워지자 마침내 눈이 열렸습니다. 다시 나아갈 길이 환해진 그들은 곧장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제자들 모두 다시 모였습니다. 아마 저마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서로 주님이 살아나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겪은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의 제자공동체가 부활의 신비를 깨달아간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엠마오의 두 제자를 통해 표현합니다. 예수가 함께했던 시간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고. 가슴이 뜨거워지자 마침내 눈이 열렸고, 눈이 열리자 삶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거듭난 삶을 원한 사람들 / 사도행전 214a, 36-41]

사도행전은 이 제자들의 체험이 더욱 널리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장에 나오는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거듭난 삶을 구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신앙을 지어가는 기본 동선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긴 베드로의 설교를 마치는 대목에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다양한 지방의 출신으로 구성된 청중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위협적인 말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직접 반박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 본문은 기독교가 융성해졌을 때, 유대인을 박해하는 셈족주의자들의 단골 문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봐야 할 대목은 베드로의 훈계가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려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듭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들려준 말은 예수께서 세상을 향해 외친 첫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Metanoēsate, Repent!) 그리스도를 향해 삶을 돌이켜 세례를 받으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단지 종교 생활 입문자에게 주는 안내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로 초대를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그들이 벌이는 혁명적 공동체의 건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이고, 서로 사귀고 빵을 나누는 일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외감을 품고 살았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재산을 팔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2:42-45)

오늘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며 이천 년 전 베드로가 외치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비록 코로나 사태로 인해 비극적 경험을 먼저 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트라우마로만 남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삶을 새로 지어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절대로 멈출 것 같지 않던 세계가 돌연 멈추면서,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나갈 지혜와 용기가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함이 있다면, 그 간절함은 이전과는 다른 에너지로 작동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공동체의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어가는 방식에 대해서 더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 / 베드로전서 117-23]

베드로전서 1장에는 신앙인에게 주는 명령문으로 구성된 4개의 권면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읽은 본문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권면입니다. 그에 앞선 두 가지 권면은 이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향한 굳센 마음이요 (13), 그다음은 거룩한 분을 본받는 삶입니다. (14-16) 오늘 본문은 여기에 다른 두 가지 즉, ‘경건한 두려움’(17)뜨거운 사랑’(22)을 추가합니다.

이 편지는 특정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저자는 그들을 가리켜 나그네’(exile)라고 표현합니다. (1:1, 13) 이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1:2), 그 가운데에는 몸종도 있었고 (2:18), 자유롭지 못한 여성도 있었습니다. (3:1-2) 자기 땅을 떠나 나그네로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시련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불길이 일어도 놀라지 말라’(4:12)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일으켜 세워 살아가도록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은 이 시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경건한 두려움뜨거운 사랑입니다. 경건한 두려움(reverent fear)이란 헛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난 삶의 특징입니다. 뜨거운 사랑(heartfelt love)은 진리에 순종하는 삶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공동체를 지어내는 힘이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라고 본문을 말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위기의 시간을 보내는 상황에서 이 편지를 읽으니 더욱 그 내용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교우들이 없는 교회를 지키면서, 교회에 부임하여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자랑스러운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흠모할만한 정신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난 두 차례의 격심한 갈등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토대였습니다.

그런데 저만이 아니라 교우들도, 이제는 우리가 더 깊어져야 함을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경건은 두려운 마음에 담겨야 하고, 우리의 뜨거움은 사랑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그간의 삶은 마치 유배 생활과도 같았습니다. 그사이에 한 교우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세월호 유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4.16합창단이 그간 해온 활동을 모은 내용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울리는 대목을 몇 곳 접어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4.16합창단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난 가장 큰 감정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답니다. 그것은 깨끗한 존경이었다고 합니다. 그 감정은 단지 연민이나 이타심이 아니라, ‘너무 슬프지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용감할 수 있구나, 저렇게까지 깊을 수 있구나 하는 존경과 감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 51) 저 역시 그 표현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 퍼지고 퍼져서 우리 사회가 암흑의 시간에서 풀려날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만나고 싶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서 친교를 나누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로잡았던 헛된 생활방식은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와 동행하는 믿음의 길을 함께 걸을 때, 서로를 풍성하게 해주는 삶입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는 서로를 풍성하게 해주는 사람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동행하는 예수의 모습이 있기를 바라고, 우리의 마음에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의 가슴에 깃든 뜨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절망하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고 비로소 깨닫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는가?’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질 때, 새로운 삶은 시작됩니다. 코로나로 멈춘 세계가 다시 움직일 때, 우리 모두의 가슴이 따뜻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