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는 길 (행 2:42-47, 벧전 2:19-25, 요 10:1-10)
2020.05.03. 부활절 넷째 주일, 어린이주일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고통의 시간이 길었지만, 다시 일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계절은 봄이 활짝 피었지만, 아직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되고 있어서 어린이들에게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주까지 영상으로 예배드리고, 다음부터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재개하려고 합니다. 어린이부서는 야외예배로 시작할 계획입니다.
이번에 겪은 코로나 위기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특별한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교회는 예배당을 두 달 이상 폐쇄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는데요. 이번 사건으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무언가 문명사적 전환에 관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면, 미루지 않고 대담하게 맞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제게, 코로나 이후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고 지구 생명을 파괴하는 방식의 삶을 극복하고 상생의 생태 문명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고, 다른 하나는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를 맘껏 밀고 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갈등과 대결 속으로 몰아간 분단체제와 신자유주의라는 이중고를 극복하는 일에 힘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월요일은 4월 27일, <판문점선언> 2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과감한 정부 정책이 실행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21대 총선을 통해서 정당의 지형도가 변하고 거대 여당이 만들어졌어도 미덥지 못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촛불 혁명에서 시작된 국민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전환의 시기에 교회가 거듭나도록 주님께서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과거에는 한국교회가 용기 있는 신앙공동체였지요. 독재에 맞서 싸우는데 용감했고, 사회적 아픔을 싸매는데 헌신적이었으며,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일에 자기 몸을 던지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기억의 책장에 갇혀 있습니다. 부활의 창문이 활짝 열려서 교회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원초적 공동체, 잃어버린 삶 / 사도행전 2장 42-47절]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는 초기 기독교운동의 특징에 관한 요약문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설교 사이에 있는 이 내용은 활력있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서로 나누어 먹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마다 경외감을 품고 살았으며, 사도들을 통해서는 놀라운 일들(wonders and signs)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삶에 성서가 그토록 바라던 희년운동이 실제로 펼쳐지고, 인류가 꿈꾸어온 평등공동체의 이상이 힘차게 실현됩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삶은 이상적인 경제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함께 지내며, 서로 물건을 나누어 쓰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삶은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은 영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聖殿)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초기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이젠 거의 잊힌 기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온 교회에서는 꿈꾸는 것조차 불온한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이 원초적인 경험은 신앙공동체의 꿈에 계속 호출되면서 영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뒤흔듭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채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이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감정입니다. 우리 교단 안에서도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그런 실험을 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런 공동체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한계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신앙의 의무감이 만들어낸 영적인 압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만이 아니라, 신앙의 열정을 가진 분들이 함께 느끼는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약 칠십 년 전 명동에서 십여 명의 청년들이 실험적 공동체를 만들어보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들은 성서에 나오는 가장 활력있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그대로 이루고자 하는 시도했고, 또 그렇게 살아가면서, ‘성서의 가르침대로 사는 긍지’를 맘껏 누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늘 본문 42절에 나오는 신앙공동체가 해야 할 네 가지 작업목록이 있었습니다. 1) 가르침에 몰두하고, 2) 서로 사귀는 일에 힘쓰고, 3) 빵을 함께 나누는 일에 힘쓰고, 4)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것이 우리 향린교회의 원초적 기억이기에, 지금도 부족한 우리를 살리고 있고, 또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종교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모든 생명 운동은 처음에는 활력을 갖고 전개됩니다. 발자국을 찍으며 전진하고, 그 발자국이 모이면 교리나 제도가 됩니다. 그런 교리와 제도 속에서 얼마간 안정감 있는 항해가 진행되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생명력은 점차 사라지고 관습이 연장됩니다. 마침내 원초적 경험은 기억으로만 남고, 현실은 첫 출발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개인이든 조직이든 겪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괴로운 진실입니다.
한국교회의 어둠 속에서 향린교회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품격을 유지하며 건강한 교회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창립 67주년을 앞두고, 나눔과 섬김과 배움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꿈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루고자 했던 용기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부족과 한계가 분명하지만, 성서를 따르는 믿음의 긍지를 되살려가기를 원합니다. 시대의 짐은 항상 무겁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에서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열정의 공동체에서도 성공과 실패가 교차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또 하나의 평등한 경제공동체가 실현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행 4:32-37) 이 공동체를 대표한 사람은 훗날 바울의 동지가 된 바나바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이 기록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실패의 장면입니다. (행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욕심으로 인해 죽음에 이릅니다. 이런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는, 교회가 항상 자기 시대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역사를 이어가는 믿음 / 베드로전서 2장 19-25절]
베드로전서 본문은 ‘가정에서 지켜야 할 계명’을 다룬 내용(2:13~3:12)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과 아내에게 준 계명에서, 오늘 읽은 본문은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번 주일 성서일과는 의도적으로 18절을 빠뜨리고 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갖고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그 내용은 성서의 다른 목소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라고 설파한 바울의 급진사상에 비춰보면, 훨씬 후퇴한 보수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시대보다 약 두 세대가 흐른 후에 기록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 내용에서도 그 기간 동안에 쌓인 역사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백오십여 년 전 백인 기독교인이었던 미국의 노예 소유주들은 이 구절을 토대로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19절은 이렇습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만일 이 구절이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참혹한 거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위태로운 삶에서도 끊어지지 않은 신앙의 행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권면으로 읽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편지의 저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2:15, 3:17, 4:2, 4:19),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권면합니다. 본문 21절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으라는 이 구절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신앙공동체를 위해서는 언제나 유익합니다.
개인의 역사든, 민족의 역사든, 우주의 역사든, 거기에는 고난과 진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냉혹한 경쟁과 생존을 위한 인내가 반복되면서, 삶의 위기가 계속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위태로운 행진이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고비마다 위태로움을 이겨내는 감동적인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헌신, 공감과 결단의 시간이 역사를 잇는 매듭이 되어, 생명의 행진을 가능하게 합니다.
한국의 역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분단과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위기와 갈등을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정치-군사적인 대결을 통해서 상대방을 붕괴시키려는 시대를 위태롭게 지나왔습니다. 적대적 갈등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가 제작되고, 혐오 담론이 유포되었습니다. 증오와 대립의 정신으로 얼룩진 이런 한계상황에서 놀랍게도 ‘평화의 복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육체는 고통당했지만, 정신은 평화의 복음으로 피어납니다.
얼마 전 김낙중 교우께서 지으신 책 인류 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를 읽었습니다. 2013년에 출판되었으니, 아마 ‘평화소모임’에서 한 번쯤은 나누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 선생님은 그 책을 가리켜 ‘세상에 남기는 나의 유서’라고 표현하시는데, 저는 거기서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고통스럽게 지나왔지만, 자기 몸으로 ‘평화의 복음’을 건져낸 사람의 고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며 배운 내용을 한 가지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문명사적인 전환에 관한 것입니다. 김 선생님은 인류의 문명을 끌어온 수레바퀴를 크게 보면 두 개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자연을 정복하고 다루는 ‘도구’요, 다른 하나는 다른 인간집단을 다루고 정복하기 위한 ‘무기’입니다. 이제까지의 문명은 자연과 인간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와 무기를 발명하고 개발하며 진행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두 바퀴가 더 구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합니다. 자연에 대한 정복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연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이의를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자원고갈과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이상기후 등은 자연을 정복대상으로 생각한 문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무기의 발전 끝에 다다른 핵무기입니다. 그것은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무기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데에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수천 기의 핵무기를 가진 미국이 약소민족의 결사 저항을 정복하지 못 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무기가 인간을 정복하는 수단으로써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자연과 인간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굴러온 문명의 수레바퀴는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인류문명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약육강식의 문명 대신, 평화공존과 상생의 세상을 위한 문명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먼저 그곳을 향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먼저 걸으신 길이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갈 길입니다.
[나는 문이다 / 요한복음 10장 1-10절]
마지막으로 살펴볼 복음서 내용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증언하는 예수입니다. 요한 공동체가 경험한 예수는 다른 세 복음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세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그 사역의 끝에 이르러서야 ‘메시아’요, ‘주님’이라고 불리는 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세상에 오기 전부터 계신 분이요, 처음부터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언됩니다.
헬라어로 된 하나님의 이름 ‘ego eimi(Ἐγώ εἰμι)’는 요한복음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ego eimi’는 ‘나는 ~이다’는 의미로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헬라어 이름입니다 (셉투아진트에 기록된 출 3:14).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 6장에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6:35), 9장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9:5), 14장에서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14:6) 말합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위에서부터 밀려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절은 ‘양과 목자의 비유’이고, 7~10절은 ‘양의 문’이신 예수에 관한 증언입니다. 각 단락의 시작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각 단락을 시작할 때마다, “아멘, 아멘”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말한다.”라는 이 간절함의 표현은 요한공동체가 겪고 있는 갈등상황을 반영합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는 바리새인과의 대결상황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바로 앞에서 바리새인은 진리에 ‘눈이 먼’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9:40-41) 그들은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만이 ‘목자’가 됩니다. 요한복음이 사랑하는 이미지인 ‘목자’는 에스겔서 34장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포로 생활에 지친 사람에게 에스겔이 전한 복음은 ‘선한 목자로 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포로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 목자가 자기 양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요한은 갈등의 고충과 대결의 위태로움 속에서 ‘선한 목자’처럼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으로서,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그 문을 드나들면 푸른 초장으로 인도받을 것이라는 ‘평화의 약속’을 전합니다.
이 평화는 단순히 ‘부드러움’이나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웅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 평화를 가리켜 “파괴적인 격동을 진정시키고 문명을 완성시키는 위대한 조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누릴 때, “수많은 아름다움과 무수한 영웅적인 행위와 무수한 대담성이 일어나고 지나가는 한복판에서 영원(eternity)을 직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관념의 모험, 434).
오늘 우리 시대는 ‘평화를 꿈꾸는 믿음’을 요청합니다. 무너진 마음과 마음을 잇는 평화,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를 일으켜 세우고, 아픔의 강물이 흐르는 세계의 징검다리가 되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서 이 평화를 맛보고 전합시다.
다음 주부터는 예배 재개합니다. 예배만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신앙공동체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오늘 성서 일과에 함께 읽는 시편은 23편입니다. 읽고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도행전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의 복음을 마음껏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역사의 무게는 항상 있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평화로 가는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