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행 7:55-60, 벧전 2:2-10, 요 14:1-14)
2020.05.10. 부활절 다섯째 주일, 어버이주일
[사랑과 감사의 세계를 향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어 반갑고 감격스럽습니다. 사순절과 함께 시작된 코로나 사태로 인해 부활절에도 모이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사랑과 감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사랑과 감사로 구성된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버이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대부분은 부모 세대로서, 때로는 고달프고 때로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런 삶들이 모여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사랑이 심어지고, 감사할 열매도 맺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불행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세계가 불행해진 것은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부족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공동체의 꿈이 희미해진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꿈을 잃은 세계에서는 가진 자의 오만이든, 갖지 못한 자의 결핍이든 모두 영적인 공허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에 대한 예수의 꿈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스승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면서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공동체가 파괴되어 쉴 곳을 잃은 세상에 대한 깨우침과 격려의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두 제자의 물음 / 요한복음 14장 1~14절]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특수자료입니다. 14장부터 17장에 나오는 말씀은 ‘고별사’로 불리는 예수의 강론으로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진 다음에 주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이 산상설교를 통하여 명료한 신앙의 윤리를 가르쳐주었다면, 요한복음은 고별사를 통해서 깊은 종교적 영성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별사의 앞부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둘째,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내가 먼저 가서 있을 곳을 마련한 다음에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겠다. 셋째,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모두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도마가 예수께 말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도마의 문제는 보고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길이 된 분을 앞에 두고,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을, 예수에게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도마에게 주신 이 말씀은 도마를 향한 물음이 됩니다. 네가 걷고 있는 길이 무엇인지, 네가 숭상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네가 추구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도마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코로나의 위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영원할 것만 같던 진리가 불능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장이 멈추고, 상품 거래가 그치며, 증시가 폭락했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워지며, 익숙한 길이 막혀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새로운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미 봤기 때문에 알았어야만 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어두운 마음이 빌립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빌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도마처럼 빌립의 문제 역시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에 이미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문제만은 아니라 제자들 모두의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근심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은 ‘믿음과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믿어야 할 것은 ‘예수와 하늘 아버지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관계가 제자들에게도 가능하고,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예수 안에 계시면서 자기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늘 아버지는,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일치와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바로 길이 되게 하시고, 하늘의 진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진리를 드러내시며, 하나님에게서 온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의 삶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14절에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약속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이 말은 오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가 원하는 것을 모든 상황 속에서도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른 이해라고 보십니까?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오늘 말씀의 제목도 다르게 해석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는 말로 표현된 하나님나라의 풍요로움은, 자기가 원하는 어떠한 것도 예수의 이름만 걸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의 길을 걷기만 하면 아버지의 집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모든 욕망을 다 들어줄 만큼 방대하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어떠한 형편에서도 추구될 수 있을 만큼 열려있다는 의미일까요?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모양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두 개의 아이러니 / 사도행전 7장 55~60절]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뜻을 따른 예수 공동체가 건설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풍성하게 자라나는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선출된 일곱 명의 집사 가운데,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운동 최초의 순교자였는데, 사도행전은 그를 마치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그는 예수를 죽인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예수의 길을 증언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남은 삶은 모질게 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져들고 맙니다. 이 과정에 대한 본문의 묘사에서, 우리는 역사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두 개의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진리의 사람이 당하는 수난이요, 다른 하나는 수난당하는 진리로 인해 변화되는 세계입니다.
첫 번째는 죽임을 당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스데반은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열린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를 봅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던 빌립의 간청이 사도행전의 스데반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가서, 그를 돌로 쳤습니다. 진리의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시련이라는 점은 역사의 비극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또 다른 아이러니이자 역사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8절을 보면,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난데없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증인들’(μάρτυρες, witnesses)이 누구인지, 왜 옷을 벗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정황상 이 증인들은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요, 수난당하는 진리에 관한 증인들입니다. 이들의 옷이 사울이라는 청년 앞에 두어졌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복선이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누구인지 압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여긴 (행 8:1) 이 청년이 바로, 나중에 예수 운동을 온 세상에 전할 사도 바울입니다. 지금은 어둠에 잠긴 사람이지만, 훗날 새 역사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성서의 기대가 복선으로 깔려있습니다.
역사에서 진리는 수난당하지만, 수난당하는 그 진리가 어둠에 잠긴 세계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것을 스데반이 삶으로써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이 삶을 그려내는 사도행전은 예수의 언어를 그에게 부여합니다. 돌에 맞아 죽임당하는 그가 쏟아낸 말은 십자가 위에서 드린 예수의 기도입니다.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 그리고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예수의 기도를 올린 스데반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반복됩니다. 우리는 역사에 구원의 시간이 오기까지 뿌려지는 피와 목숨의 시대를 압니다. 한국 사회의 사월과 오월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역사에서 믿음을 세우는 길은 스데반이 걸었던 길과 같습니다. 그는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운동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복음전파의 시작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에서 시작된 박해로 인해, 예수 운동은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생과 박해를 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희생이 없다면 생명 세계는 존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고 대립하는 것은,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역사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진리가 수난당하는 이 역사의 회한을 누가 풀어주겠습니까? 하늘이 풀어주고, 하늘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이 풀어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하늘의 무늬를 그려주셔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서 희생적인 도덕과 숭고한 문화와 자기초월적인 종교가 쏟아져나옵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스데반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리의 시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그 과정을 견디는 믿음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돌 / 베드로전서 2장 2~10절]
서신서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은 ‘살아있는 돌’(living stone)이라는 상징으로써 믿음의 삶을 표현합니다. 본문에서 ‘거룩한 돌’은 먼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있는 돌입니다.”
또한, ‘거룩한 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집을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살아있는 돌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사는 삶입니다. 본문은 그런 믿음의 삶을 가리켜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택함을 받은 족속(γένος/race)이요, 왕 같은 제사장(ἱεράτευμα/priesthood)이요, 거룩한 민족(ἔθνος/nation)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λαὸς/people)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짓는 데 사용되는 ‘산 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의 길을 걸으면 아버지의 집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위태로운 전환의 시기를 살아갈 때, 모든 믿음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견딜 힘을 주시고, 병고로 어려움을 당하는 가정에 하늘의 위로와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힘을 내어 예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모인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크고 작은 세 개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먼저, 갈등으로 중단된 성도의 교제와 친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묵은 정신을 털어내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둘째는 교회 이전과 함께 선교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가 숨 쉬는 공동체가 되도록 가꾸어가야 합니다. 셋째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향한 믿음의 상상력을 맘껏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옛 시대를 이어가기보다는, 옛 질서의 파국을 보는 성서의 종말론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운 은총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에 시련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수난당하는 진리가 어두운 세계를 비추어 밝힙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자비를 힘입어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살아있는 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