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행 1:6-14, 벧전 4:12-14, 5:6-11, 요 17:1-11)
2020.05.24. 부활절 일곱째 주일
[유보하지 말아야 할 삶의 본질]
부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7주간 부활절 기간에 온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씨름해왔고,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가질 공동의회에서, 우리는 교회 이전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역시 뉴노멀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는 여러 활동들 즉, 선교와 교육과 친교와 예배에서 뉴노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생활양식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지요. 흔히 뉴노멀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유행은 과거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형태의 변형에 그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근원적인 변화를 위한 상상과 실험입니다.
오래전 토마스 쿤이라는 학자가 <과학혁명의 구조, 1962년>라는 책에서,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용어를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던 것은 ‘뉴노멀’이 생겨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사고의 진보는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어왔는데, 쿤이 이 책에서 제시한 것은, ‘뉴노멀’이란 과거의 상식으로부터 단절된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위기가 누적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완전히 변경할 때에 생겨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과학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와 종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지난 60년 가까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뉴노멀’이 정말로 코로나 시대 이전의 삶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묻게 됩니다. 감염자 오백만 명을 훌쩍 넘긴 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아직 일치된 견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력한 이론으로 환경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우리 세계는 아직 ‘생태문명’(ecological civilization)을 향한 상상력 있는 정책을 펼치기보다는, 경제성장률의 감소를 우려하는 산업문명 시대의 익숙한 지표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기후위기는 지구생태계의 총체적 종말을 암시하고 있지만, 화석연료 중심의 소비생활은 여전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방역에 성공하여 집권 4년 차에 60%대의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회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재편성되었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뉴노멀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성공한 한국식 방역을 가리켜 ‘K-방역’이라 부르면서, 이제는 ‘K-경제’ 즉 한국식 경제의 성공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자본과 재벌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촛불교회 기도회가 재개되어 강남역 고공 농성장을 찾았습니다. 거의 1년이 다 되도록 철탑에 올라 외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가슴 아팠습니다. 깊이 따져보면 삼성의 간교한 이간 책동이라 할만한데, 긴 싸움의 과정에서 생긴 운동진영의 내부분열에도 괴로웠습니다. 영어로 sound와 voice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강남역 철탑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그저 한 노동자가 질러대는 sound가 아니라, 고통에 사무친 자의 voice로 듣고, 정부가 먼저 나서서 귀 기울일 수 있는 때는 언제쯤 올 수 있을까요?
코로나 사태로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경험했다면,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뒤로 유보하지 않고 먼저 해결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 힘내서 나가자는 의미로 시 한 편 낭송한 다음에 성경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의 제목은 <유보>입니다.
태양은 어둠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빛을 유보하지 않는다.
솔씨는 땅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금강송을 유보하지 않는다.
산매화는 눈보라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꽃망울을 유보하지 않는다.
삶은 유보하지 말아야 한다. 옳은 건 유보하지 말아야 한다.
준비를 위한 유보는 없다. 좋은 삶이 곧 최고의 준비다.
유보할 것은 삶의 본질을 유보하려는 바로 그것이다. (박노해 씀)
[때를 묻는 사람들 / 사도행전 1장 6-14절]
오늘의 첫 번째 성서 본문은 삶의 본질을 유보하지 않고 지켰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6절을 보면, 부활한 스승을 만난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당신의 나라가 바로 지금이냐고 때를 묻는 이 질문에는 복합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에 나라를 잃은 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스승에게 묻는 것은 국권 회복만을 의미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질문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 운동에서 유보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물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서의 설명 가운데, 사도행전과 같은 저자인 것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독특한 답변을 준 바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질문합니다. 누가복음의 대답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릅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그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눅 17:20/21b)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되찾을 때가 바로 지금인가’를 묻는 제자들에게 준 예수의 답변은, 때나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역사의 시간 크로노스(χρόνος)이든, 변혁의 때 카이로스(καιρός)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 사항이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8절)
이 말을 마치고 예수는 승천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공기도 없는 진공상태를 지나 어떤 다른 은하계로 이동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 근대적 세계관은 없었습니다.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하늘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아마 그것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흰옷 입은 사람들의 말일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간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11절)
그렇다면 제자들이 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한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들이 돌아간 그 다락방은 아마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와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던 곳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기도한 그 자리에 성령이 임하여, 마침내 교회가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던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야 하는 바로 그때가 아닌가? 이 질문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냐고 묻는다면, 예수께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기도 / 요한복음 17장 1-11절]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준 예수의 고별사 (14~17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여기서 ‘때’(hora)는 어떤 카이로스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이 진행되는 특정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도를 마친 예수는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수난을 당하기 때문에, 여기서 ‘때가 되었다’는 말은 수난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수난의 시간을 ‘영광’의 시간으로 그려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다면, ‘영광’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순간에 영광스럽다고 느끼나요? 역사의 비등점에서 끓는 승리의 열기 속에서 맛보는 무엇일까요? 로마의 영광은 그 제국의 항구적인 번영을 보장할 권력의 크기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영광은,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다락방에서의 시간, 기도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는 시간 속에 경험되는 무엇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이란 수명의 끝없는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보다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은, 영생을 단지 ‘미래의 희망’으로 여기지 않고 ‘현재적 사실’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복해서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3:36, 5:24, 6:47)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이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냈음을 아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통 수난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진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냈다는 것을 깨닫는 믿음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담아주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6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번역의 문제, ‘아버지’를 뜻하는 ‘파테르’(Πάτερ)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는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음 (1절과 5절). 그런데, <새번역>은 ‘아버지’라는 말을 25번이나 사용, <개역개정>은 18번이나 쓰면서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흐리게 함)
이 기도의 내용은, ‘예수에게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기도 속에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그리스도에게 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수난을 앞둔 예수는 바로 그들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9/11a절)
이 기도는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을 위해 드려진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드려진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있기 바로 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16:33) 만일 그들이 세상의 영광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 기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예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기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간, 고난의 시간 /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5장 6-11절]
베드로전서는 수난과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준 말씀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준 위로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 여러분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4:12-14)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기뻐하라는 이 권면은 어쩌면 고약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난을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언어로서 ‘고난의 감내’는 도덕적 범주를 초극하는 종교적 삶에 관한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예수의 말씀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고난의 땅, 비옥한 생명의 땅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들과 공동체, 오늘 서신서의 본문이 그들에게 주는 삶의 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6절) 당신을 낮추십시오. (7절)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8절) 깨어 있으십시오. (9절)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이 삶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들을 위한 오늘 성서 본문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삶의 짐이 무겁게 느껴지는 시절입니다. 이전 시대의 질서는 멈춰가고 있는데 새로운 시대의 도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위태롭게 보입니다. 교회의 위기가 깊었고, 삶의 위기도 깊었습니다. 정신줄을 놓은 종교의 영적인 광기도, 돈의 노예가 된 시대의 영적인 허무도, 그저 과거를 답습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들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또 우리들의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지어져야 할까요? 부르주아적 사교에 익숙해져서 종교의 본분을 잊은 교회, 현세적 기복주의와 내세적 타계주의를 오갈 뿐 예수의 뜻을 잃은 신앙, 낮은 곳에서 당신의 나라를 지어가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신학, 그것으로는 내일을 지어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면, 필요한 것은 더욱 깊고 따뜻한 상상력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에서, 자기 시대를 분별하며 때를 묻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며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들, 시련의 시대를 믿음의 시대로 바꿔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되찾을 때가 바로 지금이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믿음의 시간으로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꿈을 유보하지 않고, 생명의 시련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