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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지붕 위에서 외치기 | 김정원 | 2020-06-21

by 이성환 posted Jun 21, 2020 Views 26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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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6-21

지붕 위에서 외치기 (창 21:8-21, 롬 6:1b-11, 마 10:24-39)

2020.06.21. 성령강림절 넷째 주일, 성정의주일, 남북화해주일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하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종이자, 이삭이 태어나기 전 아브라함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내였습니다. 이 셋의 구도는 이미 복잡하지만,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에는 더 많은 긴장이 생겼을 것입니다. 어느 날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과 놀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저 여종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이 나의 아들과 유산을 나눠가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하지만, 결국 자신의 또 다른 아내인 하갈과 자신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집 밖으로 내보냅니다, 사실상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지요. 아브라함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조금 쥐여주고는 집 밖으로 쫓아 내버립니다. 하갈은 하루아침에 어린 자식과 함께 들판에 나동그라진 신세가 되고맙니다. 이 플롯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요? 하갈을 쫓아내기 전 아브라함이 고민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 부분 중 턱 하고 걸리는 부분이 없으신가요? 저는 구절 구절이 목에 턱턱 걸리는데요~ 그냥 종도 아니고 ‘여종’, 그리고 - 아니 지금 돈도 한 푼 없이, 남편도 없이, 아비도 없이 거지 신세가 될 판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두고 하나님씩이나 되어서는 한다는 말이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사라의 말대로 해라”입니다. 또한, 씨로만 아이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자꾸 하나님은 ‘너의 씨’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삭이 어찌 아이를 낳는단 말입니까? 

 

이 이야기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쫓겨난 하갈이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빈들에서 마실 것이 떨어져 딱 죽게 생기자 하갈은 아이를 눕혀놓고 “내가 저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며 오열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하갈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둘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20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네- 맞아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 둘을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 역시도 목에 걸립니다.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신다고 하시는데, 하갈과 함께하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갈은 이 속에서도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아이가 장성했다고 쓰여 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자랐다는 그 구절이 아이를 어떤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길러낸 하갈의 강인함과 노고가 분명 있었을 것임에도, 하갈의 수고와 애환, 혹은 눈물, 혹은 생명을 향한 절연한 의지와 같은 것들은 상상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여성 하갈의 삶이 묻혀버리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견됩니다. 

 

어디에 서있느냐에 따라 풍경은 달라집니다. 오늘 제가 성서를 보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확실히 성서 안은 아닌 듯합니다. 성서 밖에서의 해석, 성서 밖에 내팽개쳐져 있는 여성의 삶에 불을 밝히는 해석, 가부장적 자리를 떠나버림으로써 시작되는 해석의 자리,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오늘은 성정의주일입니다. 성정의 주일을 맞아-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뜯어보며 하늘 뜻을 시작했는데요. 여성의 자리에서 성서를 뜯어보다보면, 목에 턱턱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살펴볼까요?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 중 ‘간음한 여인’하면 딱 떠오르는 상황들이 있지요? 우리는 예수가 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사람들은 놀라고, 이어 여자를 죽이려 돌을 쥐고 있던 사람들 모두는 돌을 내려놓게 되고, 간음한 여성은 예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돌아가는 장면. 이러한 플롯이 여러분들 머릿속에서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율법에서 간음죄는 비단 여성에게만 묻던 죄가 아니었습니다.

 

간음은 혼자서는 벌일 수가 없는 일인데, 그렇다면 함께 간음했던 남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보통의 남성이 보통의 여성보다 달리기가 빠르기에, 사람들이 잡으러 오기 전 잽사게 도망친 걸까요?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간음한 남성을 거론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음한 남성은 어디있는거야?’라고 묻지도 않아 왔습니다. 이 이야기로 인해 우리는 예수의 관용적 태도와 따뜻함을 배워야겠으나, 이러한 본디 주제는 사라져버리고, 우리에게 강하게 어필되는 제목 ‘간음한 여인’만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무 멋진데, 여성의 존재는 간음하는 존재로서만 어필되는 상황, 바로 이것이 이 플롯의 불편함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의 엄마 마리아에 대한 이해입니다. 마리아는 원치도 않던 임신을 하고 당황스러워하고 두려워하지만, 엘리사벳의 위로를 통해 위로를 얻고, 아이를 낳겠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 찬가’로 알려진 마리아의 고백을 살펴보면 그녀의 절연함이 느껴지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올곧은 이해가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주린 자를 먹이게 하고, 배부른 자를 빈손으로 떠나보내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신 분” 이라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구원자로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보다 더 제대로 이해한 제자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토록 똑부러진 그는 ‘동정녀’ 로 귀결되어, 여성의 성적 순결함(물론, 동정이 여성의 순결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밝히며, 흔히 말하는 성적 순결함)에 대한 찬양으로 마리아를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 조금 후에 감사기도를 해줄 임솜이 청년이 제게 얼마 전 보낸 글 중 ‘남성 없이 임신한 마리아’라고 표현된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 표현은 어떤 여성 신학자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표현이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의 의지가, 다시말해 해방의 이니셔티브가, 예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방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 구원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 특히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수많은 여성에게도 함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이름을 주고, 이니셔티브를 잃어버린 여성들에게 그 힘의 의지를 쥐어주는 일. 나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성소수자를 포함한 많은 약자들을 조명하는 일, 그 일을 위해 반성하고 다시 힘을 모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성정의 주일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성정의는 공감의 언어가 아닌 정치적 언어입니다.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당연히 정치이고 역사라고 여겨지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개인적 문제이거나, 집안일, 혹은 격렬한 로맨스로 간주 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여성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아픔을 공감하고, 소수자의 어려움을 경청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을 성정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감과 소통은 성정의 실현을 위한 정치 지형을 만들어 가기 위한 요소는 될 수 있겠지만, 최종 목적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정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움직임을 가만 바라보시며, 페미니스트들을 남성을 반대하는 그룹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간혹 격하고, 간혹 거세지기도 하는데, 유독 성정의를 향한 움직임에 대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여하튼 남성을 억압하는 운동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잘못한 것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페미니즘은 남성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아니며, 남과 여를 이분법적으로 놓고서 여성이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남성이 아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프로파간다를 비판하는 실천이론이며, 여성적 시각에서 정치 사회 문화를 재구성하고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이론입니다. 소외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또 하나의 비판적 성찰을 위한 도구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여성적 시각’에 대한 입장이 다양합니다. 여성신학 역시 여성에 관한 규정을 새롭게 하려 큰 노력 중인데요. 그 중 미국의 젠더 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의 입장을 빌려오자면, “우리 여성은 피해받아왔어!”라고 말하는 입장 역시 가부장제 속에서 부여된 역할이기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틀에서 벗어나, 구조 자체의 한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주체자 여성을 강조합니다. 버틀러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짚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 역시 가부장제 안에서 나온 구분이기에, 즉 ‘여성’이란 개념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이 역시 해체해야 한다고 보는 지점입니다.

 

우리 한 인간이 가진 정체성은 몹시 복잡다단합니다. 그리고 한 여성과 같은 여성의 차이가,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차이보다 클 경우가 많음에도 우리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좁고 작고 편협한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면 섹시즘, 나이로 구분하면 연령주의, 인종으로 구별하면 인종주의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은 무엇을 중심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일까요? 이는 바로 이성애 제도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할 때 비장애인이 ‘정상’이라는 시각에서 규정되었기 때문에, 장애인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따른 임의적인 범주입니다.

 

이렇듯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이 되는 것은 이성애 제도로부터 동성애가 임의적으로 비정상성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성별에 대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버틀러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결국 성평등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개념의 해체를 시도한 것입니다. 

 

물론 여성들이 사회나 교회 내에서 차별을 겪다보니 ‘자매애’로 돈독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성별 이분법적이게 될 가능성이 높고, 그러다보면 성의 다양성을 배제할 우려가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다양성은 다수의 이성애자들을 포함,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양성애자 등등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을 고려한 언어 일 것입니다.  

 

다양성의 문제로 넘어가 볼까요? ‘우리는 누가 인간이가?’ 라는 질문 앞에 모두가 인간이다‘ 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하겠지만,. 4.3사건에서 서북청년단은 “우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내폭력 가해자들은 “나는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가해자는 피해자를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개념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 역사의 진보는 인간의 범위가 확대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이 부여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이 인건 의제로 상정되고 논의되는 것은, 피해 당자사들의 지난한 투쟁의 산물일 것입니다(정희진). 

 

21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지난 14일 정의당은 차별금지법 발의 의지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고,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국회에 차별금지법 입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2008년 제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은 지금까지도 통과되고 있지 않는데요. 성별, 장애 등 몇몇 사유만을 다루거나, 고용 등 영역이 한정된 개별적 차별금지법과 달리,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고용, 교육, 재화 및 용역, 행정서비스 등 전반적 영역에서 성별, 장애, 인종, 나이, 언어,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 20여 가지의 사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합차별의 개념을 통해 장애 여성이 받는 차별, 이주민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과 같이 중첩되고 교차적인 차별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개개인의 차별피해에 대한 온전한 구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은 2010년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해당하는 equalilty act 2010, 즉 평등법을 제정한 후, 의식조사를 했는데요. 대규모 조직의 경우 78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평등에 더욱 민감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즉 차별금지법을 통해 우리는 배제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가 암묵적 배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인식하고 더 토론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의식 성장 역시도 기대하게 합니다. 

 

의식 성장이 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물어보시는 분이 간혹 있는데- 2019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한국의 동성애 관용도는 평균 5.1보다 훨씬 낮은 2.8을 기록하였습니다. 또 회원국 20개국이 동성 결혼을 법적 인정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지요. 이는 여전히 동성애자들에게 보편이나 도덕적 지위가 주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또 다른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평화는, 공고한 가부장적 평화가 아니요, 주류 집단에만 머물러 있는 평화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차별 이데올로기를 베어내고, 혐오주의를 갈라내는 날카로운 칼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의 복음서 27절의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이였고, 그 사랑은 늘 어둡고 낮은 자리에서 이야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밝은 데로 가지고 가서 더욱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에게서 배운 복음을 드러내놓고 공공연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널리 전파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당지기가 도시의 가장 높은 지붕에 올라가서 나팔을 불어, 온 도시의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시작을 알렸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예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과 성정의가 작금의 상황 속에서 다른 의미가 아님을 알 때, 우리는 부지런히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와 연합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연합’이라는 헬라어 표현은 고대의 식물을 배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즉,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나무의 몸체에 붙어 영양분을 흡입하면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과 예수와 우리의 관계를 닮은꼴로 본 것입니다. 

 

예수와 유기체적 연대를 맺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위상을 감안할 때, 지붕 위에서 큰소리로 외칠 내적인 힘이 이미 충만하지 않을까요? 배제당한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에게도 사회적 구조가 만든 '정상성'의 개념을 해체하고 나아갈 힘이 있습니다. 배제된 여성과 성소수자들에게 조금만 힘을 내라!라고 이 시간을 빌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칼을 뽑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 파송사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그저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성애자도 아니고 가부장도 아닌 그저 평화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사람아 기억하라, 우리는 결국 같아진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와 우리가 연합되듯, 고통의 몸들과 우리의 몸이 결합됩니다. 

한 개인이 갖는 정체성의 복잡함, 모호함, 다양함이 우리 속에 수용됩니다. 

금기와 경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가 지붕위에 서서 큰소리로 주의 사랑을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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