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77] 어떻게 성서가 “사회악의 근원”이 될 수 있나? 그 죄악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잡자!

by 최성철 posted Jun 30, 2020 Views 166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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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전세계에 퍼뜨린 서구의 역사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교회성서문자적으로 인용하여 부인할 수 없는 고통, 공포, 피와 죽음의 흔적을 남겼다. 또한 교회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거짓 은폐를 일삼았다. 다시 말해, 성서 구절들은 선량한 사람들을 탄압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또한 그 살인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사용되었다. 지난 1700년 동안 교회 기독교가 성서문자적으로 밍음으로써 저지른 죄악들은 가부장적 여성차별, 여성을 죄악의 근원으로 치부, 여성의 월경과 피에 대한 남성의 공포, 낙태금지, 동성애 혐오증, 아동학대, 반유대주의, 황금만능 축복론의 빈부차별, 종교차별, 생태계 파괴 등등이며, 오늘 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기상황에서 예배모임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는 바이러스 확산의 온상지가 되고 있다.  또한 성서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맹신하는 신자들은 성서를 비기독교인들과 유색인종들과 원주민들을 천시하고 박해하는 데 철저하게 악용했다.  성서근본주의적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성한 책하느님의 적으로 계시된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우 잔인한 형태의 고문을 가했다. 이탈리아의 인류 박물관에 전시된 전시품들 중에는 종교재판에서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이단자 처형기구들이 있다. 그 중에는 사람들의 사지를 찢어버릴 수 있는 형틀, 목을 찌르는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목걸이, 그리고 사람을 산적꼬치로 만드는 기구들이 있다. 오늘도 거룩한 신자들은 여전히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 유대인, 소수민족에 대해 온갖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성서가 인용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그렇게 널리 존중되고 있는 성서가 어떻게 죄악의 근원이 될 수 있나? 성서악용하는 것을 막고 중지시킬 수 있나? 성서는 다시 한번 생명의 원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원천이 될 수 있나? 아니면 이미 너무 늦었고 성서는 이미 너무 낡고 더럽혀졌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필자는 73 인생 전체를 통해 성서를 사랑했으며,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교회가 교회답기를 갈망해 온 기독교인이다. 나는 결코 성서 교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고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새로운 렌즈로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고 인식했으며, 또한 교회는 그 자신의 역사적 파괴성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성서를 너무나 사랑했고 또한 수십번 읽었지만 그냥 건성 읽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다시 새롭게 성서를 신중하게 읽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신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이나 종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구절들을 무관심하게 놓칠 수 없었다. 성서 여기저기에서 혼란스럽고 혐오스러우며 불쾌한 부분들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성서어두운 부분을 처음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나의 심층적인 연구는 기독교와 교회를 악의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성서의 참 모습을 재발견하고, 역사적 예수에게 솔직하고, 예수의 하느님에게 솔직하려는 나의 열정과 노력을 오늘까지 끊임없이 지속되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과거의 패러다임의 망상에서 깨어난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독교인이다. 물론 필자는 유신론적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를 무신론자 목사라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교회가 만든 예수와 내세지향적인 이분법적 교리를 떠나 보내고, 역사적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 나의 신앙이고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성서는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은 물론 신앙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성서를 잘못 이해하면 잘못된 말과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으며, 죄악의 근원이 된다. 팥 심은 곳에 팥이 나오고, 콩 심은 곳에 콩이 나오듯이, 성서를 바르게 읽고, 성서에 솔직해야 바른 말과 행동이 나온다. 목사들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교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종교적 수준에 맞추어 성서를 변질시키거나 왜곡해서 가르쳐서는 안된다. 성서가 진실한 책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존중하고, 사람들의 통찰력이 살아나고, 시대에 맞는 성서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격려해야 한다.   

 

오늘도 여전히 성서의 일부 구절들은 편견을 뒷받침하고 폭력을 은폐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심각하게 세뇌되어 마치 눈뜬 장님처럼 성서에 부정적이고 비상식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갈등에는 항상 종교적 요인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역사를 통해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온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한다. 소위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종교적으로 힘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것이 바로 성서였다. 성서를 가장 자주 인용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한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것이 성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성서가 사용되는 방식의 문제라고 변명하는 것도 방어적일 뿐 정직한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서 원본은 실종되었으며, 무수한 성서 사본들이 혼잡하게 수집 수정 왜곡 편집되는 필사과정에서 성서 자체죄악이 된 부분들이 성서에 잠임해 들어왔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성서는 자신의 말로 성서 자체를 저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추악하고 낡은 죄악성차별주의인종차별주의인종분리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오늘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백인이 흑인보다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분리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항상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여자보다 유용하다는 가부장적 편견의 주된 배경에 성서를 인용한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다루던 방식에서 성서가 악용되었다. 교회에는 성서에 근거한 종교적 편견 오만이 가득하고, 신자들의 삶 속에 깊숙이 베어있다. 그들은 복음서를 읽으면서 유대인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유대인은 뭔가 사악함을 떠올린다. 이런 사악함에 대해 서구에서는 유대인 혐오2차 대전 중에 유대인 대학살로 극에 달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사악한 저주는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과 북미의 극우 보수파 목사들은 공개적으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와 그들의 주요 희생양인 동성애자들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독선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필자에게도 사악한 저주의 경험이 있는데 자칭 경건한 신자들은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징벌과 최후심판에서 지옥행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혐오와 저주의 경고를 한다.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맹신하는 성서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으며,  생존의 두려움의 부족적인 성서일 뿐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항상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 성서는 분명히 허약하며, 문자적으로 읽고 무작정 믿는 성서 내용은 분노와 저주와 거짓과 은폐로 가공스럽다. 이런 말은 자칭 독실한 신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분노를 일으키지만, 이것은 성서자기 파괴성에서 구출하고, 교회로 하여금 지금까지 성서의 인용을 통해 정당화시켜 왔던 자신의 소름끼치는 역사를 직시하도록 만드는 개혁운동이 된다. 이 운동은 역사적 예수가 내세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성전신학을 폐기하고, 현세에 조건없는 사랑과 공평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선포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수를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핵심이다.

    

2001911일에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의 시민들은 다른 종교 전통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국제적 테러를 당했다. 테러리즘이라는 죄악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그 동안 양심에 거리낌없이 행해온 종교적 독선 적대감을 꼼짝없이 스스로 직면하게 된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서구 기독교 선진국 시민들에게 새로운 학습이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테러리즘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절박한 소명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의 파괴적이고 무서운 면을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인식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공개적으로 직시하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서구절문자적으로 인용하면서 폭력정당화시킨 방식을 포함해서 기독교인들이 종교 하느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죄악이 무엇들인지 밝혀야 한다. 물론 기독교인만이 죄악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한,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룬 것은 사실이고 이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주변에 실례가 너무나 흔하게 많다. 마치 기독교 자체의 속성에 자신과 다른 외모, 언어, 습관, 종교, 인종, , 성적본능 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폭력은 항상 이런 편견과 차별과 우월감의 결과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삶이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원초적으로 기독교예수처럼 비폭력, 우주적인 사랑, 폭력없는 평화, 공정한 정의를 살아내는 종교이다.

 

모든 종교들의 보수적인 극단주의자들은 물론 기독교의 성서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예외없이 따르는 구호가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실행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폭력과 살해를 정당화하는 얄팍한 변명이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신의 이름을 빌리는 낡은 정당화는 더 이상 설득력도 없고, 더욱이 신뢰감도 없다. 인류사에서 아일랜드에서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종교전쟁과 1588스페인 무적함대가 바티칸을 위해 개신교 국가인 영국을 침공하려다 전멸한 전쟁에서 모두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였다. 11세기부터 200년 동안의 십자군 원정2003년부터 15년 동안의 이라크 전쟁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으며 수십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종교적 해악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대단히 복잡하고 파괴적이다. 특히 18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가톨릭 신부들이 어린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폭행할 때에도 예외없이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였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목회자들을 영적인 아버지로서 존경하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신뢰에 대한 배신이다. 이런 현상은 더욱 악화되어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선적으로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실책과 폭력적인 범죄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역시 하느님의 이름을 동원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뜻이고, 모든 잘못들을 하느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들은 교회 은신처에 도피한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자연의 법칙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성적본능이 자연스럽게 동성애가 된 사람들을 예수의 가르침대로 무조건 사랑하고 따뜻하게 포용하지는 못할망정, 동성애자 혐오폭력을 정당화시키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성서 66권들 중에 지극히 일부분 몇 개의 구절을 인용한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멋대로 거론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가 문자적인 성서일 수밖에 없다. 성서전체적으로 큰 그림으로 보아야 하며, 심층적으로 신중하게 솔직하게 이성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서전체적인 사상을 이해하면 성서는 진실한 책이 된다. 성서는 몇 구절 주관적으로 인용해서 힘없는 사람들과 나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나타난 고통 죄악을 증진시키는 성서는 더 이상 기독교의 경전이 될 수 없으며 당연히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성서의 죄악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독교인들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분이 나빠지거나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우주진화 세계관이 교육과 철학과 예술과 문화와 종교와 과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21세기에 교회와 하느님과 성서와 인간과 생명과 세계의 의미들을 다시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거짓 은폐 속에서 수동적으로 사는 삶을 중단해야 한다. 진실은 거짓에 파묻혀 있기 보다 공개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교회는 가식적인 이중성에 심각하게 중독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그 죄악들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느님과 교회와 기독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