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78]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교회의 권위와 교리의 “시녀”가 되었나?

by 최성철 posted Jul 06, 2020 Views 163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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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 성서는 중보교회의 권위와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교리도그마시녀노릇을 충실하게 이행해왔다.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모독하고, 억압하고, 살해하는 죄악의 도구 노릇을 하는 성서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하느님의 뜻이 될 수 있으며, 그 말씀이 어떻게 죄악정당화할 수 있나? 21세기에 그런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서는 대단히 위험하고 사회와 세계를 차별적이고 우월적으로 분단하고 혼돈에 빠트리고 있다. 그 극명한 예가 한국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할 때가 되었다.  

 

기원전 3500년에 설형문자가 발명되고, 기원전 1700년에 초기 알파벳이 창조된 이후에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문서들이 기록되었지만 그 중에 가장 희한하고 이기적인 주장은 그 내용이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하느님이 특정한 사람들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인간적이고, 인간의 사소한 일까지 챙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믿지 못할 일은 기독교 교회의 성서에 대한 이런 주장과 전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수용되었다. 물론 다른 종교적 전통들의 신성한 경전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의 주장은  미신으로 간단히 묵살해 버리고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다만 기독교인들은 오직 성서만이 진실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가짜라는 말에 병적으로 세뇌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배시간마다 자신들의 망상적인 주장을 수없이 되풀이 한다. 즉 성서를 읽은 후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면, 회중은 하느님께 감사를이란 말로 충실하게 응답한다.

 

또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사람들은 성서가 실제로 하느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교회 내부에서 중요한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면 최종적인 판단은 성서 구절의 인용으로 귀착된다. 기독교인들이 성서에 대해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할 때는 문자 그대로 그것이 하느님에 의해 쓰여졌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 틀림 없다고 무작정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신중하게 탐구해 본 적이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주장은 100여년 전 전세계를 복음화한다고 떠돌아다니던 성서근본주의 선교사들과 요즘도 활개치는 내세지향적인 부흥사들의 관점일뿐이다. 이 사람들이 성서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읽기나 했는지 의문시된다. 성서를 수학공식 암기하듯이 글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믿었을 것이 뻔하다. 순진한 기독교인들은 마치 이들의 주장이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것으로 속아 넘어가서 하느님을 맹신하고 있다. 주류 기독교의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사람들을 혼돈에 빠트리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이 성서 기록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성서 내용을 작성하도록 했다는 주장의 모순을 지적하자면,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인간적 오류가 개입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성서의 모든 기록들을 하느님께 돌리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감추어진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상 성서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뒷받침해 주는 권위적인 성서 이외에는 그 신앙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없다고 착각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성서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신화와 서사시라는 문학적 장르를 사용하여 은유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재해석이 필수적이다. 그래야 진실한 책이 된다. 성서 66의 책은 대략 1200년에 걸쳐 기록되었으며, 성서비평학에 의한 재해석 없이, 모든 글자 하나하나 그대로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수용될 수 없는 몰상식하고 무식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괴상한 주장에 의해 너무나 병적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스스로 그 성서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기독교 교회에서 그토록 자유롭게 피어난 죄악의 근원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망상이었다. 성서에 대한 이런 잘못된 정의가 편견을 초래하고,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였다. 더욱이 불행한 것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의 젊은 세대에서 조차 성서근본주의 교회와 조부모님들의 악영향으로 성서를 우상으로 삼아 성서가 마치 최후의 권위인 척 하도록 생각하는 종교적 정신상태를 초래했다.

 

오늘날 세상에서 분명히 악한 것으로 인식되는 행동을 기독교 역사에서는 오히려 정당화하고자 인용했던 성서의 잔혹한 구절들을 성서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한다. 은유적으로 기록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그대로 무작정 믿기 때문에 성서 죄악 근원이 된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이분법적이고 제도적인 성전종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거나 혹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인류 역사에서 너무나 파괴적이고 잔혹한 죄악의 근원이 되었다. 필자는 이미 그런 낡고 추악한 기독교교회를 떠났으며, 이제 새롭게 탄생한 기독교 교회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삼층 세계관에서 지식과 정보도 부족하고, 인종과 민족과 성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성서 저자들의 고대 가설들을 21세기의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수용할 수 없다. 성서에 나타나는 그런 원시적인 인식이 정당하다고 말하면 그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한 민족만하느님 백성으로 선택하고 다른 민족들을 무시하는 그런 옹졸한 하느님을 진정 예배할 수 없으며, 그런 하느님은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그 선택받은 민족이 증오하는 모든 사람을 성서의 하느님도 역시 증오한다면 그 하느님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이 아니다. 인간이 너무도 타락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노아의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에 빠져 죽도록 기후를 조절하여 대홍수를 내리는 하느님을 오늘 현대인의 의식으로 수용할 수 없다. 그 선택받은 민족의 해방을 쉽게 하기 위해 이집트에 죽음 사자를 보내어 집집마다 맏아들을 살해하는 성서 속의 그런 잔인하고 편협한 하느님은 현대인들의 하느님이 아니다. 여호수아로 하여금 그의 적인 아모리 사람들을 더 많이 죽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태양을 중천에 머무르도록 했다는 성서는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사무엘사울 왕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하여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사무엘상 15:3)라고 기록한 성서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인가?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가 인종차별과 여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종교차별과 빈부차별이란 죄악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성서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잔인한 정신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의 하늘 위에 천국이 있지도 않다는 것은 과학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수준에서도 보편적인 사실이다. 즉 우주 세계에는 상중하 층이 없다. 따라서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성서 저자들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천체에 괸한 이런 사실을 하느님이 몰랐을까, 아니면 성서 저자들에게 일부러 안 알렸을까? 어쨌든 지구 중심삼층 세계관은 바벨탑 이야기(창세기 11),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이야기(출애굽기 16:4), 베들레헴의 별을 찾아가는 동방박사 이야기(마가복음서 2), 심지어는 하늘로 승천하는 예수 이야기(누가복음서 24:5) 등에 등장한다. 현대과학의 자연의 법칙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를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운 현대인들은 결코 하지 않을 억측성서는 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믿을 수 없는 기적의 이야기 또는 공상의 세계 이야기로 전락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화적 영웅들은 예수처럼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묘사되었다. 21세기에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고대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신과 같은 전지전능함을 보여주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신화의 공통적인 요소다.        

 

교회 기독교는 역사를 통해 성서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모독하고, 억압하고, 심지어는 살해하는 죄악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죄악의 근원이 되었던 성서구절들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낯낯히 밝혀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서새로운 렌즈로 다시 새롭게 신중하게 읽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성서의 무섭고 잔혹한 구절들에 내재된 성서의 죄악을 넘어서, 성서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핵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아직 다다르지 못한 참된 인간이 되는 삶의 을 탐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만들어진 예수를 떠나 보내고, 참 사람 예수역사적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예수는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 예수의 신성은 오늘 사람들에게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만을 조장해 왔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인식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참된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스스로 인식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과 새로운 비전을 본다. 이들은 적어도 두려움과 공포와 이기심을 넘어 자유하게 심층적인 삶을 살아낸다. 역사적 예수가 이러한 삶을 가르치고 몸소 살아내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권위와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교리의 시녀노릇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역사적 예수정신을 깨달아 알고,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