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79] “차별금지법”을 비이성적, 신경질적, 폭력적으로 반대하는 적그리스도 교회를 추방하라!

by 최성철 posted Jul 17, 2020 Views 167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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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의 21대 국회에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기본적으로 차별금지법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분야는 크게 고용-교육-의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용은 승진과 급여도 포함되어있는 개념이며, 교육의료 등의 서비스 제공에는 주거와 기타 여러 공공 및 사적 서비스 제공 등을 포함한다. 대개 차별이라 함은 성별(남성/여성/), 성적 본능(이성애자/동성애자/양성애자/ 무성애자/범성애), 성 정체성 (시스젠더/트랜스젠), 인종, 종교, 국적, 출신지, 가족 형태, 학력, 장애 여부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최근에 서울의 일간신문에 개제된 기사에 따르면, “차별금지법은 유엔인권이사회의 권고이자 국민의 88.5%가 찬성한다는 여론조사가 있음에도 이를 동성애 옹호법이라며 발의한 국회의원들에게 협박 전화를 해대는 것도 한국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의 추동에 의해서다. 그들 행동의 근거는 성서라고 한다.” (한겨레 신문, 202077일자 기사 인용)

성서 문자적으로 읽고, 수학공식을 암기하듯이 직역적으로 무작정 믿는 근본주의 신자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위협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반대하는 근거가 성서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성서에 대해 무지함 무식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서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의 용납은 세계의 몰락과 기독교의 몰락이라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또한 동성애혐오하는 신자들은 동성애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람들을 철천지 원수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타협의 여백이나 중용은 없으며, 오로지 위협과 폭력마저도 협박의 술책으로 손쉽게 활용한다. 그들은 성서 구절을 문자적으로 인용함으로써 동성애 혐오하느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한다.

 

동성애의 용납은 결코 세계의 종말이나 기독교의 종말이 아니다. 동성애 혐오를 마치 성서적인 믿음으로 착각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우주진화 세계관의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근거한 새로운 의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 밖의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가치관도덕을 수용하지 못한다. 2000년 동안 인류 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한 낡은 과거의 패러다임은 설득력과 효력을 상실했으며 폐기처분되는 것이 마땅하다. 현대인들은 현대과학에 기초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구체적으로 살아내고 있다. 교회는 세계적인 미래의 물결을 거슬러 역행할 수 없다.    

 

신자들은 만일 교회가 게이레스비안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미래가 없는 사이비 종교로 몰락하게 된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상 교회 안밖에 수많은 현대인들은 이성적으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신자들은 동성애용납하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도덕 자체가 붕괴되고, 기독교의 권위는 허물어질 것이라는 생존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때문에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죽어가는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서를 새로운 렌즈로 다시 새롭게 읽는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해, 유신론적-초자연적-이분법적-부족적-내세적인 과거의 패러다임을 아낌없이 내려놓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해야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미 2000년 전에 역사적 예수는 이분법적 차별 분리성전신학 제국신학에 항거하여 새로운 세계관가치관 윤리관을 선포하고, 민중들에게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냈다. 예수는 기존의 종교와 정치가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목숨을 내걸고 투쟁했다. 예수는 성전신학제국신학의 패러다임은 낡고 추악한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지금 여기에서 공평하고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야 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차별편견오만거짓은폐는 없다. 다시 말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의 본질은 모든 인간의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현세적인 이 세계와 내세적인 다른 세계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세계에서 온전하게 의미있게 자유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며 일회적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꿈은 망상일뿐이다.  

 

성서문자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는 외부로부터 악령이 몸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무지함

무식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학에 따르면 동성애는 치료할 수 있거나,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다. 캐나다에서는 동성애 치료를 불법화하고 있다. 동성애는 동식물과 인간의 11%에게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쉽게 말해, 우리들 가운데 약 11명 중에 한 사람은 동성애의 성적본능을 지니고 있다.   

 

동성애 결혼합법화하는 국가들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이 극심하게 부족한 상황에 있다. 교황청에서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교회 내부에 안수받은 사제들이 게이 남성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되면서 게이 남성들이 혼인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안전 대피소가 필요없게 되었다. 이제 게이 남성들이 훨씬 개방된 사회에서 살 수 있으므로 과거처럼 교회라는 포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더 이상 현실을 통제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교리, 교의 및 윤리적 강령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권위가 이성적이고 솔직한 진리가 아니라는 새로운 자각이 감았던 눈을 뜨게하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게했다. 사람들은 성서를 새로운 렌즈로 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의식이 생겼으며, 과거의 수동적인 삶이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삶과 신앙으로 변화되었다. 교회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음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주는 방어선이 되지 못한다. 성서는 항상 인간의 본성을 거짓과 은폐로 왜곡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고, 인간의 본성에 낡은 교리적 믿음으로 추악하게 더덕더덕 회칠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600년 동안 발전된 성육신 교리, 속죄론 교리, 삼위일체 교리 즉 신조신학은 성서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여 만들어졌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철저하게 무시하는 신조신학은 동성애 혐오, 여성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이라는 사회악의 근원이 되었다.

 

공개적으로 충성스러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신자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심판적이며 적대적인 성명들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들은 예수의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을 지나칠 정도로 훼손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그들의 증언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전혀 없다. 그들은 마치 하느님을 대변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며, 또한 하느님이 동성애를 증오한다는 착각과 거짓으로 자신들의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성서의 문자적인 구절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맹신하기때문에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광신을 뒷받침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 혐오에 대해 격렬한 언행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과 성서를 일방적으로 자기들 편에 놓고도 이 싸움에서 정치계와 종교계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징표가 현실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인의 88%차별금지법을 찬성하고 있으며, 지구촌의 삶을 이끌어가는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37개 선진 국가들이 이미 차별금지를 합법화하고 있으며, 유럽연합도 곧 합류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하고 성숙해져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뇌의 진화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2-3천 년 전, 성서가 기록될 때의 의식수준이나 지식 정보의 수준으로 21세기의 세계와 삶을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것은 거짓과 은폐로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오늘 우주진화 세계관이 초등학교 수준에서 대학원 수준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정치와 경제와 종교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되고 있는 주류 사회와 세계에 속해있는 기독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문자적인 하느님직역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움켜쥐지 말고 아낌없이 떠나 보내야 한다. 삼층 세계관의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부족적이고 옹졸한 하느님과 그 하느님의 말씀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 세계가 멸망할 날을 고대하면서 죽은 후에 다른 내세의 세계로 이주해 갈 것을 꿈꾸는 것은 기독교인의 참된 신앙이 아니다. 성서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한 시대의 종말 즉 그들의 세계의 종말에 살고 있다는 착각과 자아도취에 빠져있다. 그들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신관은 패배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 세속적인 인도주의자들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교회를 떠난 인도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깨달아 알았다. 참 사람 예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으며 사회개혁가였다. 21세기의 사회와 세계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인도주의자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동성애성적본능에 대한 낡은 정의는 오늘 이 세계에서 설득력과 효력을 잃었으며,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성서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성서의 교훈이 보편적으로 선명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다. 과학과 문화의 발달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진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성서가 문자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분명한 교훈을 성서의 문자적인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구절을 글자 그대로 직역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고 추악한 일이며 특히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한 짓이다.

 

신구약 성서 66권은 33,039(구약 23,090, 신약 7,949)로 구성되었으며, 동성애 혐오에 대한 구절은 9(구약 5, 신약 4: 성서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12절이라고 주장한다.)뿐이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의 주류 신학계는 약 1200여년에 걸쳐 다양한 시대와 여러 지역들과 역사적 배경들에서40여 저자들(공동체들)이 기록한 33,039절 중에 불과 9개 구절이 주장하는 동성애 혐오성서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 내지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학과 신앙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성서에 기록된 동성애 혐오 내용은 단지 고대 사회의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을 드러낸 부산물일뿐이며, 기독교의 핵심사상은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우주적인 사랑과 용서, 이분법적 분리와 차별없는 통합적인 현실을 살아내는 종교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다시 새롭게 읽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21세기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은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1세기에 기독교가 탄생할 때,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이 소아시아와 유럽 세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동기는 참 사람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이방인들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았다고해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원초적으로 그리스도(Christ)의 의미는 예수의 신성 즉 초자연적인 하느님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독교가 생겨나기 훨씬 전에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유래되었는 데, 인간이 우주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을 고백적으로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초자연적이고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차별과 분리의 하느님 예수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을 믿어야 구원받는 구원론과 내세론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참 사람 예수에게서 드러난 온전한 인간의 경지를 뜻한다. 그리스도는 동양의 노자 도덕경에서 ()의 의미과 같다. 즉 인간이 추구해야 할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길(Way)이다. 예수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과 생명과 진리라고 말한 뜻은,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참 인간이 되는 삶의 (, Way)이 되라는 요청이고 도전이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예수에서 수많은 그리스도가 나온다. 예수처럼 사는 그리스도는 인간과 생명과 인종과 종교와 빈부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지금 여기 이 세계의 현실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표상이다.

 

교회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은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고, 예수의 우주적인 하느님을 반대하는 것이고, 예수를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적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차별금지법이 밝히는 취지는 세계의 종말이나 기독교의 종말이 아니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차별하고 분리하고 혐오하고 탄압하는 사회악정당화하는 성서죄악의 근원이다. 21세기에 우주진화 세계관의 사회에서 성서는 죄악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기 위해서 성서를 악용하는 근본주의 교회와 신자들과 정치인들의 만행은 철저히 근절되어야만 한국의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