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 김희헌 | 2020-07-19

by 김희헌 posted Jul 19, 2020 Views 17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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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창 28:10-19a, 롬 8:12-25, 마 13:24-30, 36-43)

2020.07.19. 성령강림절 여덟째 주일

 

[진리담론이 경계해야 할 권력담론]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군 사건 가운데 하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본보기가 될만한 삶의 행적을 가진 분의 죽음을 정중하게 애도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보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막강한 권력의 이면에서 진행된 성폭력의 부당함과 그 피해자의 고통에 주목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세대에 따라 큰 것을 보면서, 시대의 변화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선교 과제를 설정하고자 하는 우리 교회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인 교회라고 하는 외부적 평가와 내부적 긍지를 가진 우리 교회가 관심하는 것은, ‘진보적인 정신’을 통해서 미래를 열어가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배를 이어서 진행될 공청회에서 다룰 주제인데요. 세부적인 제안은 이따 듣기로 하고, 제가 최근에 느끼고 있는 한 가지 문제의식을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주에 휴가를 내어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그것은 광주항쟁 40주년을 맞아 교단의 ‘5·18 신학’을 정립하는 심포지엄이 9월 초에 있는데, 그때 발표할 글을 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자료와 씨름하면서 얻은 생각은 5·18 담론의 기능이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짧게 표현하면, 5·18의 진리를 논하는 담론이 예전에는 ‘저항 담론’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 ‘권력 담론’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광주항쟁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대목입니다. 분명히 5·18광주민중항쟁은 역사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5·18’은 인권과 정의에 관한 사회적 감수성의 원천이자, 민주정신의 보루와 같은 것이요, 한국 사회에서 ‘광주’는 진보적 시민운동을 이끌어왔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 힘이 모여서, 1995년에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망월동 묘역은 새롭게 단장되어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국가의 공식활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폭도로 매도된 사람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을 받았습니다. 97년에는 신군부의 탄압을 받았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실질적인 민주 정부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런 변화는 필요한 일이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는 한층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와 함께, ‘5·18’과 ‘광주’가 한국 사회를 추동하는 가치를 제공하는 일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5·18 담론이 이제는 저항 담론으로서 기능하기 어렵게 된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과거에는 진보적이었던 주장이 오늘날에는 기득권의 논리로 기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광주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다고 봅니다. 

지난날의 진보가 오늘날에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생겨나면서, 진보적 주장이라는 것도 세계의 실질적인 변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존재의 자기표현에 불과하다는 허무주의가 생겨났습니다. 진보세력의 도덕적 우월성도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이를 교훈으로 삼아, 진보적 신앙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보수 기독교와의 차별성을 갖는 데 머무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삶으로써 창조적 신앙을 지어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배 후의 공청회는 그간 논의해온 선교 방향에 관한 중간발표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과제를 공유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갔으면 합니다. 교회조직을 ‘친교와 회의 중심’에서 ‘선교와 활동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공청회가 오늘의 하늘뜻펴기가 될 것을 기대하며, 성서 묵상은 평소보다 짧게 진행하겠습니다. 

 

[광야에서 비롯된 각성 / 창세기 28장 10-19a절]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은 야곱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집을 떠나 들판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라, 뒤죽박죽된 삶을 뒤로하고 도망자가 된 신세였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챈 도덕적 실패와 그로 인해 가족관계가 파탄 난 상황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비참한 처지의 그가 놀랍게도 꿈을 꾸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하늘까지 이어진 사닥다리에 관한 꿈이었습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그 장면은 야곱에게도 하늘과 땅을 잇는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 가지였습니다. 누워있는 그 땅을 너와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 너의 자손이 먼지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그들로 인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될 것, 그리고 이 약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어딜 가든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 속에서 중얼거립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이 집이요,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17절)

이 이야기는 보통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자칫하면, 번영신학의 관점으로 해석해서, 야곱이 얻은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놓치게 됩니다. 오해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번역했는데, ‘많아질 것’이라는 말은 의역으로 덧붙인 말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사용된 단어 ‘ka·‘ă·p̄ar’는 ‘티끌과 같다’(like the dust)는 뜻입니다. 한글 성서는 그것을 ‘티끌처럼 많다’고 번역했지만, 저는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티끌과 같이 미미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의 자손은 비록 티끌처럼 미미한 존재로 온 세상으로 퍼지게 되겠지만, 바로 그들로 인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성서의 놀라운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어서, 불안한 미래를 안고 온 세상에 흩어져서 비록 미미한 존재(precariat)로 살아가지만, 바로 그들로 인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이해하면, 뒤엉킨 삶의 혼돈 속에 있는 야곱이 피신 중에 얻은 깨달음,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라고 하는 고백의 의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된 축복의 크기에 대한 과분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비참한 무신론적 삶을 약속의 삶으로 바꾸는 하늘의 은총’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의 삶이든, 역사의 삶이든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겠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의 믿음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마태복음서 13장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의 비유와 그 해설에 관한 것입니다. 비유의 시작은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과 같다! 어떤 사람인가? 그는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원수가 와서 그 밭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쁜 씨를 뿌리고 갔다고 말하면서, 비유는 현실감을 더해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주인과 종의 대화가 진행됩니다. 주인의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안 된다. 둘 다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이것은 자비롭고도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두 번째는 ‘추수할 때 가라지는 모아서 불태우고, 밀은 곳간에 거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하고도 명쾌한 결심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이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더 끌렸던 것은 ‘밀’이 아니라 ‘가라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가라지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각각의 은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 가르침은 아닙니다. 비유의 가르침은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비유를 통해 주고자 했던 말은 ‘의인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유를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좋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의 의미를 보게 됩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의인들’(dikaioi)입니다. 그들은 가라지를 보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라지로 인한 삶의 동요와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좋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 속의 소망 / 로마서 8장 12-25절]

로마서 본문은 두 개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입니다. (12-17절) 찬란한 헬레니즘 문명의 권력과 폭력 사이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사는 사람들에게 준 바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당시의 철학적 이상이었던 ‘자유인’이 되는 것과 의도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아마도, 예수의 길은 정복 문명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빚진 자’라는 말로 전하고자 한 것은 노예적인 삶이 아니라, 더욱 큰 자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영광을 받는 삶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가 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준비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물음은 ‘우리가 겪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의 의미를, ‘부패의 종살이’에서 놓여나기 위해 분투하는 삶에서 찾았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22절) 

이런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바라며 견디는 삶’입니다. 이 소망과 인내 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 자체가 될 것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함께 살펴본 오늘의 세 본문은 삶에 관한 성찰과 각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라는 야곱의 깨달음은, 뒤섞여버린 가라지에 실족하지 않고 생명의 밭에 좋은 씨앗을 심어가는 사람들의 것이며, 신음하고 진통하면서도 함께 소망을 품은 공동체의 것입니다. 성령께서 동행하셔서 우리 모두의 삶도 새롭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뒤엉킨 삶의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깨달은 야곱은 고백합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우리도 삶의 밭에 돋아난 가라지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생명의 씨앗을 심어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