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을 신경질적으로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자들은 구약성서 레위기의 2개의 구절을 인용한다. 즉 레위기(18:22, 20:13)에 동성애자를 죄 값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말이 있다. 이것이 어떻게 21세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레위기는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벨론 포로기에 주로 제사문서 기자들(the priestly writers)이라고 알려진 유대 종교 지도자 집단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문서는 당시에 온 유대인들이 강제적으로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할 때에 민족의 생존이 절벽 끝에 선 것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레위기는 나라를 잃고 먼 이국땅에서 고향땅을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그들의 존재감을 지탱할 수 있는 강렬한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레위기의 중심에 소위 성결법전이라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벨론에 유배된 유대인들은 비굴한 포로생활에서 민족의 주체성과 단결과 생존을 위해 자신들은 바벨론 민족 보다 더 우수하다는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런 차별성은 약소한 유대 민족의 전체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방식이였다. 즉 자기 자신들을 다른 민족들과 차별하여 성별(聖別)되게 규정하는 성결법전은 포로민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유일한 선택이었다.
유대인들은 성결법전을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는 데, (1) 첫째로, 매주 제7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할 뿐만 아니라 회당에 참석함으로써 그 날을 엄수하도록 명했다. 포로생활 하던 그들은 이 전통을 유대교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성서의 가장 서두에 기록된 6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를 창작했고, 또한 하느님은 창조 제7일에 휴식을 취함으로써 태초에 이 안식일 전통을 인준했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하느님은 제7일을 축복하고 유대 민족의 성별(聖別)을 선포하는 수단으로서 안식일을 영원히 지키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2) 둘째로, 포로생활 하던 유대인들은 정결음식법을 채택했다. 종교 체계가 그 구성원들에게 엄격한 식단을 강요하면 그 체계의 신봉자들은 신앙 공동체 밖에서 먹지 않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은 인간관계가 정상적으로 맺어지는 데 기본이므로 유대교 율법에 따라 요리된 정결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차별성을 장려하고 식사 때마다 성별(聖別)의 요청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3) 셋재로,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할례를 유대교의 표징으로 격상시켰다. 유대 남성들의 몸에 그들의 종교 및 민족 주체성의 징표를 붙이는 효과를 낳았으며 부정할 수 없는 차별성을 창안한 것이었다.
레위기의 성결법전은 유대인들이 강대국에 의해 피정복 백성으로 유배당한 신세가 되었지만 바벨론인과는 구별되어야 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사문서 기자들은 자신들을 정복한 민족들 속에 다양한 성적(姓的)행태가 있음을 감지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한계적인 지식과 당시 부족적 편견에 근거하여 기원전 6세기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한 엄격한 도덕법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21세기 현대의학의 성적본능에 대한 발견을 알 수 없었던 성서 저자들은 동성애 혐오증적인 구절들 (18:22, 20:13)을 삽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부족주의적 생존의 두려움을 드러내면서, 유대민족을 바벨론인으로부터 차별화하고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레위기는 유대인 생활의 핵심인 성서의 처음 다섯 권 가운데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율법”(Torah)이라고 하는 이 다섯 권은 모세의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시간이 흘러 율법은 초기 및 후기 예언자들의 문서와 기타 문서들이 보충되어 히브리 성서(구약성서)를 집대성하게 되었다. 그 후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히브리 성서에 소위 신약성서라는 것을 첨부하여 기독교 성서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이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당시의 편견들이 이 책들 속에 궁극적으로 자리를 잡고, 당시 유대인들이 규정한 정의에 따라 자칭 성역(聖域) 밖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비인간화 과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상 성서를 기록한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의 한계와 역사적 환경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학문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사상이 낡은 관행에 도전하면, 과거의 태도, 편견 과 차별과 혐오와 특히 무지는 사라지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이처럼 매우 자연적이며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진화과정에 큰 걸림돌과 장애물이 있는 데, 성서문자근본주의 광신자들이 주장하기를 성서의 저자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21세기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을 멋대로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이 문서들을 절대적으로 신성한 경전으로 착각하는 신자들은 3000년 전 고대 성서 저자들의 한계와 무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고대의 편견을 영속시켰다. 오늘날 이러한 행태는 폐쇄적인 집단의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의 부산물이다. 지금 동성애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자들이 이용하는 최대의 방어선은 오직 고대 성서와 교회가 만든 이분법적 교리이다. 사실상 우리의 사회에서 게이 남성와 레즈비안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가장 추악하게 드러내고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 보수진영과 가톨릭 교회이다.
성서근본주의 신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해서 무작정 믿기 때문에 성서의 전체적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성서의 좁고 어두운 한 쪽 구석만을 바라보면서, 성서는 확실히 동성애를 저주하고 있으며, 만일 동성애자들이 용납되면 성서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나 도덕적 권위를 잃게 될 것이라는 편견과 혐오와 무지에 빠져있다. 성서 66권은 33,039절(구약 23,090절, 신약 7,949절)로 구성되었으며, 동성애 혐오에 대한 구절은 오직 9개(구약 5개, 신약 4개: 성서에 동성애에 대한 언급들이 선명하지 않다.) 뿐이다. 만일 동성애 문제가 성서 전체의 핵심 사상이고, 기독교의 운명을 결절짓는 것이라면 적어도 수백개의 구절로 더욱 분명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은 말문이 막히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를, “그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낡고 설득력이 없는 억지주장을 맴돌고 있다. 2천-3천 년 전에 기록된 고대 성서 한 권의 책으로 138억 년의 우주 역사와 260만-30만 년의 인간 생물종의 진화역사와 4만 년의 인류사회의 문명발달사와 지난 수세기 동안의 현대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진화과정에 대한 문제들에 답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에 대한 성서 전체에서 단지 9개 구절의 논거는 너무나 미미하고 위약하며 가련해 보인다. 아마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신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병적인 히스테리 차원에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는 레스비안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대 성서 저자들은 그런 것이 있는 줄 미쳐 몰랐던 모양이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를 직역해서 믿어야 한다면 신자들은 레스비안은 용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레스비안을 혐오하는 것은 비성서적이고 불신앙이다. 이렇게 문자적인 직역주의 믿음의 모순이 성서 전체에 수없이 많이 깔려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너희 가축 가운데서 서로 다른 종류끼리 교미시켜서는 안된다.”(레위기 19:19)는 레위기 금지법을 따른다면 현대 과학자들은 가축들을 개량하기 위해 낙농업 분야에서 놀라운 일들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인류사회의 식량문제는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의식이 끊이없이 진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의식이란, 동성애는 부족적이고 이분법적 종교체계의 낡음 믿은이 주장하듯이 “죄”가 아니며, 치료해야하는 질병도 아니다. 다만 동성애자들은 대다수 사람들과는 다른 성적본능을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며, 이것은 질병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21세기의 사회는 동성애라는 성적본능을 완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왼손잡이와 빨간 머리와 같이, 인간 가족 내의 다른 소수자 입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불안하게 되고 공포 속에 빠져들어가서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때로는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죄악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호소로 정당화될 때, 그 죄악은 악마적 차원으로 악화된다. 이것이 현재 종교 제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현주소이다. 성서문자근본주의 신자들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공포가 있다. 그 공포는 성서가 문자적으로 추행이라고 한 것을 허용하다면, 기독교인들의 차별화는 소멸될 것이고 성서의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은 붕괴될 것이며, 신자들의 정체성은 애매모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찬반의 싸움은 격렬해지고 최종적으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신자들은 패배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의 교회 기독교는 변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사멸할 것이다.
21세기의 압도적인 과학 및 의학 지식은 불가피한 결론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성적 본능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다. 성적 본능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에 대해 눈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도덕적 과오도 아니고 종교적 죄도 아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8장과 20장(“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13))에 기록된 동성애 혐오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무지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다. 그것들은 레위기 및 율법의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발달의 단계들로서, 우리는 이미 그 단계들을 넘어섰으며, 그 단계들 이상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폐기해버린 낡은 단계일 뿐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우리의 편견과 심지어는 우리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성서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신앙의 본질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정체성과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의 핵심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의미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가르친 조건없는 사랑은 공중에 떠도는 공허한 말이 된다. 이제 모든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동성애 혐오증적 편견을 고수할 것인지 결단해야 할 때가 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병립하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며 더욱이 불가능하다. 또한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따르든지 아니면 만들어진 예수의 편견을 고집할 것인지에 타협의 길은 없다.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나의 선택에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 나의 자율성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성서의 동성애 혐오 구절들이 기독교인의 행동 지침에 계속 악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당장 폐기처분해야 한다.
오늘날 파괴적인 동성애 혐오증을 옹호하는 교회는 우리의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편견과 혐오와 폭력으로 이룩된 교회는 절대로 예수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도 아니다. 100여년 전에 성서를 인용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하던 교회가 죽었듯이, 오늘 동성애 혐오와 여성차별과 인종차별과 종교차별과 빈부차별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는 교회도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 동성애 혐오와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구절을 인용하는 거짓과 위선을 교회와 우리의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