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앞서 보내시는 분 | 김희헌 | 2020-08-16

by 김희헌 posted Aug 16, 2020 Views 22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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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앞서 보내시는 분 (45:1~15, 11:1~2a, 29~32, 15:21-28)

2020.08.16. 성령강림절 열두 번째 주일

 

[새로운 시대를 향한 발걸음]

코로나 확진자 수가 최근 급증하여, 오늘부터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일예배를 순서 맡은 이를 중심으로 최소인원만 참석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2주 후에는 위기상황이 잦아들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감염병 위험이 가중된 시기일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교우와 이웃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힘내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새로운 예배당 건축과 선교 방향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주 만나서 의견을 나누어야 할 시기에 코로나 사태를 맞다 보니,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우들이 지혜롭게 대처해오면서 갈등의 기간을 이겨내고, 이제는 마음 모아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지난 주일에 가진 정기당회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몇 가지 내렸습니다. 그 가운데 세 가지를 교우들에게 말씀드리며,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첫째는 건축과 관련된 잠정예산안을 마련하였습니다. 현재 이전할 부지에서 철거를 비롯한 기초작업이 진행되어왔고, 이어서 설계를 포함하여 본격적인 신축작업이 있을 예정입니다. 따라서, 소요예산을 편성해서 작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건축예산은 그 밖에 필요한 사용처를 고려해야 하므로 편성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건축위원회에서 안을 만들었고, 지난 당회에서 추인하는 절차를 마쳤습니다. 이제 다음 주에 있을 목회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다음, 공동의회를 열어서 전체 교우들의 의견을 묻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미래선교연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앞으로의 선교 방향을 구체화하고, 그 선교사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금의 규모와 운용방안을 연구해서, 교우들에게 제안하는 기구입니다. 그동안 선교기금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계획성 있게 통합해 가야 할 때라고 봅니다. 당회에서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는 각종 기금항목을 만들어보니 십여 가지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사회-선교부에서 제안한 생명평화기금, 지난 719일 건축위원회 공청회에서 제안된 네 가지 선교(미디어, 청년, 페미니즘-퀴어, 평화통일 선교)에 필요한 기금, 목회자 사택 기금, 후속세대를 위한 교육기금, 예산의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금, 길목의 활동을 돕는 기금 등이 있습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각종 기금의 용처를 정리하여 교우들에게 제안하고, 나아가 교회 창립 70주년을 준비하는 작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향린동산 자산운영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수양관과 임야의 관리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각종 기금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수양관의 매각을 포함하여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와 같은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교우들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서로서로 돕는 일꾼이 되고, 교회 안에 대승적인 협력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겪었던 지난 진통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감당해온 전통을 새롭게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으로 이전하는 것은 단지 장소만 이전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가 새롭게 변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선교 방향이나 활동방식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진보적인 교회를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진보적 삶을 살아갈 방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한 번 진보라고 하여 영원한 진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흐르면 역사의 발걸음을 옮기는 주체도 변하고, 그들이 맡은 사명과 역할도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근의 사회현상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모습의 진보 운동이 존재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추구할 진보적 삶의 방향을 꿈꾸면서, 단순화의 우려가 있지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진보운동이라 할 수 있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투쟁이 있습니다. 이 운동은 민중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당파성에 입각한 진영논리로 인해, 자기주장을 극한까지 밀고 가며 불통의 모습을 띠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제거함으로써 승리를 맛본 근대적 주체가 자신의 창조적 힘을 잃어갈 때 보이는 퇴행 현상입니다.

두 번째는 탈근대주의 시대에 자라난 소수자 연대활동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이 점차 주류 담론으로 성장한 이유는 오늘날 진보적 관심사가 다양하게 분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지난 시대의 진보가 기득권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의 운동방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후속세대가 선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탈근대적인 방식의 연대는 개인의 취향으로 미끄러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닌 운동이라기보다는 묵시록적인 미래에 적응하는 방식은 아닌지 의심받곤 합니다.

세 번째는 대안을 만들어가는 창조적 생명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과 생태적 감수성이 커지면서 점차 가시화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대결 정치나 관념 종교의 편협성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행에는 사회 전체의 한계와 죄악이 결부되어 있음을 깨닫고, ‘공통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운동입니다.

이 세 가지의 운동은 각기 엄밀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서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적용된 삶의 영역에 따라서, 그 운동방식의 미덕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저는 신앙공동체가 진보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세 번째 방식의 운동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봅니다. 진보적인 신앙공동체는 저항과 연대의 영역에서 멀어지지 말되, 일차적인 관심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창조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서 안의 신앙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꿈의 사람이 해석한 삶의 여정 / 창세기 451~15]

창세기 본문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갈등하던 열두 형제들이 서로 화해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여러 민담을 모아 만든 설화집으로 알려집니다. 줄거리가 완성된 때는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한 시대로 추정합니다. 갈등하여 거대한 분열을 겪은 시대에 주는 교훈을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요셉에 관한 설화는 창세기 전체분량의 삼분지 일이나 됩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는 전환의 시대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거주하던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된 과정을 그리면서, 앞으로 있을 출애굽 해방공동체의 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창세기 37장은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공모하다가 결국 그를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범죄를 저지른 내용이고, 오늘 본문은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내용입니다. 그사이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이 파라오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경위, 꿈을 푸는 능력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고, 마침내 이집트 총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뤄진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다음에는 절대 권력자가 된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작가는 형제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극적으로 끌고 가다가, 마침내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 형제들과의 화해하는 장면을 다룹니다. 요셉은 자신을 인신매매한 형제들의 죄악을 들추어 복수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은 구원을 베풀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당한 역경의 겉모습은 형제들의 배신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 내용은 형제들보다 앞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고백하는 요셉, 그래서 실제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요셉은 삶에 대한 깊은 지혜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비추어서 바라보는 지혜입니다. 삶의 여정을 하나님의 계획과 연관하여 해석하는 지혜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존재하도록 뒷받침하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자, 자기를 살아가도록 이끄는 힘에 대한 동경을 말해줍니다. 자기 삶을 한없이 긍정하지만, 자기주장의 과잉도 없으며 이해관계의 이기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한 삶이 지닌 진정한 힘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맞은 위기, 예수가 얻은 구원 / 마태복음 1521-28]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수와 가나안 여인의 대화를 다룹니다. 이 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중심에 두고 읽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선택한 이 해석을 따르면, 이야기는 예수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 집요하게 매달린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모습에 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예수의 마음을 돌려서 구원받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을 중심에 두고 읽으면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가나안 여인이 가진 간절한 삶의 태도로 인해, 예수가 배타적인 정신에서 풀려나 구원받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교리적인 시각을 버리고 보면, 그것이 올바른 해석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 지역은 이방지역의 대명사입니다. 이때, 가나안 여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호소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와서 간청하자 마지못해 말합니다. 그것은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여인은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예수의 대답은 더 매몰찬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가 뱉은 이 차별과 냉대의 언어에 맞선 여인의 대답은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언어에 온기를 채운 것이었습니다. 간절함으로 가득 찬 생명의 언어였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딸의 고통을 자기 심장에 담은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는 회개합니다. ‘당신의 믿음이 참으로 크군요.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이 말이 있자, 바로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복음서에서 익숙한 장면이고, 이 이야기가 특이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의 변화입니다. 이방 여인을 향한 차별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대신 그의 믿음이 크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을 통해서 예수는 메시아로서 자격을 갖고 딸을 치유합니다. 새 삶을 얻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딸이라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예수 자신입니다. 그는 이방 여인을 통해서 새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마저도 물들었던 차별의식의 뿌리는 깊습니다. 하지만, 왜 차별의식이 생기는지를 들여다보면, 그 원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차별의식은 자기 폐쇄적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이유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든, 유색인종이 되었든, 성 소수자가 되었든, 누군가를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합리적 느낌의 근거는 친숙함이라고 말합니다. (윌리엄 제임스, “합리성의 감상”)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친숙한 것을 합리적이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을 맴도는 폐쇄적인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위기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이방 여인을 향해 경멸의 언어를 퍼부은 예수도 그런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경멸한 여인이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우리 시대의 위기 역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복음서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 / 로마서 111-2a, 29-32]

로마서 본문은 11장의 앞과 뒷부분을 조금씩 다루고 있는데, 이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담긴 측량할 수 없는 깊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지닌 넓이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삶을 관통하고 있는 신비한 비밀’(25)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입니다.

바울에게 실패한 삶이란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삶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패한 삶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29)

심지어 바울은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했던 자신의 앞선 고백(8:38-39)을 다시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1장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분으로부터(ἐξ, from) 나오고, 그분을 통해서(δι, through) 존재하며, 그분을 향하여(ες, towards) 있습니다.” 생명의 존재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이런 믿음은 오늘 우리 시대에 무슨 의미를 줄까요? 우리 시대의 특징을 설명하는 개념 가운데, ‘-진리’(Post-truth)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로써 자신을 다듬어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주장 자체를 진리로 여기는 경향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가짜뉴스를 양산하여 진실을 뒤집고, 어떤 이들은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자신의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옳다고 여깁니다. 이 모두가 스스로 볼모가 된 삶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 아마 그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거대한 생명의 관계를 깊이 인식하는 데서 시작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 충실히 존재하지만, 또한 동시에 자신을 너머서 들려오는 부름에 대해 깨어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세상 만물의 고통과 꿈을 당신의 품에 안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 속에서 우리를 앞서 보내시는 분이 있다는 믿음으로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시대의 고통과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선물과 부르심을 품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염려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이 말합니다. ‘이제는 걱정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통과 혼돈의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는 교우들과 이 땅의 자매 형제들에게,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