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대 | 김희헌 | 2020-10-25

by 김희헌 posted Oct 25, 2020 Views 22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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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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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시대 (34:1-12, 살전 2:1-8, 22:34-46)

2020.10.25.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 교회개혁주일

 

[종교개혁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가?]

10월 마지막 주일은 대부분 개신교회가 교회개혁주일로 기념하는 날입니다. 독일의 수도자 마틴 루터가 15171031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고 펼친 개혁 운동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여파로 정신구조가 변화하고, 기독교에는 새로운 교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개신교회는 이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을 강조하고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세의 가톨릭은 부패하고 낡았지만, 근대를 이끈 개신교회는 민주적이고 평등하다는 평가가 생겨난 것입니다. 다분히 아전인수적인 개신교 이데올로기라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는 더 성찰적인 질문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렇게 묻는 이유는 근대 유럽 사회를 이끈 개신교 정신 자체가 이제는 근본적인 한계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한 역사학자(John A. Bossy)는 종교개혁운동에 부여된 그동안의 일반적 평가를 뒤집은 바 있습니다. 그는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의 권력 남용과 부패에 맞서 저항했다는 항간의 해석에 대해서,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라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개신교가 새롭게 대두하던 근대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변질된 부산물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다고 혹평합니다. (S. 오즈맹, <프로테스탄티즘: 혁명의 태동>, 84)

5년 전에 서거한 이 역사학자의 목소리는 오늘날 더욱 진지하게 들립니다. 그 이유는, 오백 년을 달려온 개신교회가 이미 한 세기 전부터 근본주의 신학의 반동적 흐름에 압도당하며, 많은 개신교회가 개혁성을 잃고 시대착오적인 목소리를 내는 현실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서구 근대문명을 인류의 미래로 삼고 달려온 그간의 역사적 행보가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앞에서 거의 좌초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유럽의 정신문명을 이끈 개신교 신학을 냉철하게 되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흔히 종교개혁 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말할 때 언급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삶이나 사상,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새로운 교리와 관습 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종교개혁운동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제가 관심하는 것은 그런 운동을 가능케 한 민중적인 지평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새롭게 일고 있는 개혁 정신을 호흡하며 함께 성장한 사람들, 그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합니다.

이런 생각은 종교개혁 시대를 연구한 역사학자 루시앙 페브르의 도움을 받고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중세 말기에 기존교회의 존립을 위협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성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부도덕성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도전을 따라 프로테스탄트로 불리는 새로운 성격의 집단이 출현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테스탄티즘을 호흡할 새로운 유형의 신앙인들이 등장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현실화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이 구비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들에 도전했으며,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진실과 양심을 짓밟는 율법적 질서를 거부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들이 아직 역사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던 때에 활동한 체코의 후스는 면죄부 판매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지만, 1세기가 흘러서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 완전히 등장했을 때 동일한 주장을 한 루터의 경우, 교황의 칙서를 불태우며 저항하면서도 제후들의 지지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차이가 바로, 종교개혁운동을 가능케 한 민중적 지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변화로 보면, 종교개혁운동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개혁 운동이 독일과 스위스의 자유도시에서 먼저 일어났고, 얼마 가지 않아서 당시 65개 정도 있었던 유럽의 도시 대부분으로 번졌습니다. 운동의 성공 정도와 지속기간은 서로 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초기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던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16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갔고, 운동의 초창기에는 거의 유럽의 절반에 이르렀던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17세기 중엽에는 5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형성된 개신교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역량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개혁주의 정신은 칼빈주의라는 편협함과 불관용의 배타성으로 굳어져 갔고, 루터주의는 기존 국가 질서의 요소로 다시 자리 잡으며 결국 그 질서의 대변인이 되어갔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개신교의 저항정신은 구호로만 남았고, 전체 사회의 변혁은 교회 밖에서 주도되었습니다. 20세기에는 개신교회 절반이 근본주의 신학에 잠식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구호뿐인 교회개혁론과는 다른 유효한 가치가 과연 남아 있는 것인가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회가 맞은 위기는 매우 근본적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 위기는 교회만의 위기는 아닙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점차 실감해가고 있는 생태위기와 기후위기 앞에서, 과거의 생활양식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방식이 불능에 빠졌다는 말은, 구체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구체제에 맞서 싸워온 진보 운동 역시 한계를 맞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전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전환시대의 사회를 위해, 그리고 교회의 미래를 위해, 만일 오백 년 전 종교개혁운동이 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새로운 운동을 일으킨 사실에서 찾고자 합니다. 종교개혁운동의 의미는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수많은 개신교 교파의 제도나 신학에 있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의 의미는 낡은 사회질서를 뚫고 자라난 운동적 사태 자체에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로 존재함으로써 역사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미래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답게 존재하고, 교회답게 살아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온 바의 성서전통이 만일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절망의 현실 속에도 우리 안에 오래된 미래를 씨앗처럼 심겨두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찾고 길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 후에는 임시공동의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작은 전환점을 만드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결정을 성숙한 방식으로 만들어가길 바라며, 오늘 성서의 세 본문이 주는 가르침을 간추려보겠습니다.

 

[전환시대의 우선적 관심 / 신명기 341-12]

오늘 신명기 34장의 본문은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세대교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인물만 교체된 것이 아니라 세대교체를 의미합니다. 광야세대에서 가나안 세대로, 해방을 위해 사막의 거친 세계로 탈출을 감행한 세대에서 풍요와 욕망 속에서 해방의 정신을 지켜야 하는 세대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해방을 찾아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어도 광야세대에게는 약속의 땅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그 이유를 므리바에서 물을 구할 때 하나님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0:12) 원망과 불평으로 실패를 거듭하며 해방의 주체로 도약하지 못한 광야세대의 한계였습니다. 그들과 함께한 모세도 같은 이유로 (32:51)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모압 땅에서 죽어 골짜기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잊혀졌습니다.

세대교체에 관한 오늘의 본문 가운데 9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이 묘사는 세대교체 과정에서 중심장면으로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전환의 시대에 성서가 주목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전환의 시대에도 과거는 무조건 단절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사람들 마음에 생생하게 남아, 백스무 살에 죽을 때까지 눈빛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며, 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는 나지 않았다고 성서는 평가합니다. 그러나 전환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대에게 성스러운 경험이 이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후속 세대에게 지혜의 영이 넘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전환시대를 살아가는 교회가 우선 관심해야 할 것은 새 세대가 자라날 수 있는 구조, 거룩한 영이 전달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공동체일수록 이 과제에 유념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냉수마찰만을 요구하지 말고, 따뜻한 인간을 길러내야 합니다. 두터운 믿음과 사랑으로 구성된 인간을 품고 길러내는 것이 신앙공동체의 사명이자, 인류의 가장 오랜 과제입니다.

 

[이어가야 할 중요한 계명 / 마태복음 22-34-46]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의 갈등상황에서 벌어진 논쟁입니다. 지난주 본문이 황제에게 바칠 세금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면, 오늘 주제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것입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μεγάλη, greatest)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이 율법과 예언의 모든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본문은 조금 단절된 내용을 가진 두 번째 대화로 넘어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를 묻는 예수의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바리새인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시편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44절에 대한 해석이 난해하지만 45절 내용을 미루어볼 때, 그것은 메시아의 시대 초월적 우선성에 관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시차로 볼 때는 그리스도보다 다윗이 앞섭니다. 바리새인은 이런 상식적 세계관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관심했던 것은, 고백이나 의미로 볼 때 앞선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우선적 가치를 가진 존재에 관한 관심입니다.

본문의 전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이 기록된 마태복음의 시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는 대로마 항쟁으로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는 폐허가 된 상황입니다. 성전국가로 유지되던 구체제는 파멸했고, 새로운 사회적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제1성서의 경전을 정비하고, 율법을 재해석하던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리새인은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으며, 예수는 바리새인에게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 있는 존재가 누구냐를 묻고 있습니다. 전환시대의 갈증이 깊이 밴 물음입니다.

시대가 전환할 때 생기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가치를 중시하는 집단일수록 커다란 갈증을 느끼며,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는 점입니다. 가치보다 질서를 중시하는 집단에는 갈등이 크게 일지 않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향린 공동체에 속한 여러 교회가 내홍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처음에는 도대체 왜 이토록 격렬한 갈등이 벌어질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더 넓게 그려보니, 위기의 전환시대를 거쳐 가는 현상일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미래를 어떻게 열 것이냐?’ 하고 서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지요.

어떤 이는 근대의 저항적 주체로서 공동체의 나태를 타파하려 하고, 어떤 이는 탈근대의 해체적 주체로서 집단이 주는 피로감으로부터 탈주하려 하고, 어떤 이는 공동체적 환경을 재건하는 생태적 주체로서 격랑 속에서도 화해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저마다 기질과 생각이 다르기에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비바람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더욱 또렷하게 빛나야 할 것입니다. 갈등의 끝이 지리멸렬로 흐르지 않도록 서로 조심할 일입니다.

마태 공동체는 격랑의 전환시대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경천애인으로 기억하였습니다. 율법이 수백 가지가 있어도, ‘경천애인의 가르침 하나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의 모든 종교와 인간 정신이 마지막까지 밀고 가며 지키려는 정신입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 / 데살로니카전서 21-8]

데살로니카전서는 제2성서 최초의 문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반대 속에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고, 복음을 전할 때 온전함(integrity)을 잃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를 피하였고 (3), ‘사람의 환심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했으며 (4), ‘아첨하거나 구실을 꾸며 탐욕을 부리지 않고’ (5),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증언을 얻고자 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삶의 특징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7절은 두 가지 이름을 붙입니다. 그는 사도’(apostles)이자 어머니’(nursing mother)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이지만 권위를 주장하기보다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한 동역자들을 모두 사도들’(ἀπόστολοι, apostles)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이렇게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사도로 부르는 것은 복음서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름 붙인 것보다 20년에서 40년 앞선 일입니다. 바울이 이해한 아포스톨로스’, 사도(使徒)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과 돌봄으로 권위를 갖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사도라고 부른 바울의 사상이 종교개혁의 정신과 이어지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평등성이 강조된 만인사제설이 아니라, 직분의 권위보다는 헌신으로써 사건을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에 관한 관심입니다.

알랭 바디우라는 정치철학자는 바울의 이 사도 담론을 예로 들어, 신자유주의 시대를 돌파해나갈 해방 사상의 모델로 그려냅니다. 그는 바울의 사도담론이 당시의 지배 담론이었던 유대의 기적담론이나 그리스의 철학담론에 맞선 전략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사도담론을 통해서 노린 것은 사건의 은총에 의존한 채 전대미문의 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A. Badiou, <사도바울>, 90) 종교개혁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오늘의 신앙공동체에도 필요한 믿음이라고 봅니다.

전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큰 물결이 이는 바다와 같은 세계를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의 세 본문에서 전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지혜의 영을 얻어 거룩한 경험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며, 갈등의 상황 속에서도 경천애인의 기본정신을 잃지 않으며, 어머니와 같은 돌봄으로 사도의 직분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래가 아무리 불투명하여도,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새 세계를 목말라 하는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가르침을 품고 살아갑시다. 지혜의 영을 가진 새 세대를 길러내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의 좌표를 잃지 않으며, 사랑과 돌봄으로써 공동체를 세우는 사도가 되어, 존재함으로써 역사에 선물이 되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