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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생태적 전환 | 김희헌 | 2020-11-29

by 김희헌 posted Nov 29, 2020 Views 17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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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11-29

 생태적 전환 (64:1-9, 고전 1:3-9, 13:24-37)

2020.11.29. 대림절 첫째 주일

 

[대림절의 믿음, 생태적 전환을 통한 예수 맞이]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자기 비움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그 빈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자 합니다. 지나간 삶의 고통에서 생긴 상처와 분노, 외로움과 두려움, 그것이 빚어내는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고, 그리스도의 품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올해 대림절에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연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큰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대면의 시기가 길어질수록 위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이 커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는 비대면 예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지나가면서, 인류는 각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생태문명회의라는 모임이 환경재단에서 있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학자들이 온라인으로 모여서, ‘전환을 위한 사고와 행동이라는 주제로 온종일 논의하였습니다. 저도 글을 발표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생태문명회의라는 움직임의 저변에 깔린 코로나 시대의 근본 문제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참여한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박사는 코로나 사태와 이후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인류가 초래한 긴급한 생태적/사회적 위기에 대한 지구(Gaia)의 생물학적 반응이다. 이 위기는 생태학적 불균형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그 결과는 극대화되었다. 앞으로의 사회정의는 좌와 우의 대립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일은 예전에 맞았던 사회적위기와는 달리 지구적차원의 재앙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와 함께 경험한 기후위기는 단지 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문명 자체에 대한 변화를 암시합니다. 우리 모두 점차 실감해가는 그 근본적인 전환은, 경제활동의 방식만이 아니라, 사회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문화와 종교까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이 시작되는 이번 대림절에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화두를 던져봅니다. 그것은 시대적 요청이자,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교회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공동체의 생태적 전환은 생활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뿌리 내릴 때, 신앙공동체의 기둥을 이루는 예배와 교육, 선교와 친교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 목회실 수련회에서 이 생태적 전환이라는 문제를 깊이 논의했습니다. 교우들께서도 이 화두가 우리 공동체에 스며들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먼저, 대림절을 여는 주일예배를 통해서, 생태적 전환을 위한 오늘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맞을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 이사야 641~9]

1성서 이사야서의 본문은 혼돈과 폐허의 땅에서 주님이 오시기를 갈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제3이사야로 불리게 된 한 이름 없는 예언자의 목소리는 담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그후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신앙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61장에 나오는 그의 예언은 예수의 <취임설교>가 되었고 (4:18-19), 65장에서 밝힌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비전은 제2성서를 관통하는 핵심사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웅대한 꿈은 놀랍게도 혼돈과 절망의 시대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는 돌아왔지만, 황무지와 같은 폐허의 시기였습니다. 앞이 캄캄해서 사람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졌으며, 꿈을 꿀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생명의 길을 분별하는 지혜와 다시 믿음의 고백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참회의 토대를 놓습니다. 절망과 혼돈의 세계에서 필요한 믿음은 분별과 참회입니다.

먼저 그는 주님을 향한 발걸음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5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이사야는 믿음이 시작되는 지점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의 길을 따르는 사람, 주를 기억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통의 현실에서 모두 쓰러졌습니다. 이사야는 그 비통한 실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참회입니다. 그는 남을 탓하지도 환경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꾸며 내세우기보다는, 자기 존재의 심연에 가로놓인 뼈아픈 실패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소멸뿐인가, 그들에게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지요. 신앙의 신비는 참회의 역설적인 모습에 담겨있습니다. 진실한 참회는 정직한 희망을 품어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희망은 실패의 심연에서 솟아납니다. 그가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삶에 관한 분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1성서에서는 없었던 제3이사야만의 독특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8절에 나오는 야훼 아비누’(Yah·weh ’ā·ḇî·nū), ‘주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입니다 (63:16, 64:8).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야훼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제1성서에서 낯선 일입니다. 시기적으로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시편에 한두 번 나올 뿐 (시편 68:5, 89:26), 3이사야 이전에는 없었던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그가 본 희망은 하나님과 연결된 삶에 관한 통찰에 있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신이 저 천상의 폭군처럼 두려운 존재였다면,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가장 깊이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악의 폭풍 속에서도,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 고백에서 모든 믿음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환난이 지난 뒤에 / 마가복음 1324-37]

대림절 첫째 주일의 복음서 본문은 마가복음 13장에 삽입된 작은 묵시록입니다. 묵시록은 우주적인 대파국을 전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알립니다. 역사가 파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상징적인 방식으로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최초의 독자들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완전히 파멸한 시기의 사람들입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성전은 무너지고 마지막 영웅마저 죽었으니, 꿈과 희망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을 때입니다.

이런 시대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가는 이백 년 전 다니엘서가 써졌을 때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느꼈던 같습니다.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때 기록된 다니엘서는 파멸의 시대를 견딜 꿈을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영광에 싸여 온다.’는 희망이었습니다 (7:13-14). 마가는 다니엘서의 그 꿈을 이어받아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들은 깊은 절망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절망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이렇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이 고난을 받으며, 부모형제가 서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도 세상의 끝이 아니라, 단지 환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면서 나오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이 지난 뒤에’(after that suffering)라는 말입니다. 환란이 지난 후에는 두 사태가 잇따릅니다. 먼저, 환란의 상처가 남긴 절망이 더 깊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24-25)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희망이 솟아납니다.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라는 믿음이 되살아납니다. 이것이 유대전쟁의 여파로 모든 것을 잃은 절망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마가의 약속이었고, 마가의 공동체가 붙든 희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약속과 희망이 어떻게 환난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가는 무화과나무를 예로 든 예수의 교훈을 전합니다. 그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자의 때가 오는 징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를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28-29)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오는 때는 언제인가?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아나는 때, 생명이 다시 움트는 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일에 관심을 잃었습니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가지가 연해지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뒤틀린 질서에 물든 정신은 이제 역사에는 싱싱한 푸른 잎이 돋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르며, 심지어 천사도, 인자도 모른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성서는 그 시간을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생명이 일어서는 그때,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될 그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은 오직 깨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마가는 봤습니다. 그래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깨어 있어라!’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 고린도전서 13-9]

서신서의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로서, 내용은 공동체에 대한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사분오열되어 있었습니다(14).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격려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도록 이끄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앙공동체가 지닌 풍요로운 재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5절에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언변과 지식다시 말해서, 당시 헬레니즘 문명이 숭상하는 로고스(logos)와 그노시스(gnosis)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두 번째는 6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튼튼한 증언’(martyrion), 여기서 증언은 자기 몸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7절에 나오는 세 번째는 요소는 부족함이 없는 은사(charisma)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지식, 튼튼한 증언, 부족함이 없는 은사, 이 모든 정신적 무기를 가진 고린도의 공동체는 무엇을 향해야 했을까요? 하지만, 이 공동체는 자신들의 영적인 풍요로움 때문인지, 도리어 갈등과 분열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 본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갈등을 넘어서라고 하는 바울의 권면입니다. 바울의 이 권면은 윤리적인 타이름이 아니라, 믿음의 피력입니다. 그것이 8-9절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

바울의 이 말씀이 대림절을 보낼 우리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시대의 고통과 위기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의 시간에 튼튼히 설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시대의 고통과 절망이 여전히 깊지만, 생태적인 전환을 통해서 푸른 잎을 내기 위해 애쓰는 모두에게 대림절의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절망의 시대에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바로 이 고백에서 모든 믿음의 꿈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위기의 시대를 생태적 전환을 통해서 이겨내려는 이 땅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림절의 은총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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