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다리는 것 (사 40:1-11, 벧후 3:8-15a, 막 1:1-8)
2020.12.06. 대림절 둘째 주일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를 이어가는 지금은 어두운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예배당에 켠 희망과 기쁨의 촛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무겁기만 합니다. 겹겹이 쌓여온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익숙했던 일상은 사라졌고, 여전히 갈 길이 잘 보이지 않은 이 현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 안에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인생을 살아가며 기쁨을 누리는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종교가 선택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최근 가톨릭교회가 선택한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선출되고 나서, 발표한 첫 번째 공식 문서의 제목은 <복음의 기쁨, Evangelii Gaudium>입니다 (2013년 11월).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의 마음과 삶에는 복음의 기쁨이 가득하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교회는 이 ‘복음의 기쁨’을 잃어왔습니다.
이 문서는 그 근본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복음이 소비주의의 욕망에 잠식되어서, 이웃이 겪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대신, 추구해야 할 진정한 기쁨은 고통을 당하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톨릭교회가 오랜 시간 동안 외면해온 해방신학의 전통을 강조합니다. 이런 흐름은 민중신학과 사회선교 전통을 강하게 가진 우리 교회에는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회복하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해서는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삶의 내면적 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4세기에 로마 황제의 공인을 받은 종교가 되자, 한편의 신앙공동체는 세상과 절연한 채 사막으로 들어가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들의 고독한 영성을 연구한 토마스 머튼은, 이 사막의 교부들을 가리켜 소극적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창조적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국가가 보장하는 풍요로운 환경과 인습적인 질서 너머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속세를 떠나 바위와 모래 속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던 이유는 자신을 먼저 구함으로써 세상의 구원을 돕고자 하는, 이른바 종교 ‘최후의 목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T. Merton, The Wisdom of Desert: Sayings from the Desert of the Fourth Century, 23)
토마스 머튼이 강조한 이 사실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을 보여줍니다. 종교의 길은 외부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안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세상을 밝히는 것과 내면을 밝히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하는 일과 세상을 벗어나는 일이 서로 적절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할 때 종교적 삶이 건강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우치지 않은 ‘신앙의 리듬’과 ‘믿음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방편으로 종교를 도구화하거나, 그것과는 반대로,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종교를 자기 취향으로 삼을 때, 종교는 이미 어두워졌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교는 욕망의 도구가 되거나, 취향의 포로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가 ‘종교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생의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 흐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물질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게 만드는 제도와 질서를 ‘문명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명의 본질적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이 무뎌졌고, 인간의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사실에 관한 감각이 둔해졌습니다. 그 결과, 쾌락의 농도는 짙어졌지만, 삶의 기쁨은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대림절에 우리가 생각해 볼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기쁨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것에 관한 기다림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바로 그런 ‘기다림’에 대해 말합니다. 세 본문의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그 시대가 갈구한 기다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전해줍니다.
[이사야의 기다림 / 이사야서 40장 1~11절]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 나오는 예언을 전하는 이름 없는 예언자를 가리켜서 통상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는 포로기가 끝나갈 무렵인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활동했는데, 성경의 정신사적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을 분기점으로 하여, 성서의 정신적 상부구조가 일대 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단지 폭력의 대결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으로 재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편협한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광대한 우주창조의 시야에서 재해석합니다. 그런 재해석은 포로기라는 절망과 고통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얻은 체험적 지혜였습니다. 고난의 세월을 지나왔지만, 그의 언어에는 절망의 기미가 없고, 그의 신탁은 마치 아름다운 시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 40장은 그 이전에 나오는 신탁의 내용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1장부터 39장을 기록한 제1이사야와는 다른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1이사야가 살았던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앗시리아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 유다마저 점령한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힘을 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약탈하는 일에 권력을 활용했고, 종교는 경건을 가장하여 허례허식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1이사야가 외치는 신탁은 파멸을 경고하는 심판의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로부터 약 이백 년 가까이 흐른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나라는 이미 오래전 패망하였고, 포로로 끌려온 지도 벌써 한 세대가 넘었습니다. 어떤 희망도, 미래에 대한 어떤 기다림도 존재하지 않은 암울한 때였습니다. 이런 암흑의 시대를 살던 제2이사야에게는 무슨 기다림이 가능했을까요, 희망을 잃은 시대에 어떤 말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전한 복음은 파멸의 경고가 아니라 회복의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악에 대한 참회를 요구하지 않고, 구원의 기쁨을 전합니다.
그는 말문을 열자마자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았다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이 말을 들은 포로민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깊은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현실은 끝도 없는 수탈로 이어진 노역 생활입니다. 하지만, 어두워진 맘에 다시 등불을 밝히고, 임마누엘의 믿음을 회복하자고 외치는 예언의 북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하던 그들이 진실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광야에 주님이 오실 길을 닦고, 사막에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내는 일’이었습니다. 암흑과 같은 그들의 삶에 다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실의 엄혹함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들의 헛된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둠 덮인 현실에서 가장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본질적 사실에 집중하려는 믿음의 지혜입니다.
그것이 6절과 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는 외쳐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여기서 제2이사야는 인간의 육체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합니다. 그런데, 육체를 마르고 시든 풀과 꽃에 비유한 것은 단지 인간의 ‘유한성’(mortality)에 관한 사색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바라고 기다릴 것은 마르고 시든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바로 그것이 제2이사야가 기다려온 믿음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꿈꾸는 바로 그 자리가 임마누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곳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포로 생활에서 외친 그의 목소리는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바로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하고 말하여라.”
9절의 이 외침은 믿음이 겨냥하고 있는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너희 하나님이 계신다’(hin·nêh ĕ·lō·hê·ḵem)고 선언한 예언자의 목소리는 그 이후 신앙이 이어지는 모든 곳에서 울립니다.
[세례요한의 기다림 / 마가복음 1장 1~8절]
첫 번째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는 제2이사야의 목소리를 이어가면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그의 시대 또한 제2이사야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로마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성전은 무너지고 삶의 터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명령을 따라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불안한 시대에 끝도 보이지 않는 망국의 길이 앞에 놓인 것입니다.
이때 마가는 무슨 내용으로 그 시대를 향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제2이사야의 예언을 세례요한의 목소리로 되살려 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3절)
이 이사야의 예언은 광야에서 활동한 세례요한의 삶을 통해서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위태롭지만 또한 진리의 장소인 광야, 거기에서 요한은 ‘회개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창조의 공간을 열어갑니다. 요한은 마치 전설적인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으로 (왕하 1:8), 광야에서 아주 단순한 삶을 살면서도 매우 비범한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념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걸 만큼 강하고 비타협적이었지만, 또한 자신을 바닥까지 낮출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소리였고, 그 소리의 핵심내용은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 기다린 것은, 민중들의 상처가 거룩한 영으로 씻어지는 그리스도의 시대였습니다. 예수는 요한의 이 간절한 기다림을 타고 등장합니다. 어지럽던 시대에 길을 찾던 예수는 당시의 어떠한 사회적 흐름에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젤롯당의 혁명운동에도, 에세네파의 은둔생활에도, 바리새인의 경건 활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동조한 것은 요한을 통해 이어진 예언운동의 명맥이었습니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가 옥에 갇히자 자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합니다. 요한의 간절한 기다림이 내놓은 길을 타고 예수의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쏟아진 사람들의 관심을 ‘뒤에 오실 분’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자신은 오실 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낮춥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사로잡지 않고, 낙심한 그 사람들이 더 나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신앙공동체에게도 교훈이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증거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이 나아가야 할 곳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마가는 세례요한의 이 ‘기다림’에 주목하면서 복음서를 펼쳐갑니다.
[기다림의 신학 / 베드로후서 3장 8~15a절]
그런데, ‘기다림’이란 그 시효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것을 위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길까요? 시간으로 환산된 가치에 익숙한 우리 시대는, 시간의 길이로 대체될 수 없는 고귀한 약속에 관한 감각을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후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서 쓴 후대의 편지로 알려집니다. 그 시기는 2세기 초엽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시간이 약 백 년가량 흘렀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다림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앞에 나온 물음에 관한 대답입니다. 4절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이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퍼붓는 조롱 섞인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저자는 시편의 시를 인용하여 말문을 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여기서 인용한 시편 90편 4절의 시는, 주님이 오시는 때가 늦어진 이유를 둘러대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9절)
이렇게 역사의 시간을 ‘하나님의 기다림’으로 이해하면,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허송세월하면서 오지 않는 미래를 불신하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그 ‘주님의 날’(hēmera Kyriou)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온다고 말합니다. 낡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을 모두 불태우고 마침내 땅에 있는 모든 일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의 실체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기다림의 신학’을 분명하게 듣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시간은 하늘의 대답이 없는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워지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정의로운 주의 날’을 기다린다면, 그 기다림의 시간에 ‘진실하고 평화롭게’ 하나님 앞에 서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기다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기독교적 실존의 ‘가장 비밀스러운 핵심’(mysterious cor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헛된 낭비가 아니라, 삶의 핵심에 곧장 다가서고자 하는 적극적인 지혜입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근원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입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가능성의 감각에 의존하여 펼치는 모험이며, 꿈꾸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로 이 기다림에서 진정한 기쁨 또한 솟아날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에 하늘의 기쁨이 담기는 대림절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믿음의 사람은 기다림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또한 주님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시간은 믿음의 시간입니다. 이 믿음의 시간에, 고통과 시름에 잠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대림절의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의 기다림을 멈추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