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밖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 ㅣ 김정원 ㅣ 2020년 12월 27일

by 나비정원 posted Dec 27, 2020 Views 28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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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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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밖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

이사야서 61:10~62:3, 갈라디아서 4:4~7, 누가복음서 2:22~40

 

지난 3년간 몇 차례 이 자리에 서 온 바 있지만, 부임 후는 처음이라 새로운 떨림과 설렘을 가지고 교우들 앞에 섰습니다. 우리 보고싶은 교우들~ 잘 계시지요? 저 브라운관 넘어, 작은 핸드폰 넘어, 모든 디지털 공간 너머에서 지금,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예배와 함께 계시는 교우들의 평안을 빕니다. 그리고 참 버거웠던 한 해를 살아내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어느새 2020년 마지막 주의 날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오늘 이야기에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소개할 인물은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아주- 오랫동안 구원자를 기다려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오늘 이야기의 현장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에 따라, 아기가 태어난 지 40일이 되자, 정결예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10키로 정도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마리아는 만삭의 몸으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가 근 100키로를 이동하였고, 찬 구유 바닥에서 아이를 낳은 뒤였습니다. 가난한 부부가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겼을 리 만무합니다. “아휴, 대관절 율법이 무엇이관데그런 그들이 40일된 핏덩이를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이미 아주 고단한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행색이 초라한 그들 앞에 시므온이 나타납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의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신실하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위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요? 팍스로마나 아래 고통받던 민족일 수도 있고, 사회문화적 자원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하던 민중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의롭다고 표현된 그가 개인의 구원만을 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불의를 물리치고 해방을 선포할 메시아를 그는 그의 전생을 걸고 기다렸습니다. 그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헛된 망상에 빠졌다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그와 함께 기다렸던 사람들 역시 기다림에 지쳐 그의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 시작된 이 역사가 구원자로 인해 정의의 하나님 나라로 완성된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고단하고 가난한 두 부부의 품에 안겨 있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두 팔로 안아 들고는, 찬양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제 이 종이 평안히 세상을 떠나가게 하여 주소서.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빛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영광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시므온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그림1) Rembrandt, Simeon and Anna Recognise the Lord in Jesus, 1669

사진1.jpg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인, “시므온과 아기예수입니다. 조심스럽게 예수를 안아들고 있는 그림 속 시므온은 백발에 깊은 주름의 노인입니다. 메시야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어떠해 보이나요? 시력을 상실한 것 같기도 한 그의 두 눈 속에 고뇌가 담겨 있는 듯도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도 같습니다. 살짝 열린 그의 입술에서는 벅찬 감탄이 터져 나오는듯 합니다.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렘브란트는 시므온의 늙은 얼굴과 예수의 얼굴을 중심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그림을 한 번 보실까요?

 

(그림2) Rembrandt, presentation-of-christ-in-the-temple, 1631

사진2.jpg

 

 이 그림 역시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아기예수의 정결예식인데, 여기에 나오는 노인은 한 손으로 번쩍 예수를 안고 있습니다. 꽤 건장해 보이는 노인이 바로 시므온입니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의 렘브란트의 나이가 이십대 중반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였을까요? 젊은 렘브란트가 그린 작품 속에서는 노년에 죽을 힘으로 간절한 기다림을 품고 살던 시므온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렘브란트의 말년은 그야말로 고독하였습니다. 두 명의 부인을 잃었고, 여섯 명의 자녀 중 다섯 명의 자식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경제적으로는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절망과 고통 그 자체였던 그는 암스테르담의 빈민가에서 시므온과 아기예수그림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고독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처음에 보여드린 그림 속 노인의 얼굴에 렘브란트는 자신의 처지를 투사해 그렸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그가 간절히 기다렸던 것은 아기예수, 희망이었나 봅니다. 그림 그릴 붓 하나 살 돈이 없었던 렘브란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닿길 원했던 희망, 시므온의 이야기 속에서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누가복음의 저자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보다 깊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마리아의 입을 통해 예수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실 분.(1:53)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는 예수님의 취임 설교를 담고 있는데, 그 설교는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사야는 거론하지 않았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4:18)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밖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7:22),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6:20),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6:21) , 가난한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의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 심리적 가난이 아닌 물질적, 경제적 빈곤이며, 육체적 굶주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볼까요? 7장을 살펴보면,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 환자, 귀먹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부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가 관심을 가졌던 또 하나의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 보다 더 자주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집돼서 소개되고 있는데요. 비교적 긍정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역할 역시 중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렙다 과부, 나인성 과부 등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굶주렸을 한 무리, 과부에 대한 이야기도 누가의 글에서만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중근동 지역이 당시 여성혐오적 가부장제 아래 있음을 고려할 때, 남편을 잃은 여성이 얼마나 가난했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잠깐 과부 이야기가 나와서 여담을 하자면, 제가 대학원 시절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이후로 어머니께서 가끔 딸인 제가 당신께 냉정하게 대할 때면 투정을 부리며, “난 과부야~ 네가 과부의 마음을 아니? 너 과부한테 그러면 못쓴다~, 라고 하셨는데요, 그때마다 제가 했던 말이 엄마, 누가복음을 읽어봐. 예수님이 과부를 젤 사랑해. 외로워마~ 내게 서운한 마음,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받길 바라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르네요.

 

, 그 과부이야기. 오늘 본문 역시도 또 다른 과부가 등장하는데, 그 여성의 이름은 안나입니다. 누가는 안나라는 여성 예언자가 예루살렘에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안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안나 역시 시므온처럼 인생 전반을 다해, 그의 인생의 거의 마지막까지 구원자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살던 시간은 고작 7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84세가 될 때까지 성전에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던 인물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을, 그리고 남성들 사이에서 굴하지 않고 예언자적 소명을 지켰던 그녀의 인생은 어떠했을까요? 퍽 고단했을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기쁨으로 충만해진 그는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가서 아기예수의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여든을 넘길 때까지 성전을 지키며 메시아 오심을 기다린 그녀의 모습은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요.

 

 

(그림3) Remrandt, The Prophetess Anna, 1631

 사진3.gif

 

이 그림 역시 렘브란트의 작품인데요. 좀 전 그림에서 시므온의 얼굴을 조명했다면, 이번에는 안나의 얼굴이 아닌, 안나의 손과 성서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의 또렷한 빛이 그녀의 뒤에서 손과 성서를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저 빛은, 혹 오래전부터 예언되었던 구원자를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생의 끝자락까지 희망을 기다리던 그녀를 위로하는 한 줄기 따스함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녀가 읽고 있는 구절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안나가 읽었던 부분이, 우리가 오늘 같이 읽었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아니었을까요? 땅이 싹을 내듯, 동산이 생명들을 움트게 하듯, 주 하나님께서도 모든 나라에 정의와 노래를 샘솟게 할 것이다!”

 

분명 안나는 로마제국의 폭압 아래에서도, 개인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예언들을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생의 끝자락까지 시므온이 기다렸던, 예언자 안나가 기다렸던 그 희망이 무엇인지를 일러줍니다.

 

바울의 살던 때에는 유대주의자들 혹은 바리새파들이 만들어 내는 순혈주의적 분리주의로 많은 갈등이 많았습니다. 절기를 준수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그들의 종교 운동은 빈곤계층의 노동자들이나 노예를 배제하고, 여성 또한 공동체의 부적절한 일원으로 간주하였습니다. , 순혈주의자들로 인해 경계가 만들어지니, 자연스럽게 경계 밖의 불순한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개종자, 노예, 여성, 하층민이 함께 밥을 나누는 식탁공동체를 교회라고 외치던 바울은(김진호), 경계 밖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이렇게 풀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저들이 강요하는 율법 아래 늘 죄인으로 살았지요?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자유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지요? 이젠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우리의 역사 속으로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을 자유인이 되게 하려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더는 노예도, 종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며, 하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유대주의자들이 만든 위와 아래를 전복시키는 소리요, 경계 밖을 서성이던 이들을 경계 안으로 끌어오는 소리요, 새날의 소리이자, 희망의 소리였습니다.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우리도 시므온만큼, 안나 만큼, 마음을 더 굳세게 먹고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언제가 아니라 기다림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후, 구원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안나가 기쁜 소식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구원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향린 교우 여러분, 분명 희망이 옵니다. 불의한 권력이 무너지고, 불평등이 사라지고, 재벌이 개혁되며, 농민이 부자가 되고, 여성이 권한을 가지며,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고, 소수자가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며, 어린아이가 밤거리를 뛰놀며, 온 피조세계가 회복되는 그러한 날, 경계 밖으로, 밖으로 내몰려진 생명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반드시 옵니다.

 

자본주의와 문명과 권력이 만든 비참한 현실 속에서 가슴이 답답해질 땐, 하늘과 땅의 조화를 보며 서로를 위로합시다. 잎들이 다 떨어진 뒤에서야 꽃눈을 맺는 목련 속에서 희망을 봅시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하이얀 목련이 움트듯, 희망의 새해가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주님!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봅니다. 우리가 희망을 봅니다. 경계 밖의 모든 이들이여-

함께 기다립시다! 함께 희망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