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축복 | 김희헌 | 2021-01-03

by 김희헌 posted Jan 03, 2021 Views 30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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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축복 (31:7-14, 1:3-14, 1:10-18)

2021.01.03. 새해주일

 

새해가 밝았습니다. 코로나로 위태로웠던 지난해 삶을 꾸려오시느라 모두 수고 많으셨지요? 교회를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협력하고 헌신해주신 교우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가 되었지만, 코로나의 위기가 여전합니다. 새해 첫 예배는 모두 함께 모이는 연합예배인데, 올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달기 예식은 대면 예배가 재개되는 때로 미뤘고, 교회학교 어린이와 푸른이의 진급 예식도 3월로 미뤘습니다. 신년하례회와 신임 집사/교사 임명식도 비대면 예배형식에 맞추어 진행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어색합니다. 다만, 이 기간이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고 있기에, 주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간구할 뿐입니다.

올해는 신축년, 흰 소의 해라고 하지요? 흰 소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집니다. 복되고 좋은 일이 일어나는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소는 온순하고도 믿음직하고, 은근하면서도 끈기가 있는 동물이지요. ‘천천히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보천리(牛步千里)의 걸음으로 맡겨진 과제를 하나씩 정성껏 풀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도 황소걸음의 지혜를 발휘할 때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4년이 되어가는데, 변화와 개혁의 열매가 잘 맺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정책에서 주권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노동과 주택, 교육 정책 등에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라는 촛불 혁명의 명령이 희미해진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중대한 과제를 정부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겠습니다. 새로운 문명을 지어갈 시민사회와 지역공동체의 실질적인 역량이 확대돼야 할 것입니다. 흑백논리와 진영논리를 넘어서는 정치적인 성숙, 자본의 탐욕을 재조정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의 마련, 소비문화에 밀착된 욕망을 생태적으로 바꿔 가는 노력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대도 질병의 관점에서 보면 끝이 멀지는 않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어서 다음 달부터는 맞을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안겨준 과제를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부터 우보천리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더욱 근원적인 회개와 변화를 동반하는 종교적 지혜가 여기에 필요할 것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어떤 다짐을 하셨는지요? 성서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신앙인의 다짐이겠지요. 우리에게는 예수를 얻는 것이 영원한 축복이니, 올해의 축복도 예수와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누리는 축복, 이에 대한 분별력이 신앙인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맞아,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축복을 보는 것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안목일 것입니다.

 

[남은 자의 회복 / 예레미야 317-14]

1성서의 본문은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그는 민족이 패망하는 비운의 시대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개혁 군주 요시야가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죽고, 나라가 위기상황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정치는 사대주의와 민족주의를 오가며 혼돈의 극을 달렸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차라리 파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앙과 심판에 관한 선언을 주로 했던 그의 책 한가운데에 <위로의 책, the book of consolation>으로 불리는 내용(30~33)이 들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이 있는 31장은 예레미야 예언 정신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317-14절을 성탄절 두 번째 주일에 읽어왔습니다. 그 내용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미 오래전 패망한 북 왕국에 대해, 그것도 멸망이 눈앞에 닥친 남 왕국에서, 과연 이야기할 수 있는 소망과 약속이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31장 전체를 봐야 합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사상의 핵심이라할 새 언약’(berith hadashah)에 관한 것인데, 예레미야는 돌판에 새겨진 모세의 율법이 깨졌다고 보았고, 이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될 새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31:31-33)

오늘 본문은 이 새 언약의 주체가 될 사람을 언급합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을 가리켜 남은 자라고 말합니다. “주님,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여기서 남은 자’(sheerith)는 재난과 시험의 기간을 통과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서는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갈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10:22-23)

남은 자는 절망의 시대를 견디게 하는 미래의 씨앗입니다. 예를 들어, 아합왕의 폭정으로 인해 엘리야마저도 좌절할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합니다. (왕상 19:18) 바울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오래된 성서의 전승을 이어갑니다. (9:27)

남은 자에게는 양면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심판의 흔적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꿈을 이어갈 희망의 거처가 되기도 합니다.

성서의 다른 누구보다도,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예레미야가 유독 남은 자에게 주목합니다. 자기 책에서 24번이나 반복해서 남은 자를 강조한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8절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땅끝에서 모아올그들은 눈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이요, 임신한 여인이나 해산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독특한 상상력을 보게 됩니다.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오래 가고 살아남게 될 사람은 돈이 많고 권력을 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본 남는 자는 위기와 혼돈의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다른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성서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모세의 율법을 금과옥조처럼 지켜왔던 기존의 문명이 파멸해가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다가올 새 시대의 구원은 옛 언약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의 도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모세의 율법과는 정반대의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118절에 나오는 모세의 규정을 따르면, 눈이 먼 사람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로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넘어지지 않도록 평탄한 길로 인도할 약속의 사람이요, 다가올 구원은 그들의 마음이 물댄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는 상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것이 생명력 있는 마음 판에 새겨질 새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로운 언약은 종교 정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파멸과 위기의 시대에 비로소 깨닫게 된 진리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얻은 하늘의 지혜요 축복입니다.

그것은 먼 훗날, 성전종교의 지배자들이 쳐놓은 그물 속으로 들어가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예수의 지혜이자 그가 남긴 축복과도 같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22:20) 예수가 주신 새 언약은 성전종교의 율법이 아닌, 십자가에 기초한 새로운 약속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지난 소비 문명의 시대가 약속한 옛 언약의 한계와 결말을 봤습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추구할 새 언약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축복일 수 있을까요?

 

[신학적 예정론의 본뜻 / 에베소서 13~14]

에베소서 본문에 나오는 긴 축복의 인사는 베라카’(berakah)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축복 송영입니다. 한글 번역은 여러 개의 문장으로 나뉘었지만, 원문은 3절부터 14절까지 통째로 한 문장인 송영(eulogy)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긴 축복으로 시작합니다. 이 축복문의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그 노래는 마치 자아도취의 정서에 함몰된 예정론의 교리를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그것은 세상 창조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5)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8)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9) 당신의 신비한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10) 그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 되고, (1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훗날 종교적 독선에 빠진 칼빈주의자들이 주로 활용한 이 본문은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해 놓았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럼 그렇다 치죠. 문제는 바울이 이 예정론의 신학을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을 갖고 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오늘 본문을 관념적 교리로 만드는 것은 성서 문자주의의 상투적인 실책입니다.

보통 예정론은 현재의 질서와 체제를 용인하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예정해 놓은 질서이니 어지럽히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수작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읽으면, 바울을 완전히 오해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가 자유 대헌장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번 성서 묵상을 하면서 에베소서는 평등 선언문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 율법에 의한 차별이 생기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려고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예정론의 신학은 차별을 조장하는 율법주의를 무력화시키는 논리입니다.

이 편지의 배경에는 이방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의 논란과 긴장 관계가 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도 유대인처럼 할례와 율법준수가 필요하다고 본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봤던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매우 급진적인 평등 공동체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본래의 예정론은 차별과 불평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이방인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습니다. (2:11-12)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무할례자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의 내용을 이렇게 따돌림을 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평등 선언문으로 이해하고 읽으면, 이전에 관념적으로 보이던 문자들이 아주 생생하고 급진적인 언어로 되살아나는 마술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옛 율법에 사로잡혀서 차별과 배타주의를 당연시하는 풍조를 비판하며 말합니다. 그가 착안한 것은 하나님 안에는 영원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3:9) 그것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속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예수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6/8)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그리스도를 높이신 이유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충만함을 보이시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1:21/23)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는 이런 바울의 평등사상을 배타의 논리, 제국주의의 논리로 활용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역시 바울의 말을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차별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보라고 한 성서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현재의 차별을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배타의 교리를 주장합니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천진난만한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 노래가 기독교적 진실을 담으려면, 이 노래를 우리 시대의 이방인들, 이 시대의 소수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예정론은 배타의 논리가 아니라 평등의 선언이요,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에 관한 성서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야, 성서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 요한복음 110-18]

복음서 본문 요한복음 1장을 성탄절에도 읽었습니다. 그때는 14절에 주목하여, 예수 탄생의 임마누엘 사건을 개벽의 선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앞에 나오는 10~13절에 먼저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본 에베소서의 상황과도 연관되는 것인데, 배타적 유대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요한 공동체의 상황처럼 보입니다.

요한은 빛에 관한 은유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가 빛으로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를 맞아들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는데, 그들은 혈통이나 사람의 뜻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이 설명은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한 축복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등급과 차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통해서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의미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성서 묵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빛에 노출된 사람들, 그들이 구성한 믿음의 공동체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본문 17절은, 모세를 통해서 받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로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악과 싸우다 악에 동화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이끌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메마른 율법이 세상을 갈라놓지 못하도록, 은혜와 진리가 이끄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힘있게 펼쳐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강제로 요구되는 율법은 고난의 시대에는 견디지 못하는 옛 언약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고난 속에서 더욱 피어나는 새로운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그 규율을 지킬수록 옛 질서를 강화하지만, ‘은혜와 진리에 기초한 새 언약은 자신을 변화시켜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합니다. 예레미야가 위기의 시간에 발견한 새로운 언약, 바울과 요한이 증언한 은혜와 진리의 빛 가운데 이루어지는 믿음의 행진을 우리 모두 새해의 축복으로 받고 힘차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따라 살아갑시다. 위기 속에서 새 언약을 발견한 예레미야처럼, 차별 속에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획을 발견한 바울처럼, 하나님 말씀의 빛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축복으로 얻는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