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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혼돈에서 튀어나온 빛 | 김희헌 | 2020-01-10

by 김희헌 posted Jan 10, 2021 Views 20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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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1-10

혼돈에서 튀어나온 빛 (1:1-5, 19:1-7, 1:4-11)

2021.01.10. 주현절 첫째 주일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새날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합니다. 혼돈에 찬 현실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금요일에는 중대 재해 처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법은 해마다 2,400, 하루에 7명씩 산업재해로 죽는 노동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재계는 이 법안을 가리켜, 기업의 투자 활동을 위축시키는 과잉입법이라고 반대해왔습니다. 결국, 재계의 집요한 로비로 인해 누더기가 된 채로 통과되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기업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지배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윤이 있는 곳에는 안전 보호의 의무 또한 있어야 하는 당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굳이 특별법까지 만들어야 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 문제인 것이지요. 위험을 남에게 전가하고,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의 수탈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법안이 통과되어 국회 앞 농성은 해산했지만, 청와대 앞의 단식농성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암 투병을 포기하고 부산에서부터 십 일 넘게 걷고 있는 해고노동자 김진숙 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어제는 서울역에서 철도노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랜 파업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촛불 혁명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시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남북관계 역시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3년 전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은 정전선언에 가까운 합의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역행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의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문제입니다. 보수 정권 때보다 더 국방비를 인상하고, 천문학적인 첨단무기 체제를 도입하고, 사드 배치와 방위비 분담금 등에서 보듯이 주권국가로서의 자주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긴 분단체제의 무게에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 역시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사태가 생긴 이유는 자연과 인간을 약탈해 온 인류의 생활방식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전환의 계기를 만드는 일에는 더딥니다. 종교를 포함한 기본 체제가 성공한 중산층을 위해서 진화해 왔기 때문에, 문명전환의 이정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현절 첫째 주일로서, 사순절이 시작되는 때까지 6주 동안 주현절의 묵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현절이란 주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서방교회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사건에 주목했고, 동방교회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한 것을 기념해 왔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시각을 바꾸어서,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이 무엇에 주목하시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우리가 주목하는 것, 이 역사가 주목해야 할 것을 말해주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서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빛이 생겨라 / 창세기 11-5]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행위가 혼돈에서 빛을 만드신 것이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고백에 기초한 이야기입니다. 그 문학 장르를 말하자면 신화’(myth)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서 말씀을 신화라고 표현하면 오해합니다. 왜냐하면, 신화는 사실과 무관한 공상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렌 암스트롱이라는 학자는 신화의 역사라는 책에서 신화의 의미를 다르게 말합니다. 신화의 목적은 사실적인 정보 제공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주려는 것이요, 따라서 신화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늘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서에 기록된 창조신화를 보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을 통해서 성경의 신앙공동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창조신화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유배당한 사람들, 그들이 바빌론에서 에누마 엘리쉬라는 창조신화를 접했습니다. 이 신화는 고대 바빌론의 설립에 관한 이야기로서, 최초의 신들이 괴물들과 싸워 이기고, 마침내 세상과 인간과 도시(바빌론)를 창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내용은 대지의 여신 에아의 아들 마르둑이 티아맛이라는 바다괴물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마르둑은 치열한 전투 끝에 티아맛을 죽이고, 그 주검을 반으로 갈라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흐르는 피에 흙을 이겨서 인간을 지어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빌론의 창조신화는 거대한 도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약탈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창조신화는 그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포로기의 신앙공동체는 역사의 비극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새로 쓴 창조신화에는 어둠의 현실을 직시하고, 생명의 질서가 파괴된 혼돈 속의 사람들이 겪은 고뇌의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바로 그들의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삶은 혼돈이요, 공허이며, 깊은 어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잠시 기독교교리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 창조신화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을 정통교리로 공인한 때는 13세기입니다. (4차 라테란공의회, 1215)

하지만 무로부터의 창조교리가 없던 기독교 신학 초기에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혼돈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도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가 2세기 초의 Justin Martyr(114-165)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형체가 없는 물질(formless matter)로부터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권이 확립되고 교회가 제국주의적인 모습으로 점차 변해가면서, ‘무로부터의 창조교리 또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주제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 신학자는 우리 교회에 방문했던 캐서린 켈러 교수입니다. 그는 창조 이전의 상태인 2절의 내용에 대해서 깊이 있는 신학적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여기서 깊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홈은 측량 불가능한 잠재성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테홈에서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 위를 하나님의 영(ruah)이 박동하는 심장처럼 맥박치며(rachaph) 움직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창조가 이뤄지기 전의 상태인 어둠과 혼돈에 대한 성서의 묘사가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사건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둠 깊은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묶어버린 소비 자본주의의 삶, 회복 불능에 빠져가는 지구 생태계, 점차 멀어지는 정의와 평등에 관한 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멈춰진 삶, 이 불확실성과 혼돈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늘 우리만이 아니라, 성서의 첫 장에서 창조신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한 포로기 신앙공동체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망에 머물지 않고, 혼돈과 어둠 속에서도 새롭게 창조행위를 펼치는 하나님을 보며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 위를 움직이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런 신뢰가 제국의 방식과는 다른 상상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제국주의 문명은 약탈 없이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마르둑이 티아맛을 죽이고 그 배를 갈라야지만 창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투가 아닌 말씀으로 이뤄집니다. 이 창조에는 공격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첫 번째 창조의 말씀은 빛이 생겨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빛이 어둠과 혼돈을 떨쳐냅니다. 어둠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더 큰 어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있으면 물러갑니다. 이것이 포로민의 창조신앙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바벨론 제국이라는 압도적인 힘의 문명 속에서 혼돈과 어둠의 세계를 살았던 포로들이 갈구한 창조적 생명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가복음 14-11]

창세기에서 우주 창조의 시작을 빛으로 봤다면, 역사의 빛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복음서의 관심이라고 봅니다. 무엇이 역사에 빛을 비춰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마가복음은 그것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등장, 하늘이 아끼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은 새로운 인간의 출현, 그것이 하늘과 땅이 마주쳐 울리는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라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기록은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삶을 돌이키는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광야에서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던 그의 사명은 예수의 등장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입니다.”

이런 겸손의 말씀이 하늘을 울립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면서 소리가 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바로 이 극적인 선언에서 동방교회는 주현절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더는 자신을 숨기지 않고, 이 땅에 나타남을 선언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예수 한 분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흘러갑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펼친 사역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이어간 예수 운동 역시 거룩한 영에 힘입어서 펼쳐진 것임을 말해주는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 사도행전 191-7]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에베소에서 활동한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 나오는 이야기(18:24-28)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아폴로가 에베소에서 예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 바울의 동지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발견하고 그를 데려다가, 더 자세하게 하나님이 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아폴로가 에베소에서 활동하다가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왔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성령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들에게 안수합니다. 그러자 성령이 내렸고, 사람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운동 초기에 있던 긴장 관계를 보여줍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사람들은 네 편으로 분열한 상태에 있었고 (고전 1:10-17), 그중 한편이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분열한 이유는 무엇을 믿음의 중심에 놓을 것인지에 대한 차이였다고 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은 예수 운동의 핵심사항, 신앙공동체의 참된 시작에 관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늘과 땅을 잇는 일들이 펼쳐집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합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이 우리 삶을 밝히는데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은 혼돈에서 빛이 튀어나오는 사건이요, 성령의 세례를 받은 아들과 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고, 자비로운 열정을 품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혼돈 속에서 빛처럼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해를 사는 우리의 바람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지어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새해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일을 꿈꾸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혼돈 속에서 빛이 튀어나오듯이, 자비로운 열정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이 어둠과 혼돈의 시대를 뚫고 솟아오르기를 기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교우들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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