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ㅣ 김지목 ㅣ 2021-01-24

by 김지목 posted Jan 31, 2021 Views 21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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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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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신18:15-20, 고전8:1-13, 1:21-28)

2021.01.31. 주현절 넷째주일

 

기원 전후의 고린도 시()는 로마에 의해 멸망했다가 다시 로마에 의해 재건된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146년경에 멸망한 고린도는 100여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기원전 44년경에 로마의 식민지 거점으로 재건되었습니다. 멸망 전 고린도는 그리스 만신전이 유명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어서 제의 축제 때마다 문란한 집단 성교가 벌어지던 곳이었습니다. 신전의 공창제도가 성행했던 만큼, 고린도는 성적으로 타락한, 문란한 도시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종교적으로 많은 담론을 포괄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100여년 동안 폐허로 남았다가 로마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을 때에도 고린도에 대한 선입견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고린도는 문란한 욕망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로마가 다시 고린도를 재건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는 고린도가 아시아와 이탈리아반도를 이을 수 있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총독이 거주할 정도로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집필한 기원후 50년경에는 인구 50만의 세계적인 도시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해상무역의 거점이었던 만큼 다양한 민족이 오가다가 거주하게 되고, 그러면서 고린도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의 3분의 2의 인구가 노예였지만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된 노예들이었고, 또 노예였다가 자유민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고린도는 경제와 문화적인 면에서 퍽 활발한 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도시를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에 방문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반 정도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텐트를 치는 생업과 선교활동을 병행하다가 이내 후견인의 도움으로 선교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에 예수공동체를 세우게 됩니다. 바울은 그 고린도교회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서신을 써 내려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두 편만을 볼 수 있지만, 문맥 상 더 많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특별한 애정으로 돌보았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습니다. 노예에 준하는 처지였지만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기로, 짬을 내어 공동체 집회에 참여할 수도 있었고, 제 시간을 엄정하게 지킬 수는 없었을지라도 공동식사였던 주의 만찬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고전11:17-22)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특별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이유가 바로 고린도 교우들의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저마다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지만 공동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마음! 삶의 고됨을 뒤로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희생하며 애쓰는 마음! 타인을/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헌신은 성령의 자기초월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배려와 헌신으로 공동체를 세워가면서, 자기초월로 하층민의 실존적 형편을 초극하는 고린도 교우들의 모습에, 뜨거운 마음을 느꼈을 사도 바울을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마음이 서신에 깊은 애정으로 새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의 그 뜨거운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우들이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설과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1년 반 동안 머물고 에베소 지역으로 가는 도중에 이 편지를 집필했습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에 앞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 하나를 더 썼던 것으로 파악됩니다.(고전5:9)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보낸 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문란한 사회/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당부, 곧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고, 이에 대해 고린도 교우들의 반응(고전7:1)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우리가 보는 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우들의 반응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보면, 고린도 교회와 교우들의 형편에 대한 바울의 묘사가 매우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을 넘어서, 먼저 보냈던 편지에 대한 교우들의 반응까지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보낸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고린도 교우들은 사도 바울의 권면에 대하여 이견을 내비쳤습니다. 일종의 저항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 문제만 언급하겠습니다. “음행하는 사람들과 사귀지도 말고, 우상에게 바친 고기도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들의 이러한 이의제기는 일면 타당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성적으로 문란해서, 그런 금욕생활을 기준으로 둔다면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 아무도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또 도축은 이방신전 제사장만이 집행할 수 있기 때문에 시중에 나와 있는 고기는 전부 우상에게 바친 고기일 것인데, 그렇다면 고기를 전혀 먹지 말라는 말입니까?” 이러한 반항과 함께 그들은 영지주의의 지식을 가미하여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바울 당신은 우리에게 지식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시키고 율법의 그물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이제 다시 금욕이라는 그물에 우리를 얽어매어 일상의 삶조차 살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영지주의 사상은 당대 팽배해 있던 철학 담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영지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영지주의의 지식(gnosis)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지식을 훌륭한 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영을 강하고 순수하게 하며, 할례와 같은 구태로부터 신앙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고린도 교우들은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보낸 바울의 편지에 그와 같이 반응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변증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음행하는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했던 말에 대한 해명은 59절에서부터 나옵니다. 고린도에서 아무도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신도라고 하면서음행하고 탐욕부리고 우상숭배하고 중상모략 등을 자행하는 자들과 함께하지 말라는 말이라며 오해를 불식시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이 그렇게 이중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음행하는 삶에서 떠나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에 대한 해명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에서 지식이 약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개종 전 종교적 습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본문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해보겠습니다.

 

1. 지식을 알고 있는 우리는 설사 우상에 바쳐진 고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식이 약한 사람은 고기를 먹으면서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임을 알고 신앙의 양심이 상하게 됩니다.

2. 당신들은 지식에 따라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그 모습을 따라 고기를 먹는 지식이 약한 사람은 신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약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지식이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기 지식을 내세워 자기만 자유롭게 하는 지식은 교만한 지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곧 약한 이들을 위하는 지식이 참다운 지식입니다.

4. 나 바울은 자매와 형제를 위해서라면 지식으로 얻은 내 자유를 평생 포기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먹기를 절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논증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참다운 지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참다운 지식이었습니다. “지식은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영지주의 사상을 넘어서, “약한 자의 형편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 제1원칙이라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지식을 깨우치도록, 사도 바울은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고린도교회 상황에서 약자는 지식이 약한 자들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지식이 약한 자들이 마땅히 배려를 받아야 할 약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린도교회의 구체적인 특수한 상황을 떠나서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배려하고 먼저 사랑해야 할 약자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특수성을 오늘날 상황에 등가적으로 치환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대략 계급적, 사회적 위계질서를 기준 삼아서 상대적 하위계층을 약자로 규정하고 기계적으로 고정화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유기체를 기계틀에 욱여넣는 형국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하는 것만으로 시공간적 위()를 점유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가 바로 위()입니다. 우리의 언어로는 원죄입니다. ()를 점유하여 원죄를 지닌 우리는 그 실존적 한계 때문에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서 약자를 양산하는 억압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타자를 포섭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우리의 실존성을 인지하고 매 순간 깨어있어만 합니다. 우리의 방법은 기도인데, 기도 중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간구하는 이유가 그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약한 자의 형편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하라는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 실존은 언제든지 약자를 양산하는 주체로 변모될 수 있다는 긴장 속에서 늘 깨어 기도하는 삶,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상황 안에서 약자를 판별하여 약자를 옹호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마는, 그에 앞서 나 자신이 서로 사랑하는 삶에 동참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자세를 지닐 때, 그리스도의 참다운 지식에 가까운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다운 지식으로 서로 사랑하기, 먼저 사랑하기를 강조하는 사도 바울은, 사랑장()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사랑을 재차 강조하며 최고조로 올려놓습니다. 오직 사랑이 제1원리이며,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의미화하는 비결임을 밝혀줍니다. 무엇이든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무의미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그 사랑이 지식과 비교되면서 사랑 없는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정도에 그치지 않고 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과 연동되어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켜 놓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죄에 빠지지 않는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를 양육하는 방편도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모임에 귀중한 책무가 맡겨졌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입니다. 교만한 지식은 공동체 분란의 씨앗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공동체를 튼실하게 세워주는 힘입니다. 동서양의 오랜 지혜는 덕()영혼의 힘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이 지닌 영혼의 힘이 사회관계적으로 나타난 것이 ()’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결정짓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명체처럼 잉태되고 양육되고 발현될 수 있도록 우리 교회의 힘을 함께 모아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

 

 

 

 

파송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광화문 시대를 맞이하는 일, 교회를 건축하는 일, 미래세대를 세우는 일, 서로 소통하는 일, 광야생활을 지내는 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이 사랑하는 힘으로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의 영이 우리 공동체를 늘 보듬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축복기도를 나눕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