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의 세 지침 (사 40:21-31, 고전 9:16-23, 막 1:29-39)
2021.02.07. 주현절 다섯째 주일/설 주일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위태로운 삶]
이번 주에는 설 명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임도, 이동도 없는 이상하고 낯선 명절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추석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설’이라는 명칭이 ‘낯/설다’ ‘익숙하지 않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본래는 새해 첫날을 낯설게 맞는다는 의미겠지만, 달리 생각해서 명절이 낯설게 된 사람들, 명절을 잃어버린 이웃들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농업노동의 절반을 담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수만여 명의 난민들,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으로 인해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삶의 터전과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위태로운 삶에는 명절도 낯설기만 할 것입니다. 명절마저도 버거운 듯이 보이는 고달픈 삶을 들여다보면 외면하기 힘든 아픈 진실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의 삶에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어두운 자화상이 담겨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35년 전 한진중공업 용접노동자로 일하다가 부당해고를 당한 김진숙 님은 지금도 복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온갖 호소를 다 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치료를 멈추고 부산에서부터 한 달 넘게 걸어와서, 오늘은 마지막으로 청와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싸움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문제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고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코로나의 시대를 고통의 시간이라고 여겼지만, 지난해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750억 달러를 넘는 흑자를 냈다는 뉴스를 며칠 전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풍요는 다 어디로 가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위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야박한 문화를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코로나의 교훈을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앞으로의 삶은 다른 방식으로 열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되돌아보고, 함께 살아갈 참된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꿈과 행복이 혼미한 시대의 미몽은 아닌지, 우리의 주장과 증언이 좁은 소견에 갇힌 옛 시대의 볼모는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몰고 온 커다란 위기감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출발에 관한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을 허겁지겁 몰고 왔던 것들이 앞으로는 낡은 시대의 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새로운 창조는 위기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니, 위기의 시간은 창조의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주요 가르침도 위태로운 시대가 빚어낸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성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약 천오백 년의 역사는,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한 매우 짧은 안정기를 제외한 대부분이 위기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배경도 그러합니다. 이사야서 40장은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지 수십 년이 흐른 절망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마가복음은 대로마 전쟁으로 패망한 유대 사회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고린도전서는 로마제국의 폭압적인 질서를 배경으로 합니다. 우리는 그런 어두운 역사에서 거기에서 무슨 생명의 분투가 있었는지를 성서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오늘 성서 묵상은 각각의 시대를 뚫고 나온 믿음의 교훈을 찾아보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우리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가르침을 세 개의 본문에서 하나씩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사상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라 / 이사야서 40장 21~31절]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제2이사야’라는 별명을 가진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이름 없는 예언자의 외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살던 때는 절망이 한없이 깊어진 상황이었습니다. 27절에 나오는 불평과 하소연은 그 시대의 언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
이렇게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예언자는 무슨 말을 들려줄 수 있었을까요? 이 절망의 시대에 예언자가 선택한 돌파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신학’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의 믿음은 ‘계약신학’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매개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은 영원할 것이라는 논리가 천 년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으니, 하나님의 약속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포로들은 자기 시대를 설명해주고,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할 언어를 잃었습니다. 끝 모를 절망의 의미를 밝혀줄 예언이 없었습니다.
그때 과거의 전통에는 없었던 ‘창조신학’이 기원전 6세기에 솟아오릅니다. 이 창조신학은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로 시대를 살며 혼돈의 위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사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언자는 창조신학을 펼치면서, 절망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전반부(21~27절)는 창조신학을 말하고, 후반부(28~31절)는 갱신과 회복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듣는 독자들은 유배 생활을 하는 포로들입니다. 이들은 오랜 포로 생활에 지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잃어버렸습니다. 행복했던 기억은 혼돈의 시간 속에서 흩어졌고, 암담한 현실에는 탄식만 남았습니다. 기존의 논리로는 이들을 위로할 수도 격려할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창조신학입니다.
보통 창조 사상은 대제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신화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포로기 시대에 태동한 성서의 창조신학은 제국의 지배신학과는 다른 평화의 신학이요, 약자들을 독려하는 특징을 갖습니다. 성서의 창조신학은 포로들의 지친 삶을 ‘독수리가 날개 치며 솟아오르듯이’ 할 수 있는 길에 대한 모색입니다. 절망의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려는 것이 성서의 창조신학입니다.
기존의 문법으로 해석된 포로들의 삶은 암담할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사회적 해석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김진숙 님의 복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정부는 그 일은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기업의 소관이라고 말합니다. 한진중공업의 주 채권사인 산업은행은 부당해고 기간에 대해 보상을 하면 ‘업무상 배임’이 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것은 국가폭력의 과거를 외면하고,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그것으로는 미래를 열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없는 노동자를 대공분실로 끌고 가서 협박하고 고문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국가가 먼저 사죄하는 것이 더욱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폭력과 결탁하여 노동자를 억울하게 대했던 관행을 반성하는 것이 책임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길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서의 교훈입니다.
위기의 시대를 향해 오늘 이사야서 본문이 주는 첫 번째 지침은, 낡은 논리를 반복하지 말아라! ‘창조적인 사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에서 미래를 찾아라!’라는 것입니다.
[에레모스, 버려진 곳에서 기도하라 / 마가복음 1장 29~39절]
마가복음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병을 고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복음서 본문도 그 두 가지를 다룹니다. 전반부(29~34절)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한 이야기이고, 후반부(35~39절)는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구절은 이 두 이야기를 잇는 35절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마가는 예수께서 아침 일찍 홀로 가서 기도하신 곳을 가리켜 ‘외딴곳’ 즉, 버려진(deserted) 장소요 외로운(solitary)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그곳을 가리켜 헬라어로 ‘에레몬 토폰’(ἔρημον τόπον)이라고 하는데, 이 장소는 마가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그곳은 과거의 예언이 현재의 예언과 만나고, 미래의 희망이 현실의 활동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장소’에 관한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35절에서 ‘외딴곳’으로 번역한 단어, ‘에레모스’(ἔρημος)는 제2성서에서 48번 나오는데,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의미의 연관을 가지며 신중하게 사용됩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이사야서 40장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1장 3절을 보면, 이사야의 예언이 외쳐진 ‘광야’를 가리켜 ‘에레모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4절에서 세례 요한이 활동한 곳도 ‘에레모스’라고 하고, 12절에서 예수의 40일간 시험이 있던 장소도 ‘에레모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당신이 기도한 곳도 ‘에레모스’이며, 제자들에게 가라고 한 곳도 ‘에레모스’이며 (6:31/32), 가난한 민중(오클로스)들이 예수를 찾아오는 ‘빈들’도 ‘에레모스’라고 마가는 말합니다 (6:25).
그렇다면, 마가의 ‘장소 철학’에 의하면, ‘에레모스’는 예수의 꿈이 길러지고 펼쳐지는 곳입니다. 참된 생명이 피어나는 그곳은 ‘버려진’ 장소입니다. 그런데, 거기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마가는 그곳을 가리켜 ‘에레모스’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마가복음의 민중신학을 보게 됩니다. ‘버려진 곳에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에레모스’가 있다면, 그곳은 교만과 오만의 문명과는 다른 생태적 삶이 지어지는 곳이요, 소비 문명의 프로파간다와는 다른 삶의 동선을 그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에레모스’를 분별하라는 것이, 복음서 본문에서 얻게 되는 오늘의 두 번째 지침이라 하겠습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하라! / 고린도전서 9장 16~23절]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을 펼칩니다. 얼핏 보면, 왜 자신을 사도로서 존중하지 않는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실제 내용은 복음 전파자로 부름을 받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19절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편지에서 비슷한 생각을 말한 바 있습니다.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롬 1:1, 갈 1:10, 빌 1:1) 바울은 예수를 본받는 길을 ‘종의 철학’을 통해서 말합니다. 예수를 본받는 삶은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진 27절에 간결하게 표현됩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이것은 바울이 가진 예수 영성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그 뜻에 맞도록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잘못된 영성은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 남을 개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만으로 가득한 서구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포교방식이 그랬었고, 그것을 배운 한국 장로교회가 갈가리 찢겨 분열의 역사를 거듭한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오만한 영성은 오늘날에도 여러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주의적 종교의 성소수자 및 약자들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며, 세속적인 진보 운동의 분열주의로도 나타납니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세상이 위태로운 이유는 오만한 영성이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성서가 주는 오늘의 세 번째 지침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절과 27절에 담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먼저 쳐서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은, 자기 생각 자체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변화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과거의 진리도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며, 새로운 상황 속에서 변화가 요구됩니다. 지나간 시절의 관념에 머물러 농성을 벌이는 것으로는 영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도리어 삶은 왜소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도리어 삶은 기쁨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지만, 도리어 그것은 눈먼 삶에 닥친 위기로 이어집니다. 교회의 삶에도 위기가 깊어졌습니다.
주현절 다섯 번째 주일을 보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지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버려진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자신을 먼저 쳐서 복종시키면서, 자신을 세우고 공동체를 일구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생명력 있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낡은 믿음을 벗어버리고, 창조적인 신학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요, 버려진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생명의 공간을 넓히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새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