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와 상황 | 이성환 | 2018-01-28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3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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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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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8:15-20, 고전8:1-13, 막1:21-28

 

이성환

 

많이 추우시죠. 지난 한 주간 정말 추웠습니다. 추위가 모든 문제를 뒤덮고 있습니다. 교회 오래 다니신 교우 분들께 확인해 본 바로는 주일 공동식사를 추위로 인해 못하게 된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번 한파는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한파를 그저 우리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천재라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번 한파는 우리 인류가 자초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점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합니다. 중국과 유럽, 북미에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이상기후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이 기상청의 진단입니다. 북극의 한파를 막아주는 제트기류가 유럽과 미국동부, 동아시아 쪽으로 번갈아 남하하면서 이번 추위가 발생했다는 것인데 그 원인이 바로 지구 온난화라는 얘기죠. 

 

사람들의 욕망으로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가 먼 훗날도 아니고 바로 당대에 이런 강추위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한 해 한 해 바뀌어가는 북극과 남극의 모습이 곧 우리 인류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가벼이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갱신되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 가장 걱정되는 건 지금도 추운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또 소외로 거리로 내몰려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노숙농성 1천일을 맞은 하이디스 노동자들, 오늘로써 78일째 80미터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진행 중인 파인텍 노동자들, 이들에겐 순간순간이 고통의 시간일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 우리는 소외로 인해 거리로 내몰리는 이웃들은 없는지 더욱 기민하게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 그들이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고 돕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렇게 이 추운 겨울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

 

예언자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 대해 오늘 신명기 본문은 단 한마디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워서. 출애굽시절 히브리 민중들은 먼발치서 하느님을 대면했습니다. 번개치고 천둥치고 그랬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정결한 몸과 맘으로 호렙산에 오를 수 있었고 멀리서나마 불길을 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경계선을 그어 놓고 백성들이 그 이상 넘어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십계명이 공포됩니다. 상황이 흡사 귀양 간 선비가 왕이 보낸 어명 앞에 조아리는 그런 느낌입니다. 이처럼 호렙산에서의 하느님은 매우 권위적이고 거룩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지난 주 오현선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월호의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 함께 고통의 상황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인데 오늘 신명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백성들로부터 이런 민원을 듣는 하느님입니다. '나의 하느님 야훼의 소리를 다시는 직접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무서운 불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의 원인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히브리백성들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께 십계명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시행령, 시행규칙들을 사사받고 있을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대역죄를 범합니다. 결국 3천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런 역사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대면할 때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을 대면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하느님을 바로 보는 게 두려워, 부담스러워.’ 그래서 찾은 대안이 예언자가 아닙니까? 

 

저는 하느님 앞에 서는 게 두렵다는 그 감정의 근거는 바로 자기 성찰 없음에 있다고 봅니다. 회개의 부재! 제대로 된 자기반성 없이 하느님을 대면한다면 당연히 두려움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보다는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를 나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기지성의 맹신]

 

그러면 자기성찰 없음이 어떤 오류를 범하는지 어떤 죄를 짓게 만드는지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제사상에 놓인 음식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논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어로 코린트라고 하는 그리스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종교가 어우러진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상을 섬기는 문화도 많았고 그 우상에 바친 음식들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관련문헌에 보면 전부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이 이방종교의 의식을 거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절에는 음식으로 되어 있지만 결국 이것은 육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진 것이 대부분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에 거하는 2만5천의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로 오염되었고 율법에 의거하여 올바른 방법으로 도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상제물을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한 그룹들도 존재했습니다. 고린도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우상제물을 금하는 유대인들에 반해 자신들만의 논리로 우상제물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다 지식이 있다.’고 여러분은 말하는데 사실 그렇습니다.”이렇게 말하는데 여기서의 ‘여러분’은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헬레니즘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성으로 이 제사음식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만의 입장,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도 아니고, 영지주의도 아닌 제3의길, 사랑과 배려를 내세운 것이죠. “내 형제가 제사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든다면 나는 결코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서 파생된 게 주초문제 아니겠습니까? 향린의 교우들이야 그런 문제에서 자유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직도 한국개신교에서 논란이 되는 것 중에서 손에 꼽히는 문제가 바로 이 술, 담배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이것일 겁니다. 

 

보통 교회에서, 많은 목사님들이 오늘 본문을 들어 얘길 하는 것은 이거죠. ‘술 담배를 하는 것이 옳거나 그르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로 인해 믿음 약한 이들이 넘어질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런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무게 중심은 ‘제사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위해 제사 음식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음식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먹었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해서 더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신앙에서의 본질은 그런 제사음식과 관계없습니다. 특히 한국교회풍토에서 터부시되는 그런 것들과는 인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음식은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을 뿐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요소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전혀 무관한 것일 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듯이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말은 단서조항일 뿐이지 이것이 모든 것을 종속하는 원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 그 밑에 깔려있는 사랑 이것을 말함이 위함인 것입니다. 

 

바울이 채식주의자였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 고기를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는 바울의 그 말은 그런 의지의 표명내지는 수사에 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유대인들과 영지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내가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절대화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 이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며,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태도인 것입니다. 

 

단지 진실 앞에서 겸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 앞에, 하느님 앞에 대놓고 뻔뻔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데 있어서 정직하고 철저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렇습니다. 문제를 찾는데 있어서, 자신은 가뭇하게 사라집니다. ‘문제는 항상 그런 상황에 있고, 문제는 항상 너에게 있고, 문제는 항상 불의한 정권에만 있었지, 나는 항상 옳아.’ 이런 태도는 우리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태도는 하느님 앞에서도 조차 우리를 변명 쟁이, 핑계 쟁이로 만들 것입니다. 

 

[더러운 악령 든 자가 안식일, 회당에 나타난 이유] 

 

오늘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사건은 예수께서 공생애에 처음으로 하신 귀신축출사건입니다. 처음으로 나타낸 표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광야 사십일을 거쳐 제자들을 조직한 후 가파르나움으로 갑니다. 이곳은 갈릴리와 함께 예수운동의 활동근거지가 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 일행은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의 소종파운동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 예수님이 회당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초창기에는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다가 나중에는 회당이 아닌 마가의 다락방이나 베드로의 처가와 같은 집으로 모이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 집으로, 그리고 교회로, 유대교에서 예수교로의 이행을 증언하는 게 바로 복음서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여튼, 예수의 일행이 회당으로 들어간 시간은 언제입니까?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은 주일에 예배당 가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갔는데 그곳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맑은 영이 있어야할 곳이 회당 아닙니까? 일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시간이 안식일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주신 혜택이자 책임이 되는 이 안식일에, 맑은 영이 머물며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어야할 회당에, 왜 더러운 영이 있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마가의 저자가 갖고 있는 회당종교의 고발인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안식일과 회당은 더 이상 종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당시 정치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해 맺혀진 고통과 소외만 있을 뿐이라는 고발이 오늘 말씀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회당종교인 유대교가 마가저자에 의해 이렇게 날 선 비판을 받게 된 까닭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내부에서 문제를 찾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신을 모독하는 예수 일당에게 있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있었고 갈릴리 민초들에게 있었지, 유대교는 항상 옳았습니다. 언제나 완벽한 법률시스템을 자랑했고, 하느님 앞에 칭찬받는 그런 일등 민족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을 바라겠습니까? 예수는 이런 회당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유대종교집단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한 십년 전쯤인가 광우병 촛불 당시로 기억하는데요. 독소라는 책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 미국에 렌더링 공장을 소개한 챕터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곳은 소나 돼지의 육류를 가공하고 남은 부산물,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 안락사당한 동물들, 양계장에서 나오는 폐기물들 등등을 커다란 솥에 넣고 끓여서 위에 뜨는 기름은 데오도란트나 비누를 만들고 남는 단백질들은 육골분으로 만들어 애완동물이나 소, 돼지가 먹는 사료를 만드는, 그야말로 쓰레기를 재활용해 많은 제품을 만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동종식이를 하는 것으로 광우병이 발생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병사한 소 돼지에게 투여된 항생물질과 안락사 당한 동물들에게 주사한 독극물은 고온에도 녹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렇게 만든 비누와 탈취제를 사람이 쓰고 그런 사료를 먹은 돼지와 소를 결국 우리 사람이 먹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되는 구조입니다. 자연은 이런 식으로 자기 성찰 없는 우리 사람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이번 한파도 그런 것 아닙니까? 문제를 내 안에서 찾지 않고 계속 자연에게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그것은 결국 돌고 돌아 내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문제는 주체에서, 내 안에서 찾는 게 오늘 성서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 바로 대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성찰이 전제 되어야만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고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배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 바로선 우리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바로 대면하기 위해 항상 점검과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주체에서, 일감은 상황에서 찾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