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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희망이 피어나는 시간 | 조은화 | 2018-02-25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5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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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2-25

희망이 피어나는 시간

 

창세기 17:1-7/15-16, 로마서 4:13-25, 마가 8:31-38

 

오늘은 삼일절 기념주일입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99주년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와 통일이라는 단어가 더욱 마음에 와닿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녁이면 평창 동계올림픽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많이 울고 웃으며 배움을 얻기도 했습니다. 개막식 입장부터 단일팀으로 “KOREA”라고 불리며 북남의 선수들이 동시 입장하는 모습은 그 체만으로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북과 남이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결성하여 경기를 뛰었습니다. 그것을 보녀서 우리의 통일이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 예술단 특별공연이 남한에서 있었습니다.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일본의 반발을 무릎 쓰고 개사하여 불렀던 “독도도 내 조국”이라는 노랫말을 들을 때 우리가 가까이 있구나. 당당하게 힘을 낼 수 있음에 뭉클했습니다. 그러나 북과 남의 화해의 장을 훼방놓고자 하는 미국과 일본, 그들이 우리를 예의주시하며 긴장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과정 속에서 그들이 우리의 통일을 두려워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전국민이 하나로 만들어준, 샛별처럼 떠오른 유행어가 있습니다. 네 바로 “영미!”인데요, 바로 컬링 경기에서 김은정 선수가 볼의 진행을 위해 김영미 선수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들이 많이 공개되면서 패러디 동영상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습니다. 경기중에 이렇게 동일한 이름이 많이 불려지는 것이 있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외국인들은 영미가 이름이라고 생각못하고 경기진행을 위한 호칭인줄 알고 있다고 하지요. 

 

[사래 -> 사라, 아브람-> 아브라함]

 

오늘 창세기는 이름이 새롭게 불려지는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래가 사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변화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오늘 창세기 본문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행함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행함에 노력하고 힘씁니다. 그 행함은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보라, 나의 계약이 너에게 있다.”라는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살아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이란 ‘아버지(하나님)는 높으시다.’로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게 불리며, 수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란 뜻으로 새로운 비전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에서는 아브람을 ‘높은 권세자’를 뜻하는 이름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래라는 이름도 ‘귀족부인’, ‘나의 왕후님’이란 뜻에서 사라로 이름이 바뀌면서 ‘만민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결국 이것은 아브람과 사래라는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삶이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사라, 아브라함이라는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이름으로 불리며 주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청받은 것입니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대대로 물려줄 가문의 유산이 될 것이라는 축복문입니다. 기존의 가나안 도성 문명은 전쟁을 일삼고 교만하여 풍요의 경제를 우상으로 표상하며 노예제도를 옹호한 채로 죄 많은 폭력의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은 하니님의 창조 사역에 역행하는 인간의 반역하는 문명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 악한 문명을 부정하고 창조의 원형을 회복하는 사명을 띠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을 필두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또 다른 이름, 김지영]

 

최근 이 이름을 아시는 분들이 있으실텐데요. 지난 해 출간되어 5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김지영은 우리 주변에 평범한 30-40대 여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한국 여성으로 평범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늘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으며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게 하고 아픈 지점들을 반추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의 절반은 상당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회사생활, 결혼생활(사랑 결혼 가족구성 출산과 육아)에 이르기까지 여성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특별한 상황이나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집과 직장에서 있었던 내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모든 이에게 있어 평등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요즘은 오히려 여성상위 시대 아닌가? 여자가 더 무섭다. 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 그런가요?

 

2017년 2월 발표한 ‘여성경제활동 지수 2017’ 보고서(PwC)에 따르면, 한국의 여남의 임금격차는 36.7%로 OECD 회원 국가 중 최고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문직에서 더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사회에서 고위직의 비율을 보면 아직도 남성이 많습니다. 남성은 늦은 밤 외진 곳을 갈 때 무서울 수는 있지만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늘 어디서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운동 현장에서도 여성들의 피해소식을 접할 때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혹여 성폭력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인 남성은 '술을 먹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 하며 여성에 대한 탐닉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던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습니다. 성폭행한 가해자의 이름보다 피해여성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사생활까지 들춰냅니다. 왜 사람들은 가해자를 욕하다가도 피해여성의 행동과 상황을 물어보는 것일까요? 입은 옷이 바지였는지 치마였는지, 치마길이는 얼마나 짧았는지, 가슴은 얼마나 파인 옷이었는지, 그리고 술은 마셨는지 안마셨는지.... 꼬리를 친건 안니지... 피고인도 남성, 변호사도 남성, 판사도 남성인 경우 가해자의 범죄에 대한 형량은 터무니없이 낮게 내려지고 물적 증거를 가져오지 않는 이상 스토커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직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파렴치한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무자비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드러난 사건들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연극계를 비롯하여 정치, 종교, 경제 전 분야에 걸쳐 여성을 성으로 농락하고 함부러 할 수 있다는 악습이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me too 운동 전개]

 

요즘은 매체마다 성폭력을 행한 가해자의 이름이 더럽게 불려지고 있습니다. 최근 “나도 당행다”는 의미의 ‘미투’(me too) 운동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은 지난 2017년 10월 미국에서 벌어진 성폭행과 성희롱을 비난하면서 sns을 통해 일어난 것으로, 최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일어나면서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해시태그 캠페인은 사회 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사용했던 것으로, 앨리사 밀라노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밀라노는 여성들이 트위터에 여성혐오, 성폭행 등의 경험을 공개해서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의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전세계적에 퍼지게 되었고, 대한민국에서도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올 1월29일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씨의 성추행을 폭로하여 검찰 내 성폭력의 실상을 드러낸 것에 이어, 2월6일에는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을 비롯한 문단 내 성폭력 피해를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2월14일에는 극단 미인의 대표 김수희씨가 연히단패거리의 이윤택 씨의 성추행을 폭로했고 뒤이어 다른 피해여성들이 성폭행 사실까지 폭로하면서 추가 성폭력의 증언들이 나오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후 가수 던말릭, 배우 조민기와 조재현 등 성폭력에 대한 폭로는 끝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에도 폭로는 있었습니다. 문제는 수사과정에서 윗선의 외압이 있었고, 예술인들을 거장이라 떠받들면서 이들의 상습적인 성범죄와 이를 묵인해 온 오랜 관행을 뚫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해자들은 권력과 자본을 이용해 폭력의 사실을 은폐하고자 피해사실을 폭로한 여성들에게 명예회손을 걸거나 꽃뱀으로 둔갑시기도 했습니다. 권력과 자본 앞에 성폭행의 진실은 은폐되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한 여성들의 신상이 털리면서, 결국에는 피해를 본 이들의 행동거지를 거론하며 검열이 시작되는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워함에도 여성들은 어떤 생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들의 이야기로 성범죄가 근절되기를 바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말하는 믿음의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니 미투운동으로 과거 성범죄들이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에 맞는 처벌과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희망을 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앞에 두고, 그 하나님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었으며, 네 자손은 이처럼 될 것이다. 라는 말씀대로 만민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이미 100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태반도 죽은 상태였음을 알고 있으면서,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에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정말 믿음이 좋았을까를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을 주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정작 자손이 없음을 걱정하며, 이집트 여인 하갈의 몸을 빌려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상속하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만나는 고비 마다 굳건한 믿음으로 행동했다고 하기 보다는 나약하고 걱정 섞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그에게 주실 땅을 향해 떠나라 하실 때 미련을 두지 않고 믿고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떠남의 길이란 매 순간순간 어려운 현실 앞에서 두렵기도 하고 고통스럽고 하고 겁이 나서 비겁하게도 체념하기도 하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곳인지를 모르지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는 새 땅을 향해, 안주함이 아닌 떠남의 삶을 선택했고, 그 길 위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가는 동안 참 존재가 되어져 가는 과정을 만난 것이 아닐까요? 바로 그것이 아브라함이 의로운 이로 인정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나를 찾는 여행]

 

마가복음 8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잃어버린 사람됨을 대신하여 비인간화의 세력에 의해 버림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사람됨을 상실한 민중들의 삶과 유대를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예수님의 결정적인 말에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한 항변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백은 베드로가 생각한 것과 다른 그리스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제시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나를 뒤에서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생명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빼앗기려는 사람은 그것을 보전할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 즉 거짓된 모습과 처세술에 능해진 익숙히 살아온 나의 모습을 떨쳐 버리고, 참 나를 찾는 여행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영성사와 인류 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3~14세기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당시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성을 강화시키려 했던 방식과는 달리, 에크하르트는 그 질문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그것은 내가 똑같은 하나님으로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예수에게 나타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되는 길이 열렸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퍼주고 낮춤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나고 실현되어, 내적으로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에 대해서 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실을 다해, 영원하고 항구적인 진실로써 선언하노니, 자기를 낮추어, 자기를 자신의 근저에 내맡기는 사람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자신의 전 자아를 쏟아 부으신다. 너무나 철저하게 쏟아 부으시어, 당신의 생명, 당신의 존재, 당신의 본성, 당신의 전 신성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으로도 되돌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겨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그 모든 풍성한 결실을 쏟아 부으신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넘어 탄생으로! 사람의 아들이 걸어가는 길은 억압적 제도와 악한 숨결을 내뿜는 구조 속에서 빼앗긴 사람됨을 대신하여 마침내 부활로 승리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도 사람됨의 완성을 보지 못한 인간의 역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여전히 자기 개방과 죽음의 위협을 무릎 쓰는 모험입니다. 안정과 특권은 포기하고, 시대의 도래를 위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람의 아들을 따라가는 자기 변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제 타자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 희생이라는 사랑의 길을 따라 나설 때에만이 하늘의 뜻을 받은 믿음이 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당신과 함께]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름 지어진 새 존재의 깨달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고난은 받아야만 하는 숙명이 아니고, 그렇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의 길을 따르면서 누구나 언제든 만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순간들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통해 우리는 더 진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처지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연극계에 미투(나도 당했다) 폭로가 계속되는 가운데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연대의 뜻을 나타내는 “with you”(당신과 함께 하겠다.) 운동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손바닥에 with you를 써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 성폭력 희생자들과 함께 연대하며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는 지지를 위한 운동입니다. 

 

어제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총회가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총회직후 식사의 자리에 참석했었는데 군에서 가혹행위로 몸과 마음이 망가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가족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회원들이 많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회원분 중 어느 한 분의 이야기가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가족이 군에서의 폭력으로 억울하게 당해 고통스러운데, 이런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어 힘이 됐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우리의 떠남의 길을 걸을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길은 그것이 작은 손짓일지언정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희망을 잃지 않고 아픔을 함께 할 때 정의와 평화가 춤추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일절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99주년을 맞는 때에 독립의 정신을 기리며 다시는 어느 누구도 폭력으로 사람을 노예화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이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나라 사람임에도 성노예로 만들며 인간위에 군림하려는 세상에서 앞에서 우리의 갈 길을 모색합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워왔듯이 우리도 가보고자 합니다.

 

지난 번 임은정 검사가 검찰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에 이런 인용구는 이렇습니다.

 

“시스템은 한 개인의 반대를 착각으로, 두 사람의 반대를 감응성 정신병으로 매도할 수 있지만, 세 사람이 같은 편에 서면 함부로 하기 어려운 힘이 된다.” 

 

나에게 오신 주님의 은총 속에 새로운 세상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믿음으로 가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약한 이들과 함께 십자가를 메고 가는 이 길이 바로 희망이 피어나는 시간임을, 그래서 우리를 뜻 이룸의 길로 안내할 것임을 기다립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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