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지식은 사랑이다 | 김희헌 | 2021-02-14

by 김희헌 posted Feb 14, 2021 Views 17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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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식은 사랑이다. (왕하 2:1-12, 고후 4:3-6, 9:2-9)

2021.02.14. 주현절 여섯째 주일

 

[인간다움, 삶의 방향타]

설 명절을 잘 지내셨는지요? 이동이 제한된 명절이다 보니 조금 한가한 느낌이 듭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던 자녀들에게는 비대면 시대의 명절이 안타깝게 느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젊어서는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모르고 살다가, 그것을 느낄 때 즈음에는 기다려주지 않으시니 그리움만 크다고 하지요. 우리를 길러주고 깨우쳐준 사랑이 더욱 그리운 시절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을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면 어쩌면 비난을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당신을 따른다는 교회가 이 모양이냐는 비판이 일어날 기세입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와 기독교 관련 기관은 불통의 아이콘이자 반사회적 위험의 진원지로 보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교회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실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위기의 시대가 진정한 교회의 길을 찾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눈앞의 문제에 매달리느라 유보해온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야 할 시간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살아야겠습니다.

최근 영성 심리학에 관한 공부를 몇 사람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읽고 있는 책은 관상 심리학’(contemplative psychology)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 쓴 책인데요, 그 책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 어떤 이는 살아가면서 점점 더 지혜롭고 온유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은 더 야박하고 근시안적으로 변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삶에서 기쁨을 더 많이 경험하고 발산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두려움과 노심초사에 휩싸이는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역경에 맞설 능력을 키워가지만, 어떤 이는 비슷한 고난 앞에서도 허물어지고 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같은 환경을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심리가 펼쳐지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그 책은 인간다움’(humaneness)이라는 내면의 풍요’(inner flourishing)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풍요로운 내면세계를 가지려는 태도가 자기의 존재를 지어가는 데 깊은 영향을 준다고 말합니다. 인간다움이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본질적인 성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에 부닥칠 때도 나타나며, 풍요로운 삶을 살 때도 나타납니다. ‘인간다움이란 여러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책은 인간다움이 크게 보면,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역경의 시간을 지날 때는 삶의 용기로 나타나고, 타인의 어려움을 볼 때는 따뜻한 돌봄의 연민’(compassion)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풍요로움의 시간에는 삶의 기쁨으로 발산됩니다. 이 책이 언급하는 마지막 요소는 명료한 마음’(clarity of mind)입니다. 그것은 고난의 시간이든 축복의 시간이든 간에 자신의 경험을 더욱 깊은 통찰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Han F. de Wit, The Great Within, 3-4)

인간다움이라는 내면적 풍요를 갖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용기와 사랑, 기쁨과 통찰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삶의 적극적인 요소로 이해됩니다. 삶의 다양한 순간에 우리가 용기와 사랑, 기쁨과 통찰로써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의 삶 또한 풍성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 고린도후서 43~6]

고린도후서의 본문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모습을 대비합니다. 한편으로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삶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삶을 말합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에 대한 바울의 설명입니다.

먼저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신(the god of this world)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5~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둠의 상태빛의 상태로 구분하는데, 그것을 우리들의 노력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신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주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나며, 왜 바울은 영혼의 생사가 갈리는 어둠과 빛의 상태를 마치 주어지는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일까요?

물론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3:14)라고 고백했던 사람이 마치 떡고물이나 떨어지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옹호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묻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진정한 종교체험일까? 어떤 이는 하나님을 봤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것처럼 이야기하며, 거기서 얻은 지식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맞습니다. 종교적인 삶에서는 그런 체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마셔보고 먹어보며, 목소리를 듣고 전율하며 감격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체험한 것 못지않게, 그 체험이 가진 함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성가들은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체험을 의심합니다. 자신의 감각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서도 하나님의 얼굴은 직접 볼 수 없고, 그분의 만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33:23)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뒤통수만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란, 무언가를 경험했던 그 당시보다는 그것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바로 그분이 하신 일이었음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고정되지(being) 않고, 항상 새롭게 생성(becoming)합니다. 경험이라는 것도 마치 흘러간 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무언가를 분명히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경험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뻣뻣한 관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집착하지 말라고 하며, 기독교는 자신에게 갇히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가닿으라고 촉구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6:5) 하나님을 깊이 아는 길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지식의 시작은 사랑이요, 사랑만이 참되게 알게 한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잊습니다. 세상의 신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는 바울의 표현이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전환의 시대에 봐야 할 것 / 열왕기하서 21-12]

열왕기하서 2장의 이야기는 전환의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스승 엘리야의 승천과 제자 엘리사의 계승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이것입니다. 한 시대는 끝나 가지만 아직 다음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때,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 신실하게 응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전환의 시대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았어도, 크로노스의 시간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엘리야가 위대했어도 그의 시대는 끝나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입장에서는 스승이 없는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부재, 그 위기의 시간, 그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함께 걷는 엘리야의 마음을 채운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길갈에서 남쪽 베델로, 베델에서 동쪽 여리고로 가서, 마지막에는 요단강을 건넙니다. 중요한 변화를 의미하는 지리적 상징입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정착하기 위해 요단강 서쪽으로 건너왔다면, 이들은 반대로 동쪽으로 건너갑니다.

길을 걷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고 선문답 같습니다. 애초에 본문은 왜 주님이 엘리야를 데리고 올라가려고 하시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왜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끝내 동행하고 있는지, 그가 질문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왜 거듭 침묵하라고 하는지, 성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도 상황은 명확하지 않은 듯합니다. 한 시대는 분명히 끝나 가지만, 다음 시대는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내용이 분명한 대목은, 요단강을 건너간 두 사람의 대화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주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스승의 능력을 두 배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제자에게 스승이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런 영광을 볼 수 있을까 기다리는 중에 엘리사는 마침내 보게 됩니다. 불 말과 불 수레가 나타나서 스승을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스승을 잃은 엘리사의 비탄으로 끝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스승의 뒤를 잇는 엘리사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면, 전환의 시대에 주신 스승의 말씀에 주목하곤 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 ‘네가 보면 (if you see), 네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고 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예언 전통을 잇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묘사됩니다. 기적처럼 그려진 엘리야의 승천 장면에 대해서 신학적인 의미부여를 하자면, 역사가 하나님 나라 속으로 편입되는 카이로스의 순간이라고도 하겠고, 덧없는 시간이 영원한 진리에 귀의하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본 것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불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은 예언자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런 환상적인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는 그런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환의 시대에 엘리사가 본 것은 불 말이나 불 수레가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언자는 흔히 강력한 존재로 알려집니다. 기적을 펼치는 능력을 갖추고, 하나님의 계시를 뚫어보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본질을 말하자면, 그는 강력하기보다는 취약한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자율적인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취약성이 역설적으로 위대하게 만듭니다.

전환의 시대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엘리사가 본 것은 무엇이며, 그를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믿음이며, 사랑이지 않을까요? 변하고 있는 사태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게 하는 안목은 믿음이요, 다가오는 시대를 진정으로 여는 힘은 사랑입니다. 불 말과 불 수레가 사라진 하늘은 알 수 없는 영역이듯이,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현존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그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지는 만큼, 가야 할 그의 길 또한 분명해질 것입니다.

 

[두려움의 초막 대신 할 일 / 마가복음 92-9]

주현절 마지막 주일은 변모 주일’(transfiguration Sunday)로서, 복음서 본문은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위대한 예언자들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빛나는 모습에 관한 것이지만, 그 가르침은 산 위에서 두려움의 초막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산 밑으로 주님과 함께 내려가는 것에 있습니다.

스승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간 세 명의 제자는 황홀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초막 세 채를 지어 모시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한 말이요, 겁에 질려서 한 말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제자들은 황홀한 장면을 보았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제자들은 환멸의 경험을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듭니다. 환상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이 봤던 것은 사실이었을까요? 거기서 봤던 환상이 과연 제자들을 지혜롭고, 용기 있게 하는 진실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음성은 그들에게서 환상을 지웠습니다.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고 말하는 성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두려움의 천막을 짓는 대신 하산을 택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당부합니다. ‘여기서 본 것을 부활의 때까지 말하지 마라.’ 무슨 의미일까요? 부활을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을 테니,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메시아에 대해 헛된 기대를 하는 환상을 유포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복음서 본문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동행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깊은 도전이 있습니다. 자기만족에 머물 수 없도록 이끄는 믿음의 충동이 있습니다. 수난의 자리로 들어가는 스승과 동행하는 것이 제자들을 괴롭혔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동행하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그의 고난에 참여할 때 열릴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교리적 이성이 만족했던 신은 대체로 편협했습니다. 제한된 이성이 설명할수록 하나님의 신비는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주장이 앞선 종교는 편협해지기 마련입니다. 믿음이 이끌고, 사랑이 키우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은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면, 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분을 믿을 때, 그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오는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춰주셔서, 우리 안에 깃든 당신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참된 지식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복음의 빛이 비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힘은 사랑에서 솟아납니다. 두려움의 천막을 짓지 말고 예수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갑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열리는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사랑이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지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