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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십자가의 언어 | 이성환 | 2018-03-25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6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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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3-25

십자가의 언어

 

사50:4-9, 빌2:5-11, 막14:1-15, 47

 

2018.03.05. 종려주일

 

평안하십니까. 이렇게 안부를 묻는 평범한 인사말이 반갑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왠지 모를 기쁨과 설렘, 뿌듯함이 우리 안에 풍성해 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멀지마는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전직 대통령이 그 죗값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언뜻 드는 느낌은 이랬습니다. ‘이게 과연 기뻐할 일일까’, 이런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일들을 되짚어보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분노하고 슬퍼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할수록 아, 아니구나. 기뻐할 만하구나, 그의 구속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잠시나마 누리는 것도 죄가 되지는 않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되돌리게 됩니다. 광우병 소고기, 용산참사, 사대강, 자원비리, 방산비리, 천안함 의혹까지 아직도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그의 죄가 여전히 크고 많음을 보면서 촛불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촛불혁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이 땅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촛불혁명은 우리 삶의 곳곳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Metoo운동은 단지 우리 사회내의 비리와 부조리만 없앤다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관습, 생활 속 깊이 박혀있는 권위주의와 남성중심의 체제를, 우리의 의식자체를 바꾸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노동과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은 요원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혁명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오후 안산에서 세월호 유족들과 드린 예배에서 많은 이들이 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월호 사건이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는 영석 아버지는 그날은 지난 4년간의 세월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하면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방문이 그날 서로에게 위로가 된 것 같아 소중하고 고맙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는 4주기를 맞아 분향소를 비롯한 관련 시설들을 철거한다고 하니 지난 주 안산 분향소에서의 예배가 우리로서는 마지막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예배 후 방문한 세월호 분향소의 공기는 2년 전에 찾은 세월호 분향소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2년 전 3월 분향소에 들어섰을 때 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혼이 당시 정권의 악령과 대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아이들의 발랄함이 느껴졌고 평화롭기까지 했습니다. 감수성과 공감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제가 느꼈다면 많은 분들이 동감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죠. 촛불혁명은 한반도 정세까지 바꿔놓았습니다. 아니, 전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해도 전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가을 김희헌 목사님이 ‘교회 밖에 걸린 플래카드 세 개중 하나는 우리의 힘으로 떼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때 그 말의 의미는 셋 중에 왼쪽에 있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구호가 적힌 것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요원한 길이라고, 현실이 되더라도 먼 훗날의 일이라고, 그렇게 관성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남북, 북미 간 정상회담이 우리의 기도와 염원대로 이뤄진다면 향린교회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플래카드를 우리의 손으로 걷을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편으로 상당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적같이 온다는 말은 성서에만 있었지 그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죠. 소위 종말론적 신앙으로 삶을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반성의 지점은 좀처럼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죄 많고 모순된 세상을 대하는 저의 태도와 그 방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자세로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커녕 문익환 목사님의 ‘통일은 됐어’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의 기개를 저에게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언에 그치는 운동, 말로만 하는 구호를 너머 내 삶을, 전 존재를 내던지는 그런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 정도면 됐어, 그만하면 됐어, 이렇게 엄존하는 현실의 벽을 인정한 채 타협하며 살아왔던 과거를 반성하게 됩니다. 이런 저에게 오늘 주어진 하늘 말씀은 많은 울림을 줍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 이사야 50:4-9

 

오늘 이사야 말씀은 소위 하나님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대목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쓰인 제2이사야서에는 고난 받는 종이나 하나님의 종의 노래와 같이 비슷한 형식의 말씀들이 네 군데 정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시한 구절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오늘 이사야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난을 이길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학자와 같은 말을 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50장 4절에 해당되는 내용인데요, 이것을 직역하면 ‘학자의 혀를 주셔서’ 이렇게 됩니다. 이것을 의역한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솜씨를 주셨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하는 능력은 무엇을 하는 데 쓰입니까? 지친사람을 말로 격려하는데 쓰입니다. 보통 학자와 같은 말솜씨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토론을 하죠. 때로는 논쟁을 합니다. 상대방을 내가 가진 논리로 굴복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어를 주신 이유는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를 건네라는 것입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다는 것은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었고 앞으로 닥칠 고난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고 내 수염을 뽑는 자에게 내 뺨을 맡깁니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는 자들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제2이사야서는 민족이 흩어지고 수많은 이들이 타향에서 징역살이나 다름없는 포로의 삶을 사는 가운데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묶인 상황을 슬퍼하면서도 해방을 노래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선언을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들었을 때 그 소리는 미친 소리죠. 

 

그들이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다고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온갖 수모와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내가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 이런 것들이 바로 절망을 희망으로 뒤집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2:5-11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겸손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진실과 대의에 복무하는 믿음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사라는 대의에 동의하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서 그렇게 겸손하게, 겸양의 마음을 품고 살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바울의 권면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품어야할 예수의 마음은 겸손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이제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묵상해야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2천년 역사와 신학, 모든 교리와 도그마 중 이 십자가를 없앤다면 기독교는 그저 윤리학의 잡설로 난무하는 사조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기독교의 심장과 같은 이 십자가를 정작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어 이 시대의 십자가, 관계 가운데 존재하는 십자가, 내 마음에 있는 십자가를 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혁명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죽기까지 낮추고 결국 죽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 발아래 무릎 꿇고 그를 그리스도라고 구원자라고 많은 이들이 고백했다고 전합니다. 

 

결국 바울이 권면하는 예수의 마음은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언어, 마가복음14:1-15

 

오늘 본문 중 마가복음은 유월절과 무교절이 시작하기 이틀 전과 유월절과 무교절이 시작하는 날, 이렇게 두 시기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어느 여인이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이고 다른 이야기는 유월절 만찬의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 사이에 유다의 변심과 실행이 들어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아시다시피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서를 이루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면 1성서에는 출애굽 사건이고 2성서에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 가운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오늘 마가복음을 포함한 공관복음의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에 예수는 베다니 시몬의 집에 머뭅니다. 그곳에서 어느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매우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니 보통 노동자의 1년 치 연봉정도로 추정됩니다. 그곳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아니 왜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었겠다. 이렇게 비난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두둔합니다.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내 장례를 위하여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것이다. 세상 그 어느 곳이라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그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그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은 후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예수를 넘길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유다는 은화를 약속받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갑작스런 배반은 참으로 뜬금없습니다. 그 연유를 본문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향유를 예수께 바친 사건을 통해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유다는 그때 예수에게 보낸 마음을 거둬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는 그 여인을 꾸짖는 사람이 유다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 운동에도 가담했지만 젤롯당이라는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조직에도 몸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가의 향유를 예수에게 바치는 그 여인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란 것이죠. “아니 그게 얼마짜린데, 차라리 그걸 팔아서 불우이웃을 도와야지!” 유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일 수 있습니다. 민족해방이라는, 로마축출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이 거기에 복무해야 하는데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그 향유를 그렇게 쉽게 허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스승인 예수님이 외려 그녀를 두둔하다니, 아, 내가 예수를 잘못 봤네. 이러면서 대제사장에게 갔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이 이미 예수를 넘어섰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여기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나눔을 논하는 자와 나눔을 행하는 여인간의 분명한 대비가 나타납니다. 그 결과 또한 극명히 갈립니다. 나눔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나눔은 이론에 머물러 있을 때 아름답고 고상한 법입니다. 그러나 나눔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때 지극히 위험해 지는 것입니다. 아마존 원주민 부락을 비롯해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존재하는 그 어떤 사회나 체제도 이 분배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역사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눔을 받는 사람은 굴종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나누는 사람은 군림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나눔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 말도 나눔을 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인처럼 나눔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필요한 언어는 나눔을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점은 평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죠. 비상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배신이후 유월절 만찬의 자리가 마련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자리가 바로 최후의 만찬자리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베다니 시몬에 집에서의 향유 사건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의 시간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하늘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된 자라면 이러한 비상의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예수를 기억할 만한, 예수를 기릴 만한 사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십자가의 언어란 말이나 논리가 선행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이론과 사상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고백적 행위를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십자가를 몸으로 지는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의 십자가를 감당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번 주 시작되는 고난주간 동안 사람의 언어, 논리와 이성의 언어가 아닌 십자가의 말하기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언어가운데 머무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사는 부활 사건의 증인들로, 십자가 사건의 증인들로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십시오. 

그리하여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십자가 사건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언하는 부활의 증언자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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