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무지개 (창 9:8-17, 벧전 3:18-22, 막 1:9-15)
2021.02.21. 사순절 첫째 주일
[노나메기와 한발띠기]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 삶을 성찰하는 사십 일을 뜻합니다. 성서에서 사십 일은 정화의 시간이자 거듭남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노아 시대 40일간의 홍수, 십계명을 받기 전 모세의 40일 금식, 출애굽 백성의 광야 생활 40년, 예수의 40일 광야시험 등 사순(四旬)의 시간은 성찰과 변화를 위해 필요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올해 사순절은 이곳 명동의 예배당을 떠나기 전에 있는 마지막 절기라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괴로운 상황도 신앙공동체의 본질적인 의미를 깊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촛불 혁명 이후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4년이 흐르도록 촛불이 바라던 개혁과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답답함이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권교체의 동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세월호참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고,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민중 생존권 문제는 더욱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런 답보상황에서 지난주 백기완 선생의 소천(召天)은 큰 울림을 줍니다. 민중의 시대를 열기 위해 한평생 살아오신 분이 떠나며 우리 사회에 남긴 가르침이 적지 않습니다. 장례 기간에 반복된 백 선생님의 가르침은 두 개의 단어에 담겼습니다. 하나는 ‘노나메기’이고, 다른 하나는 ‘한발띠기’입니다. 노나메기는 우리 사회가 향해야 할 목표로서, ‘모두가 함께 일해서 잘 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입니다.
‘한발띠기’는 ‘노나메기’ 세상을 향한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백기완 선생이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인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독방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쓴 ‘묏비나리’라는 시의 시작부에 나오는 말입니다. “맨 첫발 /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 중심이 안 잡히나니 /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진정으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온 정성을 모으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한 발을 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에서 사순절이란 노나메기와 한발띠기를 생각하는 기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노나메기 세상과 그것을 위해 해야 할 한발띠기가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 향린의 ‘노나메기’ 과제는 무엇일까요?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모두 보람을 느끼면서, 교회 안팎으로도 올바르다고 여겨질 목표를 갖는 것이,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의 핵심사안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과거를 탈피하는 변신이 아니라, 전통을 시대에 맞게 확대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향린’ 하면 우리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고, 또 외부에서 기대하는 바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 공동체가 68년간 지켜온 전통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저는 그것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교리적 속박에 매이지 않는 ‘신학적 진취성’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회역사적 책임감’입니다. 앞으로 2년 후 교회창립 70주년에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안에서 어떤 ‘한발띠기’를 하느냐가 그 후의 운명을 가를 것이니, 거시적 안목을 갖고 오늘의 일을 해결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짐을 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지개, 하나님의 반성문 / 창세기 9장 8-17절]
기독교회가 오랫동안 사순절 묵상 자료로 삼은 것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입니다. 홍수사건의 겉모양은 지구적 대재앙이지만, 그 속 의미는 옛 질서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입니다. 이런 원형적인 의미 때문에, 홍수설화는 성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J. G. 프레이저, 인류민속학, 149-319)
창세기 6장부터 9장에 나오는 홍수설화는 어떤 특정한 목격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여러 자료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자료 층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원전 10세기경에 편집된 것으로 알려진 ‘J문서’(야휘스트 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삼사백 년이 흐른 포로기 이후의 ‘P문서’(제사 문서)입니다.
예를 들어, 배에 탄 동물의 숫자에 대해서, J문서는 ‘정결한 동물은 일곱 쌍, 부정한 동물은 두 쌍’을 태웠다고 하고(7:2), P문서는 ‘모두 암수 한 쌍’이었다고 합니다. 6:19) 또한, 홍수의 원인과 기간에 대해서, J문서는 비가 40일간 내렸다고 하며 (7:4/17, 8:6-12), P문서는 비만 온 게 아니라 지하의 샘도 터졌고 (7:11, 8:2) 150일 동안 물이 찼다가 150일간 물이 빠졌다(7:24, 8:3)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통해서, 이 이야기가 수백 년 동안 신앙공동체 안에서 반복되었고, 그 내용이 수정되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홍수설화는 단지 ‘세상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심판의 선언’이지만, 마지막은 ‘약속에 대한 맹세’(9:8-11)로 끝납니다.
6장 13절을 보면, 분노에 찬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그래서 이윽고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배에 타지 못한 사람들과 동물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를 이뤘을까요?
성서는 ‘홍수가 끝나고 나서도 인간의 심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8:21) 따라서, 만일 심판을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하나님은 실패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형태로 최종 완성된 이 이야기는 다른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생명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노아와 ‘약속의 맹세’를 합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희와 숨 쉬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이 고백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이키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다시는 멸종의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인데, 이것은 마치 ‘폭력적인 신’이 ‘연민의 신’으로 환골탈태하는 과정에서 쓴 하나의 ‘반성문’처럼 보입니다.
그 배경은 J문서와 P문서 사이의 신학적 간격에 있다고 봅니다. 자료 층으로 보면, 오늘 본문은 포로기 이후에 완성된 P문서 안에 들어있습니다. P문서는 포로들의 절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왕조의 위엄을 살리는 일에 관심하는 J문서 시대의 신과는 달랐습니다.
포로기의 하나님은, 포로들의 삶이 아무리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신이었습니다. 포로 생활이 아무리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허무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고달픈 역사에 흐르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를 꺾지 않습니다. 따라서, 수백 년간 전해져온 포로기 이후의 창조설화에서, 하나님은 심판하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을 버리고, 무지개의 약속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반성문’이라 하겠는데, 그것은 또한 신의 이름으로 선포된 ‘폭력종식 선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홍수 이야기는 신의 분노와 심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절망의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고단한 시대라고 하더라도 ‘역사의 무지개’가 뜨면,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의 무지개를 대표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인류의 역사는 작고 이름 없는 그리스도의 무지개가 뜨고 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존재가 희망이 되는 종교 /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가끔 신학적 비애를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역사의 숨결을 잃은 관념종교의 가르침이 교회를 지배할 때입니다. 역사의 무지개처럼 떠야 할 예수 운동이 관념화되면, 성서의 가르침은 교리로 왜소화되고, 신앙공동체는 길을 잃습니다. 이때 성서의 가르침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는데, 그것은 교리의 오래된 지층에 묻혀 있던 신학적 진실을 재발견하는 작업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본문은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전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공식화된 이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은 예수의 죽음이 불의한 사람을 위한 의인의 죽음이요,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살아나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을 노아의 홍수사건과 연결합니다. 홍수사건을 우주적인 세례로 보고, 그 세례의 의미를 단지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하는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 내용은 각 구절을 깊이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홍수라는 죽음의 사태에서 교차하는 어둠과 빛의 감각, 역사의 끝처럼 느껴진 총체적 절망에서 시작되는 신의 촉발적 구원에 관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자, 죄악에 물든 삶에서 솟구치는 선한 양심들의 응답입니다. 교회는 거기에서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을 발견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천사와 권세와 능력’이라는 외적인 힘의 징표에 매달리기보다,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 자체가 역사의 희망이 되도록 격려하는 종교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종교의 영원한 좌표인 예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마가복음 1장 9-15절]
마가복음 1장 본문은 예수의 공적인 삶이 준비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먼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시험을 통과한 후, 때가 되자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에게 세례는 미래를 향해 삶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새로운 세계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뚜렷하게 의식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 일은 돈과 권력과 힘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서 생기는 두려움과 욕망을 이겨내는 길고 어려운 훈련을 요청합니다. 예수의 광야시험이 그것을 상징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뜻에 가닿으려는 열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광야로 내보낸 이는 ‘성령’이었다는 성서의 묘사는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의 영욕에 길들지 않는 꿈이 길러지는 광야 에레모스, 생명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는 빈들 에레모스, 모든 것과 단절된 채 오직 한 분에게 집중하는 장소 에레모스, 바로 그곳으로 예수를 내보낸 이는 ‘성령’입니다. 그의 광야시험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이루어지는 사건이요, 강건하고도 섬세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 사건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난 후에, 예수께서 전한 복음선포는 네 가지 내용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15절)
‘때가 찼다’는 말은 역사의 시간이 변하지 않는 듯이 보여도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선언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카이로스로 충만해졌다’는 이 말씀은 ‘낡은 질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세계 인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배신과 좌절이 이어진 시절의 부패 속에서도 역사의 지평선 위로 무지개가 뜰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기초하여 하늘의 부름과 초대가 이뤄집니다.
그 초대에 응한 사람이 듣는 것은 ‘회개하라’는 목소리입니다. 회개는 새로운 삶의 ‘기획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회개는 보상을 얻기 위한 종교적인 작위가 아니라, 자비로운 세상을 향한 용기 있는 모험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마지막 당부는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붙들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복음을 믿을 때, 역사의 무지개를 보면서 춤추며 나아가는 예수 운동의 진정한 춤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을 걷듯이 민중의 길을 한평생 걸었던 백기완 선생의 시 한 대목을 여기서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벗이여,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한 춤꾼은 비로소 굽이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다행히 우리 역사에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그렇습니다. 그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 사순절에 하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의 시간, 우리 삶에 약속의 무지개가 떠오르기를 빕니다. 코로나로 인해 온 세계가 신음하는 시간, 다시 역사의 무지개가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떨치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해방의 춤을 추면서,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우리 삶을 이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