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일” (사50:4-9a, 빌2:5-11, 막14:1-17)
2021.03.28. 사순절 여섯째주일 / 종려주일 / 제주4.3추모주일
오늘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임박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의 옹립식이었습니다. 민중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열어줄 ‘평화의 왕’을 모시는 의식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민중은 구원을 열망하며 예수를 맞이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흔들리는 종려나무가지 사이로 평화의 왕이 옹립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의 가시는 길 위에 겉옷을 벗어 깔아드리며 구원의 빛으로 오신이를 모셨습니다. 종려나무가지의 이름을 빌려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명명한 데에는, 종려나무 가지에 왕위 옹립의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지배자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지배권력에 반역하는 반란죄로 진압 학살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한다는 것은 기존 왕에 대한 거절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던 민중은 로마권력과 헤롯일가의 패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이스라엘-유대전통에서 전승되는 하나님의 평등세상 약속이 성취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수에게서 메시아의 희망을 찾았고, 예수가 메시아의 권세로 기존 권력을 평정하고 평등세상을 민중에게 안겨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입성에 환호했던 민중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등세상은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적선받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각성하고 함께 연대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임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받을 준비만 하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깨우쳤습니다. 그 어리석음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했음을 회개하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 예수공동체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약속된 평등세상의 희망이 우리를 통하여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때 종려나무가지의 환호는 실로 대단했지만 반전되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메시아의 희망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깊은 암흑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내 재반전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구원의 빛은 깊은 무덤 속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일주일 사이에 벌어지는 반전과 대반전의 이 사건이 그리스도교를 잉태했고, 이 급격한 전개를 재현하고 성찰하면서 ‘고난과 부활’이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논리가 성립되었습니다.
종려주일인 오늘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에 한하여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시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직 첫 번째 반전에 이르기 전, 예루살렘 입성 때의 환호가 채 가시기 전의 시점입니다. 1절에, 유월절기에 매겨진 유대인의 시간관념을 그리스식으로 따져서, 유월절 이틀 전이라고 하니, 수요일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 최고 회의구조였던 산헤드린의 대제사장 그룹과 율법학자 그룹은 예수의 적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대관식을 치른 듯이 입성한 예수를 함부로 잡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민중의 봉기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호산나, 종려나무가지의 환호는 대단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에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서 여러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문득 한 여인이 등장하여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함께 식사를 하던 몇몇 사람이 그 여인을 비난합니다. 1년 수입에 해당되는 값비싼 그 향유를,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 일에 쓸 일이지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는 비난이었습니다. 유월절 명절이 되면 구제사업에 조금더 신경을 썼던 유대 관례에 충실했던 그들의 비난은, 직접적으로 그 여인에게 향하여 있었지만, 간접적으로는 그것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 예수를 비난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최선을 다해 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일을 비난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목하고자 하는 말씀은, 예수께서 평하신 여인의 “아름다운 일”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번역성서는 ‘좋은/good 일’, ‘옳은/right 일’, ‘갸륵한 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kalon(카론)을, 새번역성서는 ‘아름다운/beautiful 일’로 번역되어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묵상하게 되었고, 여인의 심정에 깊이 들어가보고자 했습니다.
여인의 아름다운 일은 현상적으로 보면, 기름을 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름을 붓는 행위는 긍정적인 행위였습니다. 유대문화에는 손님에게 기름을 발라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바빌론 쪽 유대교에는 결혼한 여자에게 기름방울을 떨어뜨리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대로, 왕을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했고, 장례 후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관례가 유대민족에게 있었습니다. 본문 문맥 상 여인이 예수께 기름을 부은 것은 장례의 의미로 그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메시아로 추대하던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점이었지만, 이와 다르게 여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정사실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기도 무리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미 수차례 제자들에게 수난예고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 역시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게다가 여느 제자들처럼 스승의 수난예고 말씀을 잘 새겨듣기보다, 당시 왕으로 옹립될 분위기에 더 편승한 경박한 제자가 아님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는 그저 이름도 없는 한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맥락을 따지자면 이 여인은 예수의 특별한 제자로 여겨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승이신 예수의 머리에 순도 높은 향유를 부으며 장례의 예를 표했습니다. 8절에서 예수는, “이 여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장례의 예를 행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임당할 예수께 기름부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장례의례를 행했다는 이 말씀에는 곱씹어 새길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름을 부어 장례의례를 행한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수난당하신다는 사실에 공경을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이 여인은 예수의 죽을 운명에도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장례의례가 예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일 수 있었던 데에는, 이같이 수난당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공경하는 마음과,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함께 읽은 빌립보서 말씀으로 향하면서, 여인의 향유의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춘다면 우리 신앙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그 여인이야말로 바울의 이 권면에 합당한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표정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어렸을 때 영화에서 본 그 여인은 향유를 붓고 잠시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금세 퇴장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서의 가부장문화적 관념에 상당히 충실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마음이란 최고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여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기를 결단했습니다. 그런 여인이 향유의례를 행하면서 지었던 표정은 ‘평화’로 가득차 있지 않았을까요? 죽음마저 초극하여 예수와 같이 미소짓는 여인의 표정을 상상해봅니다. 그런 여인에게 값비싼 향유가 아깝다느니 운운하던 말들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렇게 예수와 한 마음을 가지는 것! 그랬던 까닭에 예수께 힘과 위로를 전해준!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표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귀한 향유를 소비하여 예수께 장례의례를 행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와 같은 마음을 지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신비함에까지 이르렀기에 과연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그 신비를 체험했고, 그 신비를 공감했던 예수이셨기에, 여인의 향유의례를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 여인은 예수와 한 마음을 아름답게 공유하고 있었기에, 향유를 머리에 부어 예수의 장례의례를 표한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장례의례를 행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사건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죽었으니 여인은 나와 함께 부활하여 길이 기념될 것이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오늘의 빌립보서 말씀은 바울의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노래하는 찬양시입니다. 이 찬가는 ‘낮춤(6-8절)’과 ‘높임(9-11절)’의 대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낮춤’은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화육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비움이요 순종이요 낮춤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며 십자가에까지 순종하신 이유, 화육하신 그 이유는, 우리의 처지가 세상의 악한 세력 아래에서 종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종이 되어버린 우리와 함께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분, 그리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요약해주는 말로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상선약수(上善若水)’(6장)를 기억합니다. 물과 같이 아래로 흘러서 만물의 생명을 돋우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하나님의 화육은 이와 같습니다. 흘러 내려가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을 살리신 사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상선약수’와 같이 생명이 돋아나는 사건 속에 현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말씀을 개인적, 윤리적 지침 정도의 수준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그 신앙은 매우 관념적이고 모호해집니다. 예수의 마음을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으로써 나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올바른 해석의 열쇠는 “사건 속 현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동참할 때 비로소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메마른 대지에 물이 적셔져 생명이 움트는 현장, 세상의 세력 아래 종이 된 존재들이 해방되는 현장에 현존할 때, 그곳에 가 있을 때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이 세상으로 내려와 성육화 되었다는 말씀에는, 신성이 육화되었다는 질적인 변화와 함께, 위에서 아래로, 공간적 변화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자리에서 물 흐르듯 낮은 자리로, 생명이 갈급한 자리로 내려가도록 우리를 독촉합니다. 이것이 성육신 화육신앙의 요체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역시 향유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자리에서 예수의 장례의례를 거행하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향유의 값어치를 셈하는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 수난에 동참하는 삶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로써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질적 변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이같은 화육신앙에 임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로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요, 진정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앙을 위하여 끊임없이 훈련해가야 할 우리의 과제 중 하나는, 타자와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감수성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으려면 그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함께 애쓰는 우리 모두에게 서로를 위한 감수성의 능력이 요청됩니다.
어제 이 자리에서는 ‘미얀마 봄혁명 희생자 추모기도회’로 모였습니다. 미얀마군부쿠데타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된 320여 분의 희생을 추모하고, 여전히 난무한 폭력 투옥에 고난당하는 미얀마 민주투사들과 깊은 연대를 결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 이토록 감응하며 실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타자의 고통을 한 마음으로 나누는 감수성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주4.3추모주일로도 지키고 있습니다. 제주4.3항쟁, 여순항쟁, 5.18광주민중항쟁, 반독재투쟁, 6월항쟁 등의 뼈아픈 고난의 시절을 지내온 우리네 감수성이 미얀마 민주주의를 함께 열망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연대의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훈련과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투쟁하고 있는 여러 고난의 현장, 연대를 기다리며 생명의 회복을 호소하는 민중의 현장에서 이 신앙의 훈련은 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병행되어야 할 신앙의 훈련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것을 오늘의 이사야서 본분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숱하게 겪는 고난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다는 이유로 맞고 모욕당하고 법정에 고발당하는 일들이 있어도, 그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시기 때문’(4절)이라고 고백합니다. 아침마다 늘 새롭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흔들어 깨워주시기 때문에, 믿음에 대하여, 예언에 대하여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 그 예언은 임의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귀를 깨워 늘 새롭게 들려주시는 말씀만을 대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핍박에 굴하여 지쳐버리면 믿음이 사라지고 아침마다 하루하루 새롭게 나를 일깨워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예언자가 될 수 없게 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나를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자여야 합니다.(8절) 기도와 침묵과 묵상의 시간을 가져 잠잠히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반추하는 자라야 예언자의 신앙을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신앙의 깊은 샘물을 길어올리는 사람이라야 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예언자의 신앙인이 된다는 사실을, 오늘 이사야의 신뢰시로써 다시금 깨우치게 됩니다.
타자와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감수성의 능력은, 내적으로는 기도로, 외적으로 예수사건의 현장에서 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훈련으로 강화된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고, 우리 서로 한 가족을 이루어, 약속된 평등세상,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믿으며 또한 소망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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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칭함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일을 도모합시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견고히 하여,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사람이 되도록 힘씁시다. 함께 기도하고, 이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함께 짊어집시다. 결국 이 세상을 아름답게 완성하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또한 아름답게 보듬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