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부활 | 김희헌 | 2021-04-04

by 김희헌 posted Apr 04, 2021 Views 217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1-04-0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오늘의 부활 (25:6-9, 고전 15:1-11, 20:1-18)

2021.04.04. 부활주일 / 씨뿌림주일

 

[기독교 부활 신앙]

부활주일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고난을 겪는 민중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절 성서 묵상의 주제는 죽음을 이겨낸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오늘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실에 관한 것입니다.

자연에서 피어난 생명의 모습은 확연합니다. 겨울을 이겨낸 생명이 거리마다 꽃으로 피면서 봄기운을 몰고 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모습은 도리어 계절이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코로나가 길어지는 만큼 고통과 위기는 깊어지고, 촛불 혁명의 과제는 사라진 채, 권력을 얻으려는 모략과 술수가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거짓과 폭력에 기댄 세력이 권력을 갖는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가 올라야 할 수난의 언덕이 더 남은 듯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활 사상인데, 그것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종교적 이해이기도 합니다. 죽음 이후의 영생에 대한 관념은 대부분 종교가 갖고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서로 다른데, 기독교가 주목하는 점은 죽임의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관심은 주검을 둘러싼 사회적 관습도 아니요, 죽음에 관한 철학적 깨달음도 아니라, 죽임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에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여기기보다는, 당돌하게도 극복할 대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13:14, 6:9, 고전 15:55, 21:4)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 다시 말해서,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것도, 환난도, 곤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이나 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8:35)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생물학적 불멸에 관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죽어야 부활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죽기 전에 경험되어지는 것이 부활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저 세상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이 역사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활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펼쳐가시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실제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해’, 성서가 지닌 독특한 신관’(theism)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역사에서 부활 사상이 뚜렷하게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서의 증언은 훨씬 이전부터 등장합니다. 올해 부활절 본문인 이사야서 25장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죽음의 질서를 벗겨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성서의 꿈, 부활을 보게 하는 믿음 / 이사야서 256-9]

이사야서 25장은 이사야의 묵시록으로 알려진 24~27장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묵시록의 흐름 속에서, 구원과 회복에 관한 믿음이 선포됩니다. 묵시록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제1 이사야가 살았던 기원전 8세기보다는 후대로서, 유대가 바빌론에 패망한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Feasting on the Word, B2, 361)

그 시대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죽임의 사태였습니다. 삶은 파괴되었고, 가치관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경솔하고 섣부른 유신론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화해버렸으며, 오래된 신념은 부서지기 쉬운 진리처럼 여겨졌습니다. 무언가를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무의미하고 가혹하게 느껴지는 때였습니다. 이런 죽음의 시대에 믿음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언자가 주목한 것은 성서의 신앙공동체가 오랫동안 길러온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1) 모든 생명을 길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 2) 탄식하는 피조물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의 하나님, 3) 사랑으로 돌보아주시는 은총의 하나님에 관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서의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세 개의 기둥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여기서 죽음의 질서를 넘어 생명의 부활을 꿈꾸는 믿음이 등장합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이것은 모든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7-8절은 회복과 구원의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여기서 슬픔을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죽음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합니다.

마지막 9절은 믿음의 찬양이 울립니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사야가 선포하는 이 모든 언어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시대의 회복이요, 하나님과의 동행이 진리의 귀환이라는 성서의 근본이해를 대변합니다. 죽음의 질서를 벗겨내는 정직한 길, 부활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올바른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죽음의 경험 바탕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로 이어지고, 결국 자기 자신과의 단절로 귀결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탐욕적인 소비 문명과 생태계의 위기, 폭력에 기초한 냉전체제의 재구축과 사회적 불평등, 노동의 착취와 생명 경시로 인한 각종 참사, 형식화된 민주주의의 위기와 혐오의 일상화, 제도화된 차별과 배제로 인한 사회적 타살 등 우리 사회의 비극도,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와 구원과 사랑에 대한 공동체적 비전을 갖지 못한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 시대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동트는 부활의 아침을 열어가는 공동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마리아 / 요한복음 201-18]

요한복음이 기록한 부활절 아침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동트는 새벽을 배경으로 복수의 여인을 등장인물로 내세우지만, 요한복음은 아직 어두운’(σκοτίας τι, still dark) 때에 마리아 혼자서 예수의 무덤을 찾는 사람으로 그립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며 기록을 시작한 요한복음서는 아직 어두운때에 활동을 시작한 이 여인의 독보적인 활동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부활체험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네 복음서는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의 경험을 저마다 다르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모두 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있는데, 그것은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여기서 시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부활을 이해할 때, 흔히 사체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 사건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사실 기독교 부활 신앙을 말하기엔 빈약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그런 기적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부활 신앙을 지키기 어렵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성경에 여럿이 있고, 성서가 기록되던 시기에 죽은 이의 소생에 관한 이야기는 비일비재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실증주의 과학의 눈에 죽은 이의 소생이란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과학의 주장과는 반대로 믿는 것을 마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과 종교 중에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만 끝나는 싸움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비과학적 종교인이 되거나 과학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제로섬 게임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부활(resurrection)을 사체소생(resuscitation)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솔직하고 대담한 대화를 한 신학자는 Marcus BorgTom Wright입니다. 마커스 보그는 루터교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 미국 성서학회(SBL)에서 역사적 연구분과를 이끌던 분이고, 톰 라이트는 영국 성공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주임신부로 존경받던 분입니다.

이들은 이런 가정을 했습니다. 만일 무덤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3일간 관찰하면, 예수님의 시체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마커스 보그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톰 라이트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답을 말했지만, 두 분 모두 여전히 존경을 받습니다. (<예수의 의미>, 202-3)

이들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교훈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서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의 진리값은 그 기록의 역사적/문자적 사실성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성서의 부활 이야기는 신화적이고 종말론적인 은유로 가득 차 있기에, 그 의미를 탐구하는 데에는 과학적 사실주의와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활에 관한 성서의 증언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톰 라이트는 부활의 의미를 하나님의 정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하는 것에 있다고 봤고, 마커스 보그는 현재의 새로운 창조, ‘거룩한 소명의식으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삶의 방식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도 오늘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을 보면, 마리아와 두 남성 제자는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돌아간 후 마리아 혼자 남았을 때 부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먼저 마리아에게 다가와서, ‘누구를 찾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간주하여 말합니다. ‘당신이 그분을 어디로 옮겨 두었냐. 그때 예수께서 마리아!’ 하고 부르자, 비로소 마리아는 예수를 알아봅니다.

여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왜 마리아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부활이 새로운 변화라는 점입니다. 부활한 몸도 새로운 몸이지만, 부활을 목격하는 사람도 새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부활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예수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7)

왜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성서 번역본은 이 문장을 세 가지로 번역합니다. 1) 개역성서와 KJV나를 만지지 말라’ (Touch me not!), 2) 개역개정과 공동번역, NRSV 등 다수는 나를 붙잡지 말라’ (Do not hold on to me), 3) 소수의 성경은 나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번역. (Stop cling to me! (NASB) / Do not cling to me (NKJV))

이 세 가지 해석 가운데, 어떤 해석을 택하시렵니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세 가지 자세처럼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듣고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그는 과거의 예수만을 찾지 않고, 부활 예수가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것이 요한이 기록한 첫 번째 부활의 증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주목한 믿음의 자리 / 고린도전서 151-11]

고린도전서 본문은 그리스도 부활체험에 관한 바울의 증언입니다. 바울의 이 증언은 시기적으로 요한복음보다 약 30년 앞선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덜 가공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예수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을 하나씩 열거하며, 맨 마지막에 자신을 놓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그다음에는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에게,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그다음에는 모든 사도에게, 맨 나중에는 달이 차지 못하고 난 자와 같은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신에 대한 바울의 묘사입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오늘의 자신이 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격 없는 자의 은혜 체험에 관한 바울의 고백은 종교적 고백과 삶의 진실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본래 그에게는 전도양양한 삶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고난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북소리가 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박해하는 삶에서 돌이켜, 생명공동체를 세우는 본질적 문제로 육박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가장 생생하게 예수의 운동을 펼쳐갈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가 예수와 함께 오늘의 부활을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 신앙을 생생하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성숙해 왔습니다. 과거에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란 교회에 소속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중세시대는 그렇게 천 년을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타락해가자 새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교권주의를 떨쳐낸 근대의 교회는 말씀과 교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원이 마치 믿기지 않은 것을 믿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지적 변질이 생겨나면서 부활 신앙은 다른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오늘날 부활 신앙은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시대의 갈릴리에서 생명, 정의, 평화로 피어나는 사건 속에 계시니, 부활체험은 그 그리스도의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된 것입니다. 생태계의 회복과 한반도의 평화, 노동의 정의와 차별의 철폐를 위한 실천과 기도 속에서, 탐욕으로부터 풀려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부활을 사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올해 부활주일은 또한 씨뿌림주일입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씨앗을 심어가며 오늘의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파송사]

부활이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곳에 주목하십시오.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자리에 참여하십시오. 욕망과 탐욕을 씻어내고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내려가서, 절망과 좌절을 거두고 생명과 평화의 언덕을 오르십시오. 그렇게 오늘의 부활에 참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