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문법 | 김희헌 | 2021-04-18

by 김희헌 posted Apr 18, 2021 Views 18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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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문법 (3:12-19, 요일 3:1-7, 24:36b-40)

2021.04.18. 부활절 셋째 주일, 4.19혁명기념주일, 장애인차별철폐주일

 

[고통의 시대를 위한 진보의 새로운 문법, 종교의 오래된 미래]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사회적 피로도 따라서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거대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현실 문제에 대처하느라고 개혁적인 조처는 유보되고, 사회적 생동감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위한 화두로 질서와 생존이 두드러지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통쾌한 실험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지난 보궐선거에서는 보수세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개혁적인 흐름이 퇴조하고, 진보의 목소리가 약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진보 세력이 기득권에 편입되거나, 자기주장에 매몰되어 설득력을 잃거나, 대립과 분열로 파편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보 담론이 자기주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조화와 연대를 구축하는 공동체적 구상에 취약합니다. 새로운 문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맞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우리 문명의 특징과 한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사태는 자본주의 소비 문명이 지난 삼백 년간 저질러 온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약탈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고통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약회사의 백신은 일시적인 방편일 것이고, 결국에는 탈자본주의적 르네상스를 어떻게든지 거쳐야만 할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와 함께 불거진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는 삶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성장과 축복을 향한 욕망에 지배당해 왔습니다. 그 이전의 한 세대는 분단신학의 적대적 이데올로기로 깊이 물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기독교 선교 초기의 활력을 잃고, 기독교의 본질적 특성이라 할만한 가치를 잃었습니다. 신학적 근본주의, 정치적 반북주의, 종교적 배타주의가 기독교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는 교회의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운동의 특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긍휼의 마음, 자신을 비우는 청빈의 영성, 다양성 속의 일치와 타자를 향한 포용의 정신, 불의에 대한 저항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변혁적 정신 등을 길러낼 새로운 문법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교회의 길을 물어야 할 형편입니다. 교회마다 처한 형편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걸어야 할 길은 다양할 것입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는 그것을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안병무 선생님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고민 역시 오늘 우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진 한국교회를 되살리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신앙인이었고, 역사와 함께하는 교회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궁리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에 먼저 그는 구도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평신도 중심의 신앙공동체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운동은 처음에는 수도적 생활공동체운동으로 실험되다가, 나중에는 고난받는 민중의 삶의 현장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본질을 찾으려는 운동으로 전개되어갔습니다.

안병무에게 교회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 양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교리와 교권에 의해서 주도되는 종교집단으로서의 교회는 온몸으로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 운동을 이어가는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온 삶을 바쳐 이뤄가야 할 그 무엇이었습니다. 안병무는 확립된 제도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했지만,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고 하는 신앙공동체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긍정을 한 것입니다.

훗날 한 편지에서 안병무는 자신이 교회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려고애썼다고 술회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와 교권을 일생 거부했지만, 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산 것은 기독교를 세상에 나오게 한 장본인인 예수 때문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안병무는 예수를 향한 신앙의 열정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살리려는 진심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매우 헌신적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신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자 치열했던 것도 신앙공동체를 통해 이루려고 한 그의 구도자적 열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기성교회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예수 운동을 현실에 되살려내려는 열망의 뒷모습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늘날 많은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욕망을 키우는 종교, 무언가를 소비하려는 마음에 먹잇감을 던져주는 종교를 거부했고, 율법과 교리에 집착해서 영혼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종교도 거부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교회의 자리는 피조물이 신음하고 진통하는 자리였고, 그가 찾았던 교회의 사명은 신음하는 피조물이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들를 길러내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자신의 종교적 삶을 헌신적으로 밀고 갔습니다.

안병무는 평생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서른 살의 평신도 설교자로서 일신교회(1947)를 첫 번째로 세웠고, 서른여섯 살에 동지들과 함께 향린교회(1953), 오십 대에는 문익환 서남동 등 동료 해직 교수들과 함께 갈릴리교회(1975)를 세우고, 육십 대가 되어서는 개신교 수도공동체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1980), 칠십이 되어서도 예전과 설교에서 실험적인 한백교회(1987)를 제자들과 함께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신학자로서의 정체성 못지않게, 그가 얼마나 교회적인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안병무 자신의 개인적 실험과 성취도 그러려니와,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커다란 영향을 보려면, 그의 생각이 민중신학으로 발전해간 지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민중신학이 꽃피면서 한국교회에도 신학적 모험과 교회적 실험이 잇따랐기 때문입니다.

안병무가 교회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의 글 민중과 교회입니다. 그가 주목한 문제는 민중과 교회의 관계 즉, ‘누구를 위한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관심이 무르익어가면서, 완성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약 10년이 지난 후입니다. 1986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신학자 회의에서, 민중신학의 새 교회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합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 공동체에서 엿볼 수 있는 교회의 본래 모습,” 하지만, 역사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오늘 다시 추구해야 할 참된 교회의 모습을 일곱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민중과 예수의 만남의 장을 기점으로 한 교회. 둘째, 종말의식을 회복하고 민중현장으로 보냄을 받는 공동체. 셋째, 성직자가 독점했던 성서해석권을 민중의 삶으로 되돌려주는 교회. 넷째,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태동하는 교회. 다섯째, 민중 문화 전통을 예배형식 속에 수용하는 교회. 여섯째, 민중 사실 속에 예수 사건이 현재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교회. 일곱째, 민중해방 운동이 예수 사건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교회.

오늘날 교회마다 고유한 사명이 있다면, 향린교회가 가진 사명은 바로 이 일곱 가지의 정신을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의 기초를 예수 정신과 민중 정신의 만남 속에서 찾으려는 이 방향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해서도 본질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오늘 성서 묵상은 신앙공동체를 세워가는 초대교회의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절 성서 일과는 제1성서 대신 사도행전을 대신하여 읽어왔는데, 그것은 아마도 부활절의 묵상주제가 부활하는 공동체와 연관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를 세우는데 필요한 교회의 문법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세 증언 / 사도행전 312~19]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이 설교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통해서 신체적 장애를 고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생계를 위해 사십 년 넘게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구걸하면서 지냈습니다. 자신의 장애로 인해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성전종교는 불구인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었고, 울타리 밖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낫게 하고,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가 일어나서 걷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가 나은 사건을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문법과 다른 교회의 문법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생명을 회복시키는 힘의 뿌리에 관한 이해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치유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12) 베드로는 생명을 회복시키는 능력은 예수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점은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중요합니다. 신앙공동체가 활동할 때 드러나야 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경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공동체는 어긋납니다.

이것은 두 번째의 증언인 메시아와 수난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도 깊이 연관됩니다.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은 메시아의 수난에 참여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문법은 메시아와 수난을 별개로 봅니다. 메시아는 영광과 승리와 관계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수난을 받지 않는다고 보거나, 메시아를 부정하기 위해서 수난의 자리로 내몰아 버립니다. 그러나 수난의 자리에서 메시아를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언자들의 증언입니다. (18)

베드로의 세 번째 증언은 회개하고 돌아옴으로써 죄를 씻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문법이 지닌 특징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인 문법은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에서 안에서 끝까지 관철하려는 자기주장은 무지(ignorance)의 행위일 뿐입니다. 요구되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도덕적인 반성이 아니라 존재의 결심입니다. 과거의 행위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돌이키는 영적인 긴장입니다. 그것이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교회의 문법입니다.

공동체의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영광이 아닌 고난의 자리에서 찾으며, 그곳으로 가기 위해 삶을 돌이키는 것, 이것을 통해서 신앙공동체는 자라납니다.

 

[제자들의 부활체험 / 누가복음 2436b~48]

누가복음서 본문은 제자들의 부활체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깨우쳐주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서, 부활 예수를 만나고서도 그를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37) ‘평화가 있으라는 예수의 말씀도 불안하게만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황이 평화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부활의 사태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혼돈과 공포, 좌절과 죄책감, 슬픔과 의심,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와서 하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부활이 살과 뼈를 가진 생명의 실재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진실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빠르게 변화합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기쁨을 얻습니다. (41), 하지만, 그 기쁨은 여전히 불신을 떨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시자 (45),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관심은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종교의 본질로 여기며 그 너머는 없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시각입니다. 참된 신앙의 특징은 성숙해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에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주며, 기쁨과 화해의 사건에 참여하며 자신을 열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 / 요한일서 31~7]

요한일서의 본문은 교회의 문법이 지닌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 말은 오만한 자기 높임이 아닙니다. 교회만이 가진 고유한 문법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죄를 떠나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앎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입니다.

만일 앎의 문제라면, 성서에 나오는 논리는 기만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만일 이 말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삶의 선언,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믿음의 다짐입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의 특징은 복음을 전하는 예수 자신이 바로 메시지가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복음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추구될만한 존재론적 목적이 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복음이 남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난받는 이들,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부름에 참여하여 생명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교회를 구성합니다.

요한일서의 본문이 말하듯, 교회는 사회와는 다른 문법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 공동체는 정당이나 시민단체와는 다른 질서와 운영원리로써 자신을 세우는 존재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에 머무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진정한 역할을 하려는 실천적 관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실할수록(integral) 변혁적(transformative)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진정한 변혁은 자기 안에서부터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가는 여정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장점이 많습니다.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포부가 있고, 종교 영성의 자유로움과 비판적인 기독 지성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향한 진지함과 실천적 관심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훈련을 하며, 진리가 주는 기쁨으로 헌신을 하며, 믿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서로의 순종도 배워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위해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하듯, 새로운 시대를 지어갈 교회 역시 새로운 문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민중전통을 따른 우리 교회의 오래된 사명이 새 시대에도 꽃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가 먼저 자라나야겠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교우들의 삶을 지켜주시고,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부활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두려움을 벗고, 이 평화를 따라 살아갑시다. 진실한 공동체를 세우고, 그리스도를 따라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교회의 문법을 다시 정비하고, 우리가 지켜온 민중전통을 새롭게 합시다. 그리하여,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신앙인이 되어 힘차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