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시간 | 김희헌 | 2021-05-23

by 김희헌 posted May 23, 2021 Views 16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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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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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시간 (2:1-21, 8:22-27, 15:26-27, 16:4b-15)

성령강림주일 (21052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 새로운 신앙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성령강림절은 예수의 부활 이후 오십일이 된 오순절로서, 원래는 유대인의 농경 축제가 있던 날입니다. 밀 농사를 지어서 얻은 첫 열매로 빵을 만들어 바치던 칠칠절이 그 기원입니다. 성서를 보면 이날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다고 말하기 때문에 (19:1), 거기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담기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계보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고자 하는 신앙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며 삶을 축복하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거룩한 영을 받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새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강림절을 맞는 우리는 메마른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 오시는 성령을 기다립니다. 성령의 시간을 살기를 바라면서, 고통의 심령에는 기쁨을 회복하고, 어두운 마음에는 지혜를 얻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올해 성령강림절에 우리 교회는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모세와 함께한 광야의 사람들처럼 새 시대의 사명을 얻기를 바라며 나아갑니다. 아울러, 이 성령강림절에는 분단된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다시 불기를 갈구합니다. 대결의 시대는 가고 화해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강림 절기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것은, 시간을 살되 성령의 시간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성령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실상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 맘에 하늘의 거룩한 바람은 좀체 불지 않으며, 우리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도 거룩한 바람이 일어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진이 있음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성령의 시간을 살기보다는, 헛똑똑이가 되어 도리어 영적인 질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퍼져있는 영적인 문제는 두 가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성령 근본주의라는 문제가 있고,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성령 허무주의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식을 진행하는 조계사에 한 무리의 기독교 성령 근본주의자들이 몰려가서, 5시간 동안 찬송가를 부르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러 왔다고 외쳤는데, 그것은 성령을 빙자한 난동이라 하겠습니다. 그 모양이 볼썽사나우므로 대부분 기독교인은 심정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져야 할지 난감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는 오랫동안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마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웃 종교에 대한 관용을 함께 품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가 자라온 데에는 다른 종교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서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성서 속의 신앙인들이 처음에는 자기 부족만의 관심이나 배타적 민족주의에 갇혀 있지만, 나라의 패망과 포로기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면서 이웃 나라의 문화와 정신적 자산을 접하게 되었고, 그 가치를 비판적으로 내면화시키면서 믿음의 세계를 확장해 갔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유대적 유산을 내적 역사로 받아들이며 태동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확정된 종교적 가치와 신념을 반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역사를 끊임없이 넓히는 운동을 통해서 존속해왔습니다. 그렇게 과거를 깨뜨리는 위태로움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성령의 돌봄과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성령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성령 허무주의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영감을 인문학적 지식으로 대체하고, 믿음의 문제를 이성으로 판단하는 정신습관에서 생긴 현상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세계를 보는 안목을 잃어버린 이 계몽주의 단계의 신앙은 스스로 지성적이라고 간주하는데, 그 실상은 미적지근한 신앙의 성령 허무주의입니다. 그 삶에 성령의 시간은 없습니다.

성령 허무주의가 생기는 까닭은, 옛 신앙은 버렸지만, 아직 새 믿음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초자연주의적 기적을 벌이는 힘의 신은 마음에서 신빙성을 잃었지만, 새로 만난 하나님, 이 우주와 역사에서 진행되는 미완의 창조과정을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신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물리적 시간을 살고는 있되 성령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진보는 단지 보수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성령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겸손히 비워내고, 거기에 하나님의 신비(mystery)와 영(spirit)과 지혜(wisdom)’를 담는 훈련을 이어가야 합니다. (B. , <교회 다시 살리기>, 162) 오늘의 믿음을 짓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성령의 시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보겠습니다.

 

[성령은 누구인가? / 요한복음 1526-27, 164b-15]

성서를 보면 성령에 대한 많은 묘사가 있는데,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1성서는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로 부르고, 2성서는 그리스어로 프뉴마(πνεμα)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 루아흐는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고 (1:2), 세상 어느 곳에든 계시면서 (139:7), 사람들이 하나님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을 갖도록 인도합니다 (11:2). 2성서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영 프뉴마는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받게 되는 영으로서 (1:1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안내해주며 (5:18),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셔서 (고전 12:4-11),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분(5:22-23)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성령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성령에 관한 자신만의 고유한 이해를 보여줍니다. 요한은 성령을 가리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요한의 문서에만 5번 나오는 독특한 이름인데, (14:16, 14:26, 15:26, 16:7, 요일 2:1) 한글 성서는 그것을 보혜사로 번역하거나 (개역성서, 새번역), ‘협조자’(공동번역) 또는 보호자’(가톨릭성서)로 번역합니다.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이 성령에 대한 이해가 지대했기 때문인지, 나중에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모체가 된 서방교회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령의 이름을 그대로 음역하여 ‘paracletus’로 불렀습니다. 그 문자적 의미는, ‘옆에서/가까이서’ (para, beside/alongside) ‘부르는’ (kaleo, to make a call)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도록 가까이에서 부르고 있는 분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생겨난 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이 기록된 1세기 말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1세대들, 예수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고 그 약속이 파괴된 현실에 직면한 후속세대에게는, 예수가 없는 현실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요한의 대답이 파라클레토스성령입니다.

본문 526절에서 예수는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예수가 없는 현실에서 그를 증언할 존재, 예수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보도록 하며, 예수를 증언하는 삶을 살도록 옆에서 부르는존재가 파라클레토스 성령입니다.

요한에게 성령은 무엇보다 진리의 영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진리로 이해했고 (14:6), 예수가 보낼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부릅니다. 그가 오면 이 세상의 진리가 재구성됩니다. 현실에서 너무도 확연하여 너도나도 숭상해오던 진리는 다시 평가되고,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진리,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오던 진리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본문의 맥락 즉,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는 예수의 약속을 담은 본문의 배경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 직전 2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도 미움을 받고, 하늘 아버지도 미움을 받고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듯 현실에서는 예수의 진리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귀영화로 구성된 가시적인 현실에서 성령의 증거를 찾는 종교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면, 너희도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26b-27)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진리를 말하지만, 모두가 진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요? 요한복음도 진리라는 말을 25번 이상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독자들을 난처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진리에 관한 가장 명료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빌라도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잡혀 온 예수에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18:38, Τί στιν λήθεια?)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 예수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한복음은 진리에 관한 질문은 던지지만, 그 대답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빌라도의 질문에 이어지는 것은 십자가 사건, 목마른 이가 죽어가는 신 부재(不在)의 사태입니다. (19:28) 이것은 예수만 당했던 일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맞아야 하는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핍박당하는 제자들의 현실에 대해서(16:2), 그들의 마음에 쌓인 슬픔에 대해서 말씀합니다(16:6). 하지만, 자신이 머무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보혜사 성령이 와서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주며, 보다 용기 있는 믿음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깨우쳐주실 것은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세 요소, 죄와 의와 심판입니다. 성령은 무엇이 죄(hamartia)인지, 무엇이 의로움(dikaiosuné)인지, 무엇이 진정한 심판(krisis)인지를 알도록 깨우쳐줍니다. 그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평가되는 도덕적 행위나 사회적 평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시간을 살기 위해서 요구되는 본질적 기준에 관한 것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패,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인간의 실패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로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눈이 열려서 볼 것을 봐야 합니다. 예수가 없다 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일을 볼 수 있고 그의 길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심판에 대한 깨달음은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는 질서마저도 결국은 궁극적인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진리의 영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주실 때 비로소 얻게 되는 믿음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삶을 관통하는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시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시간을 산 사람들 / 사도행전 21-21, 로마서 822-27]

사도행전과 로마서 본문은 성령의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강림절의 대표 본문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준 말을 하고,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과 막힘없이 소통하며, 모두가 예언의 꿈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끕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강림 사건은 갈라진 세계를 되살려 갑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방언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간 것은, 인간의 타락과 분열을 상징하는 바벨탑 사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설화를 보면, 인간은 끝없는 욕망으로 탑을 쌓아 올리다 언어가 갈라져서 혼란에 빠졌고 결국 흩어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그렇게 탐욕과 분열로 갈라진 세계를 치유하고 재창조하는 사건으로 일어납니다.

따라서 성령강림의 사건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1:2, 2:7) 바람과 영, 힘찬 하늘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내려와 감쌉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glossa)이 내려앉자, 사람들은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방언(glossa)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온 불의 혀 같은 것사람들이 말한 방언은 같은 단어(γλσσα)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하늘이 주신 말씀을 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그 방언을 듣고 각각 자기 지방의 말(dialekto)로 알아듣는 신기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의 특징은 방언을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 알아듣는 사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분열과 대립을 상징하는 바벨탑의 저주가 완전히 풀립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에게 예언자 요엘의 말씀을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부어주실 때, 남녀노소 모두가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이 예언과 꿈에서 교회의 기원을 찾습니다.

교회는 성령과 함께 시작하며, 교회가 살아가야 할 시간은 성령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이 성령의 시간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감동적으로 말합니다. 성령의 시간은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는 시간이요,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는 시간이요, 함께 인내하며 희망하는 시간입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8:14) 거룩한 성령의 시간에 참여합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당하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또한 세상의 짐을 진 채 신음하고 있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소망이란 보이는 것에 대한 의존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소망의 대상이 아니요, 소망은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소망할 수 있는 까닭은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시간을 사는 것도 우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성령의 시간을 향해 열려있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을 맞아, 기독교의 가장 큰 희망을 다시 기억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자만심이나 이기심보다 크다는 믿음에 있으며, 이 세계의 맹목성과 증오심마저도 하나님의 빛을 피하지 못한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를 질곡의 삶에서 끌어내셔서, 성령의 시간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시간 속에서, 서로 사랑과 기쁨을 나누며, 평화와 친절을 베풀고, 인내와 관용 가운데 서로 신실하고 온유하며, 절제하는 삶을 통해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5:22-23)

이러한 성령강림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노동과 삶에 임하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성령의 시간을 살아갑시다. 진리의 영이 인도하는 길을 걸으며, 이 세상의 아픔에 함께 탄식하고, 함께 인내하며, 함께 희망합시다. 우리 모두 사랑과 기쁨을 나눕시다. 친절을 베풀고, 인내와 관용 가운데 서로를 돌보며, 고난의 시간을 성령의 시간으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