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격 초월 l 김지목 l 2021-05-30

by 김지목 posted May 30, 2021 Views 16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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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격 초월” (사6:1-8, 8:12-17, 3:1-17)

성령강림 후 첫째주일(210530)

 

인류는 참다운 삶,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궁극적으로 참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찾을 때, 인간으로서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으로서 지극히 사람답게 사는 것이것이 인류가 추구해온 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과 종교는 그 방법론를 깨우치고 전수해온, 인류의 발걸음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진리의 완성은 구원받는다는 상징언어로 요약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참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나라를 이룬다는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를 깨우치고, 지고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지요.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상황 속에서도 진리의 삶을 고민하면서, 우리는 이 시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하셔서, 우리의 삶이 조금씩 진리에 가까이 이르게 되기를 빕니다.

 

한편,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도 가져봅니다. 그저 성능 좋은 유기체인 채로 연명하거나, 약육강식을 진정한 평화로 여기는, 다소 하등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법 숭고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으려고 한번 뿐인 삶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삶의 진선미를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우리들의 집념은 과연 무엇이고, 이것은 또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우리의 언어로 말해본다면, 이것은 우리 신앙의 기원에 관한 궁금증입니다.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가르침에 따라 사랑하며 살기를 기꺼이 선택했습니다. 나 자신을 낮추는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예배문을 보다 보면 신앙의 신비여!’ 하며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어주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그런 신앙인이 되기로 스스로 선택을 했다니, 정말 신비한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교회절기 상으로,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선포된 성서는, 성령의 존재와 활동에 관한 내용이 공통으로 증언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신비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6:1-8, 예언자가 환상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내용입니다. 환상 중에 천사들이 왕래하면서 예언자의 소명 수임을 완성시켜주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주님 대신 저를 세상으로 보내어,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소서.” 로마서 8:12-17에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결에서 하나님의 상속을 함께 받는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구원받은 진리의 삶을 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기록된 요한복음서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우칠 수 있는데,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자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니고데모의 신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세 본문을 관통하는 공통주제는,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가 질적인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에게 미치는 힘이라고 선언해주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본문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묵시적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의 절규는 , 내가 이제 죽게 되었구나!’ 였습니다. 하나님의 그 뒷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죽음을 맞이한다는 아주 오래된 고전적 레토릭은, 신과 인간 간의 멀고 먼 간격, 질적 차이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도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통상적인 은유에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한 스랍이 부집게로 제단에 타고 있는 숯을 들어 예언자의 입에 대고서 너는 이제 너의 악이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하고 선포해 줍니다. 그리고 살아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 장면에 주목합니다. 예언자와 하나님 사이가 새롭게 정립되었습니다.

 

로마서로 가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과 영을 구분하고, 우리가 영의 길을 걷는 사람들임을 전제하고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남겨진 고난을 짊어지고 부활의 영광을 차지할 하나님의 상속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천시하고 금욕적으로 자해하며 영의 지혜만을 갈망했던 영지주의의 결말은 탈세속 입니다. 종교가 현실을 떠나 추상화 될 때, 그러한 논리는 지배권력자들의 유용한 정치적 도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 되신다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민중의 평화로운 일상의 소중함을 지켜내고 회복해야 했기에, 영지주의 사상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배담론과 권력을 전복하는 동력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이같은 레퍼토리가 우리 신앙의 뼈대를 이루었고, 오늘날 우리 역시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민중과 연대하면서, 우리 신앙의 결정체를 가다듬고 있습니다.

 

기원후 1-2세기 지중해에는 영지주의 철학이 거대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창시자들은 영지주의 영향 아래에서 교회를 변증해야 했습니다. 초기 사상가들은 영지주의를 선택적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영지주의와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거대담론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점철되는 히브리 사유의 유구한 야훼사상을 온전히 지키고 변호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습니다. 15절에 아빠, 아버지표기를, ‘abba ho pater’라고 해놓았는데, 굳이 히브리어를 차음하여 abba라고 기록해 둔 것은 그때의 투쟁의 한 흔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특별히 강조한 말 아빠, 아버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진심을 읽어야 합니다. 인간이 신을 향하여 친근하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종교, 기독교의 그 차별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을 위엄한 존재로 경외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천자를 숭배토록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신을 경외하고 신에게 복종하듯이, 천자인 황제에게도 그리하라는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경외하는 우리의 하나님은 경외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신이심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신이란 어떤 신인가요? 우리와 함께 아파하는 신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신입니다. 많은 돈으로 숭배하는 인간에게 적선하듯 축복을 내려주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진리 안에서 행복하고 참 생명을 얻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신입니다. 우리가 행복하면 하나님도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빠, 아버지와 친교할 수 있도록 성령이 관계를 맺어주신다고 강조합니다. 성령은, 육적 존재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경지까지 안내해주는 실체입니다.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가능성이며 동력입니다. 바울은 지배권력과 그것에 시중드는 지배종교가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 성령의 활동성과 가능성을 회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에게서,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 곧 하나님 앞에서도 생명을 보존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듯이,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빠, 아버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멀기만 했던 신과 인간의 간격을 질적으로 초월하여, 지배권력에 편승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삶, 권력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아직 성령을 알지 못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인간을 위하여 영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이 정해놓은 율법을 인간은 준수해야 하며,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쳐 섬겨야만 한다는, 왜곡된 신앙의 알고리즘을 절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지배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 여기면서, 그것을 공고히 하는 일이라면 끔찍한 학살이라도 신의 이름으로 집행해버리는 인면수심의 종교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랍비로 존중하게 된 계기는 예수에게서 기적(세메이온)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기적 사건 안에서 사람들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수의 기적사건을 이해하는 중심 코드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질적 변화, 성령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변화시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증언에 중점을 두고 기적 사건을 읽어야 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육적인 것의 양적변화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면 그 신앙은 기복적인 주술행위일 뿐일 것입니다.

 

사실 여기 요한의 본문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 회당 사이에서 첨예하게 벌어졌던 사상투쟁이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로 표현된 은유입니다. 11절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는 말씀에서, ‘내가’ ‘너에게라는 인칭대명사가 우리가’ ‘너희는으로 복수로 표기된 것을 눈여겨보면, 이 구절에서 초기 그리스도교가 생성하던 당시 유대교와의 대립과 갈등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유대교 회당을 향해 던진 요한 공동체의 비판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비판은 한 마디로 율법으로 고착화하는 신앙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분적으로 이미 실현되었음을 전제하고 있었던 반면, 회당은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는 전제 아래 율법준수에 신앙의 승부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성령의 세례가 더해져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성령의 세례란 하늘의 영으로 거듭나는 것, 회개와 새로운 결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의 개념을 들어 비판의 논증을 예리하게 더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는 제1성서에 나타난 두 가지 종교적 상징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대교 회당을 설득하려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인자(사람의 아들)를 설명할 때, 히브리 정서에 익숙한 상징들을 열거하며 설명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사다리입니다. 1:51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구절에서 근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쫓겨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때, 노상에서 자다가 꿈에서 본 사다리’,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고향을 떠나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잘 때 베었던 돌로 제단을 쌓고, 벧엘이라 명명했습니다.

 

요한이 야곱의 사다리를 통해서 설명하고 싶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천상과 지상을 오르내리시는 분, 하늘의 참 생명을 지상에 전해주기 위해 말씀(로고스)이 육신(사르크스)이 되어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새로워지고 부활승천으로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실 분이라는 묘사입니다. 더 이상 벧엘이라는 장소에서 고착화된 성지순례로 구원을 바라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저마다의 우리들에게 내려오셔서 하늘의 생명을 전해주시는 인격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인격체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피조물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신앙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 깃들어있는 두 번째 상징은 모세의 구리뱀입니다.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져야 한다는 대목에서 이것이 설명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사다리로 올라가는 모습이 형상화 됩니다. 구리뱀이 들려 올려졌듯이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 또한 지상에서 천상으로 다시 올라가는 존재라고, 교회는 회당에게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자기부정, 회개와 결단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구리뱀은 광야에서 백성들이 돌이켜 회개했을 때 효력이 발휘되었습니다. 단순히 들려진 구리덩어리가 주술적으로 작동하여, 뱀에 물려 다 죽어가는 백성들을 낫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높이 들려진 구리뱀을 바라보는, 순명하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심하던 패역한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다짐하는 갱신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요한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대신하여 유대교 회당에 던진 비판은, 희생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희생제물에 투여하기만 하고, 신앙인의 참회와 질적 변화, 새로운 존재가 되는 다짐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참다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나라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구리뱀이 올려졌듯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존재의 새로움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신앙 안에서 구원이 온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제도나 체계가 고착되어 더 이상 새로워질 수 없는 유대교 회당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일하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3:13절에, “‘인자 밖에는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고도 하고, 14:6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구절들이 오늘날 한국 상황에서 타종교를 배척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자 밖에는’,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이라고 기록된 배타적인 표현은, 신앙의 고착화를 절대적으로 경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말씀(로고스)’이 우리 안에 진정으로 성육화 되기를, 십자가를 통하여 늘 새로워지기를 늘 소망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공동체 안에 신앙의 역동성이 살아 숨 쉬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능동적으로 변화하며 늘 새로워지라고 우리에게 주신 훈련과제입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의 활동으로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과 참다운 생명을 안겨주는 진정한 힘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활동으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짐을 우리는 믿습니다. 고착화되어가는 신앙을 경계하는 것이 성령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육은 성령을 바람 잡듯이 감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육에 숨으로 들어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의 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육신을 따르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앙의 신비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샘솟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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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 가운데 성령의 활동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우리 교회 안에서 왕성하기를 빕니다.

변화하고, 소명을 받아, 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는,

향린 선교 공동체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