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조물 (삼상 15:34-16:13, 고후 5:6-10, 14-17, 마가 4:26-34)
성령강림절 4, 총회선교주일 (210613)
[역사를 돌아보며,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6월 말 교회 퇴거를 앞두고 이전준비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전준비팀>에서는 교회 구석구석을 살피며 장비와 물품을 파악하여, 가져갈 것과 남길 것을 분류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오랫동안 여기저기에 보관해온 자료와 문서는 하나씩 들춰보면서, 역사자료로 모아놓을 것은 따로 챙기고, 버릴 것 가운데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는 한데 모아서 일괄적으로 파쇄하는 작업도 진행했습니다.
교회 건물 곳곳에는 53년의 역사가 숨어 있어서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던 물품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육성 테이프가 담긴 박스가 나오기도 하고, 오래전에 사용했던 교회 도장이 가득 든 함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옛 교우들의 사진 뭉치와 수십 년 전에 세례를 앞둔 교우들이 쓴 신앙 고백문, 또 특별한 사건과 갈등의 시간을 알려주는 문서들도 불쑥 나타납니다. 우리 교회가 지나온 믿음의 발자국을 보여주는 것은 모두 싸서 이동용 박스에 담습니다.
이렇게 몇 주간을 보내오면서 우리 교회가 명동에서 보낸 반세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광야 생활과 교회건축을 염두에 두고 필요한 물품을 분류하고 배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여정이 어떻게 이어질지를 기대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교우들 모두가 그러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장년 신도회 분들은 오랫동안 교회와 함께 해오셨기에, 이 시간 더욱 각별한 느낌이 드실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과거의 유산을 크게 한번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음속에 드는 여러 상념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물음은 ‘앞으로 나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기준으로 물품을 분류하고, 보관방식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삶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어온 인생의 건축물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 미래를 위해서 가지고 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행진을 해왔다면, 이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믿음의 분투를 저마다 해왔고, 지금도 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경험하는 영적 여정입니다. 이 여정에는 헌신과 노고로 얼룩진 힘겨움도 있고, 그보다 큰 보람과 기쁨 또한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정은 계속됩니다.
[바로 이 사람이다! / 사무엘상 15장 34절 ~ 16장 13절]
성서의 역사 또한 그렇게 이어집니다. 그 모습은 다채롭게 변합니다. 족장들의 시대에서 이집트 노예살이로, 출애굽 광야 생활에서 가나안 정착 사사(士師) 시대로, 왕권을 실험하는 사울의 시대에서 왕조를 확립하는 다윗의 시대로 변해갑니다. 저마다 자기 시대의 영광과 수치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버림받음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될 것인데,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를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시대를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제1성서의 사무엘기상 본문은 아름다웠던 청년 사울의 시대가 저물고 다윗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기록이 다윗 왕조를 미화하는 관점을 갖고 있어서 사울에 대한 냉혹한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만,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그런 비평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들려주는 목소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16장 7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입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이 말씀은 사울을 대신하여 왕위를 이어갈 사람을 찾는 사무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에서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아니다, 봐야 할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lebab)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인간을 대하는 성서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영욕(榮辱)과 성쇠(盛衰)의 장면들을 갖습니다. 누구나 치욕보다는 영예를, 쇠퇴보다는 왕성한 시대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 갈망이 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중심을 세우기보다는 승리주의 정치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역사가 무너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오늘 성서의 이야기에서 그 배역을 다윗이 맡았습니다. 그는 왕을 뽑는 영광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양 떼를 치러 들판에 있었습니다. 그가 부름을 받고 사무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나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다윗의 무엇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셨을까요? 그가 앞으로 이루어갈 모든 것을 신의 전능한 눈으로 본 것을 의미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본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것은 푸르른 생명력, 병들어 기울어진 왕 사울을 악기 하나로 고치는 소년 다윗의 모습, 거대한 골리앗에게 맞서면서도 조약돌 다섯 개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는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는 믿음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도 집중하게 만드는 그 시대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영광의 한복판에 덧없는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다윗도 자기 삶의 승리와 좌절을 반복하면서, 왕권을 둘러싼 영욕의 세월을 사십여 년 보내며 산 한 인간이었을 뿐이었다고 성서는 말할 것입니다. 다윗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모든 삶은 저마다의 등고선을 갖고 오르내리는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 변치 않는 가치를 담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것은 신비롭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en Christo) / 고린도후서 5장 6~10, 14~17절]
이런 ‘인간 상황’에 대한 통찰을 주는 성서 말씀 가운데 오늘 만나는 것은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크게 나눕니다. 하나는 믿음(faith)으로 사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보는 것(sight)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 5:6~9)
바울이 바라는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보는 것으로 사는 삶은 주님과 함께 살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구별도 바울에게 궁극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관계는 복잡다단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육체에 머물거나, 반대로 육체를 떠나 있거나 하는 형식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삶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성서는 여러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선과 악의 분량에 맞는 공평한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욥기나,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억압적 사태에 대해서 탄식하고 분노하는 하박국이나 미가와 같은 예언의 목소리, 그것은 모두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관한 가르침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면서 얻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현실의 아이러니와 복잡다단함 가운데에도 삶의 확신을 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 번이나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확신은 자가발전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삶에 대해 깨어있을 때 얻게 되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깨어있는 삶이란 연결된 관계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는 삶입니다. 자기 혼자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관념적 혁명가의 삶이 아니라, 공동의 관계 속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분별력을 지닌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14~15절)
그렇다면, 진실로 깨어난 삶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여러 편지에서 백번도 넘게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살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 17절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종교에 몸담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열어가는 새로운 피조물의 기쁨,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 / 마가복음 4장 26~34절]
마가복음 4장은 하나님 나라를 씨앗과 관련된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4:3~8)로 알려졌는데, 뿌리는 사람보다 뿌려진 땅에 관한 더 주목하게 됩니다. 씨앗이 어떤 땅에 뿌려졌는지, 그곳이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아니면 옥토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른 두 씨앗의 비유입니다. 먼저 나오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성장에 관한 것이요, 뒤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씨앗의 역동적인 자라남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실 혼자 저절로 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흙과 물과 햇빛과 공기 등 수많은 은총의 요소가 있기에 씨앗은 자랍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절로 자라는 씨와 같다고 묘사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지닌 은총의 모습에 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살다 보면, 사람들의 선한 의지가 총출동해도 하나님 나라가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하늘의 은총에 겸손히 열려 있을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렇다고, 저절로 자란다는 것이 자유 방임과 무책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자라남에 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삶에 필요한 지혜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냉소의 허무를 이겨낸 믿음의 지혜가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고, 그 나라의 열매를 거두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로 비유됩니다. 겨자씨는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비유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루는 성공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겨자씨는 다 자라면 2~3미터 정도 되는 풀입니다. 풀치고는 크게 자라지만, 나무처럼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고 말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같다는 것은 새롭게 심기고 자라나는 역동적인 나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마 17:20)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행진,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 그 꿈과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교회 마당에 곧게 자란 은행나무 씨앗을 몇 분이 가져다 심어서 싹을 틔웠다고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해온 믿음의 행진을 잇는 상징적인 일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올곧은 믿음의 행진을 이어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기쁨으로 얻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행진을 이어갑시다. 교회 이전과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신비로운 은총의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새롭게 이끌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