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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광야를 살아가는 법 | 김희헌 | 2021-07-04

by 김희헌 posted Jul 05, 2021 Views 17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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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7-04

광야를 살아가는 법 (삼하 5:1-5,9-10, 고후 12:2-10, 6:1-13)

성령강림절 7 (210704)

 

교회를 떠나 예배드리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것을 새로 조성해야 하는 데, 이사를 비롯하여 수고해주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예배준비 리허설을 해주신 미디어팀에게도 감사합니다.

이른바 광야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지난 예배당에서의 익숙하고 안정된 삶이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 교회 사무실을 내자동으로 옮기고, 아침에 출근할 때 습관처럼 명동으로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오늘 아침에 예배드리러 오시면서 발걸음이 옛 교회당을 향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출입구도 막히고, 건물이 철거되고, 그곳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광야 생활이 기약도 없는 암담한 삶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신축계획과 미래 선교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있기에, 밑도 끝도 없는 위기를 맞은 건 아닙니다. 비록 54년간 정든 예배당을 떠나 불안정한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앞으로 교회 신축이 완료되어 입당할 때까지 광야 생활을 잘 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광야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는데, 누구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더듬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환점에 선 다윗 / 사무엘하서 51~5, 9~10]

오늘 제1성서 본문 사무엘하서의 내용은 다윗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읽게 될 터인데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왕국을 건설한 내용입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기는 몸으로 긴 광야 생활을 하다가, 먼저 자신이 속한 지파인 유다의 왕이 됩니다. 거기서 7년여 동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후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을 세웁니다. 그는 왕권을 다지기 위해서, 여부스 사람들의 땅인 시온 산성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습니다. 훗날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는 이곳은, 남 유다의 중심인 헤브론과 북이스라엘의 중심인 세겜 사이에 있는 곳입니다. 다윗이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은 것은 정치적 통합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다윗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리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에는 신중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문자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지배계층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록된 역사를 볼 때는 민중들의 애환을 보기 힘듭니다. 성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솔로몬 시대 왕궁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과 함께 시작된 민중들의 역사는 기록의 밑바닥에 깔려 감추어지고, 그 위에는 왕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로 덧칠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서 안에 묻혀 있는 민중사를 들여다보고, 거기 찍혀 있는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해석의 과제가 됩니다.

그 대표적인 지점이 다윗에 관한 평가입니다. 구약성서 학자였던 문익환 목사님은 다윗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는 출애굽에서 시작된 민중 해방운동의 대단원을 장식한 장본인이자, 동시에 민중의 억압자로 전환하는 왕조의 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2018년 재판, 89) 어떤 지점에서 다윗이 억압자로 변하는지 관찰하는 것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서 기록으로 보면, 다윗은 매력적인 인물이 분명합니다. 악기 하나로 악령의 발작을 잠재우는 낭만적인 가객의 모습을 지니면서도, 치밀한 계산으로 살아가는 전략가의 모습 또한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그가 보인 순수한 마음과 거기에서 빚어지는 매력적인 모습은 어떻습니까? 왕으로 뽑히는 자리에 참석하기보다 양을 돌보는 일에 성실했던 모습이나 블레셋 장수 골리앗에 맞서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조약돌 다섯 개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세속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감동과 지혜를 줍니다.

또한, 광야에서 동고동락했던 부하들과의 의리(대상 11:15-19)나 권력 경쟁이 격화되며 점차 적으로 변해가는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음에도 끝내 도리를 지키는 모습 역시 진한 감동을 줍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도덕성을 넘어, 지파 동맹을 통해서 해방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려는 깨어난 의식을 반영한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다윗을 좋게 평가합니다. 온 백성이 그를 좋게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3:36)

하지만, 그런 다윗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그것은 궁중 생활에 익숙해지고 광야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부터입니다. 왕권을 둘러싼 암투 속에서 민중의 꿈이 멀어지며 생겨난 위기입니다. 특권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받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그의 비극은 깊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중사>히브리 민중의 첫 시련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다윗의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민중사, 123)

다윗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단지 가난과 고난을 미화하고, 부귀와 권력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궁의 권력이든 광야의 고난이든, 거기에는 각각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다만, 오늘은 다윗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아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는 권력에 도취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녔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경계선을 거룩하게 지켜내려는 인간실험의 가능성도 보여줍니다.

 

[인간실험의 두 가지 방식 / 마가복음 61~13]

다윗이 보여준 인간의 양면성이 복음서에서는 두 개의 이야기로 대비됩니다. 마가복음 6장의 본문에서, 앞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내용이고,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인가?’ 하는 인간실험의 문제라면,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먼저 고향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현실의 한계에 잡힌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면서도 그가 병든 사람을 고치고, 회당에서 놀라운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여섯 가지 물음이 겉으로는 놀라움의 표현이지만, 그 물음이 전제하고 있는 마음의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도약을 위해 물어진 물음이 아니라, 욕망에 깊이 사로잡힌 물음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다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과 함께한 예수 또한 달리 기적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는 여기서, 예수의 참담함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무엇보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에 놀라셨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떻게 믿음 없는 삶이 가능할까요?

이어지는 제자 파송의 이야기는 다른 방향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에게 한 예수의 명령은 믿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하나만 갖고 가라, 빵이나 자루나 돈도 갖고 가지 말아야 하며, 옷도 두 벌 갖고 가지 말라.’

예수의 이 명령은 공동체적 기풍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사는 삶에는, 낭만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가차 없는 단호함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불신의 세계를 대할 때는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 공동체의 생명의 망을 짜나갔습니다.

지난 월요일(628), 기독교사회운동 공동정책협의회가 있어서 참여했습니다. 기조 강연과 여덟 개의 부문별 발제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제는 노동, 젠더, 장애, 소수자, 생태, 빈곤, 분단, 인권이었는데요. 이 운동을 담당하는 세대가 젊어졌음을 느꼈습니다.

토론의 자리에서 제 마음을 울린 내용은 정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 주장에 멈추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무릎 꿇도록 요구하는 정의의 패권적 속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독재정권에 항거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 자체가 정의였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는 다른 모양의 정의가 서로 충돌하고, 선과 악의 경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교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적대적 전쟁이 아니라 공존의 정치입니다.

심지어 적대적 모습으로 혐오와 배타를 양산하는 현상 역시 인간 소외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혐오의 정치는 단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슬픔과 긍휼과 애석함의 마음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차별과 폭력에 대한 인권 감수성도 단지 즉자적으로 대처하는 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는 문해력’(literacy)에 달려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김형완, “사랑의 기독교와 교회의 혐오”)

진영논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결코 생명의 망을 짜갈 수 없습니다. 평균적인 의식으로 뭉친 세계를 잇는 씨줄만 갖고서는 베를 짤 수 없습니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잇는 날줄도 있어야 옷감이 만들어집니다. 가로놓인 씨줄을 타고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삶을 되돌아보면서, 세로를 엮어내는 날줄을 갖고 생명의 망을 짜가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광야 생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라고 봅니다.

 

[각성의 자리에서 듣는 말씀 / 고린도후서 122~12]

오늘 서신서 본문 고린도후서 12장은 소위 바보 연설’(fool’s speech)로 알려진 내용(11:1~12:11)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소위 거물급 사도’(11:5, 12:11)로 불리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자기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일컬으며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계시와 신비체험을 과장하고 절대화하여 공동체에서 권력을 획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 역시 엄청난 계시를 받았지만, 그것을 자랑하기보다는 약점을 말하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비체험은 자랑할 수 있지만, 자신이 기뻐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서려고 하는 자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환상적 세계가 아니라 진실한 자리요, 과대평가되는 신비의 자리가 아니라 약점을 보임으로써 설 수 있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상징되는 기독교적 각성에 어울리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때로 필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몸의 가시입니다. 바울은 그 고통스런 경험을 가리켜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부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신적 유혹인지, 양심의 가책인지, 신체적 질병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이 말씀은 기독교적 각성의 정점에서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실수를 덮고도 남은 은총의 빛에 열려있는 마음이 깨달은 말씀입니다.

인간의 참된 삶, 본질적인 삶이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광야와 같은 삶에서도 인간의 궁극적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지혜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10절에서 들려줍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 신학자는 말하길, ‘인간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질문이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병약함, 모욕, 궁핍, 박해,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 생활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역사와 인생의 광야를 지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삶에는 시련이 있습니다. 또한, 그 시련만큼 주님의 은총을 더욱 분명히 보는 기회도 있습니다. 은총의 빛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광야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파송사]

광야의 삶을 사는 동안,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의 고백이 우리의 광야생활 지혜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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