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신앙 (삼하 6:1-5, 12b-19, 엡 1:3-14, 막 6:14-29)
성령강림절 8 (210711)
[맘의 불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오늘은 신학적인 내용보다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오기 전 대학로에 있는 낙산교회에서 시무했습니다. 교우 한 분의 직장이 근처에 있어서 가끔 방문했는데, 그곳은 ‘노들야학’이라는 장애인 교육과 인권 운동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노들, 노란들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은 겉으로는 생활이 불편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들여다볼수록 가을 들판처럼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노들야학 교장으로 계시는 박경석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분 역시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휠체어를 타는 분입니다. 대학 시절 행글라이딩 사고로 인해 장애를 얻고, 충격과 상실감으로 5년간 칩거하기도 했다 합니다. 그러다가, 노들야학을 만나 활동하면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담은 책을 냈습니다. 그 제목은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입니다.
무엇이 행복하다는 말일까요? 그는 자신의 별명을 ‘어깨꿈’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깨진 꿈’이라는 뜻입니다. 책에서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그는, 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기보다 정상인으로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꿈이 처절하게 깨진 뒤에 절망의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힘이 있음을 어둠 속에서 목격했다고 고백합니다.
책 1부가 끝나는 곳에서 다음과 같은 멕시코 원주민의 말을 인용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그는 이 말을 노들야학에 오는 교사들에게 늘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뚫고 나온 영혼의 당당한 선언이죠.
저는 그 말이 미래를 향해 공동체를 일구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삶과 교회 생활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돕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보람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자기 삶의 일부가 아닌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일이라면 지속하기 힘들지요.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이유도, ‘향린’이라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유도 자신의 구원과 우리 모두의 구원이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지 못하면 교회 생활을 지속할 수 없고, 하더라도 일그러진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신앙공동체가 지쳐있다고 느낍니다. 7월이 되면 코로나 사태가 잦아질 줄로 기대했는데, 거꾸로 급증해서 내일부터는 두 주 동안 최고 등급의 거리두기를 해야 할 형편에 놓였습니다. 또한, 지난 두 달간 교회 이전과 관련된 고단함이 누적되어 있습니다. 건축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에 대한 대처만이 아니라, 새로운 예배당에서 펼칠 선교의 방향 정립을 위해 온라인 회의도 늦은 밤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주어진 일이 마음을 잠식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삶을 덮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느끼는 의무와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안에 일고 있는 종교심의 불꽃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신학적인 해석보다는 신앙의 원초적 상태에 대한 모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이야기 초점을 모으기 위해, 복음서 내용은 건너뛰고, 제1성서의 다윗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법궤에 얽힌 민담과 그 교훈]
오늘 제1성서 본문, 사무엘하서 6장은 다윗이 법궤를 옮겨오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법궤는 모세의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넣기 위해 제작된 가로세로가 60cm, 길이가 1m 남짓 되는 상자입니다 (출 25:12-22, 37:1-9). 이 궤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유랑할 때, 대열의 맨 앞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메고 이동했습니다. 함부로 열어볼 수 없는 거룩한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물이요, 백성들을 보호하는 신의 능력이 나오는 발원지로 여겨졌습니다.
광야 생활이 끝나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법궤는 중앙 성소에 모셔졌습니다. 때로는 베델에 (삿 20:27), 때로는 실로에 (삼상 4;3)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백 년 가까이 지나면서 법궤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습니다.
사라진 법궤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은 사무엘상 4장입니다. 때는 기원전 11세기경,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부족동맹을 결성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철제무기로 무장한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스라엘군은 사천 명이나 전사하고 패배합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생각하지요. ‘왜 우리가 블레셋에게 졌을까?’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궤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만 모셔오면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그들은 실로에 올라가 법궤를 가져왔습니다. 사기가 높이 오른 이스라엘군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자,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전투 역시 블레셋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더욱 크게 져서, 삼만 명이나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법궤마저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이스라엘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패전과 두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민족의 지도자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임신한 그의 며느리가 출산 중에 죽으면서 지어준 아이의 이름은 ‘아가봇’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충격을 대변합니다. 싸움에 진데다가 법궤까지 빼앗겼으니, 이젠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블레셋 진영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겠지요. 그들은 이스라엘의 상징인 법궤를 신전에 전리품으로 바쳤습니다. 모든 게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법궤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재미있게 이어집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전에 법궤를 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만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엎어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세워 두었더니, 다음 날에는 머리와 팔다리가 부러져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몸통만 뎅그러니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전이 있는 그 도시 아스돗 시민들이 난데없는 재앙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아스돗 사람들은 법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가드 사람들도 죽어갑니다. 에그론으로 옮겼더니, 에그론 사람들은 “우리마저 죽일 생각이냐”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일곱 달이 지나도록 어려움이 계속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점쟁이를 불러서 해결책을 마련합니다. 그것은 다시 되돌려 보내자는 것인데,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제물까지 함께 곁들여서 함께 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사람 맘이 참 오묘합니다. 막상 그렇게 결론을 짓고 나니까, 마음에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했던 고통이 정말 저 법궤 때문일까? 혹시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합니다.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싣고, 그걸 끄는 소가 어떻게 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법궤가 본래 있었던 벳세메스라는 곳으로 소가 알아서 간다면, 자신들이 당한 재앙은 이스라엘의 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벳세메스는 예루살렘 남쪽 3km 지점으로 유대 땅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들은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법궤가 본래 있던 벳세메스를 향해 똑바로 가는 것입니다. 그걸 본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럼 벳세메스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법궤가 오는 것을 들에서 일하다가 보고서, 곧바로 나무수레를 쪼개고 그 소를 번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궁금해서 법궤를 들여다본 주민은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성서는 그 사람이 오만칠천 명이나 되었다고 말하는데, 아무튼 법궤는 결국 아비나답이라는 농부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법궤에 얽힌 이 이야기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민담들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보여주며, 팽팽한 긴장을 갖고 몇 가지 교훈을 전합니다.
먼저,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법궤를 전쟁에 활용하려고 한 사람들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야 잊고 지낸 법궤를 찾아 나섰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법궤는 민족의 중심에 있었고, 공동체와 하나였습니다. 이동 중에도 법궤가 서면 거기서 행진을 멈추고 쉬고, 법궤가 이동하면 일어나 움직였습니다. 법궤의 행방이 곧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거룩한 물건은 함부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이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 사는 동안 점점 잊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젠 법궤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법궤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생각이 앞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앞과 뒤가 바뀌었기 때문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승리를 빌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 것으로 기록된 유일한 사건입니다.
둘째 교훈은 하나님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고 해서, 하나님이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법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있다 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속을 들여다보고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역은 사람들에 의해 결코 침범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렇게 엄중한 교훈을 담은 법궤 이야기는 역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렇게 일차 중단된 법궤의 역사가 오늘 사무엘하서 6장 본문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법궤를 기억해내고, 다시 모셔오려고 함으로써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다윗의 법궤 귀환 작업]
다윗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궤를 가져오려고 했던 그의 의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왜 법궤를 가져오려고 했을까요?
이때의 다윗은 조약돌 다섯 개로 골리앗에 맞선 푸르른 소년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쫓기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방랑자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이 ‘정병 삼만 명을 이끌고 법궤가 있는 바알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블레셋을 정복한 승리자로서 이스라엘의 확고부동한 왕이 되어있었습니다. 북쪽의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흡수하고, 시온성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왕조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그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힘없던 시절에 빼앗긴 아내 미갈도 되찾아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자기가 이룬 그 모든 업적 위에 꼭 한 가지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온다면 모양새가 완벽하게 갖춰질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왕궁 옆에 성전을 짓고 법궤만 안치해두면, 일차적으로는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고, 또한 법궤의 신통한 힘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겨와 성전을 지으려고 계획했던 생각이 순수하지만은 않았다는 증거가 7장 5절 이하에 나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감히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목동인 너를 데려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건 바로 나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다윗이 온갖 악기를 타면서 법궤를 모셔오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번 주 성서 일과에서 빠져서 읽지 않은 대목을 보면, 법궤를 진 소들이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그것을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그 손이 법궤에 닿는 즉시 죽게 됩니다. 그걸 본 다윗은 무서워서, “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가 있겠냐”며 한탄합니다. 왕국의 정통성을 세우려고 했던 다윗의 뜻은 좌절된 듯합니다.
그 이후 법궤는 블레셋 사람의 집에서 석 달간 있게 되는데, 다윗은 다시 법궤를 모셔올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했던 지난 잘못,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으려고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궤를 멘 사람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양을 제물로 잡아 바칩니다. 실로 모든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게다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옷을 벗고, 모시로 만든 에봇을 입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힘차게 춤을 춥니다.
정성을 다해 힘찬 춤을 추는 다윗, 소매가 없는 겉옷만 입고 벌거벗은 채 춤을 추는 다윗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 미갈조차도 다윗을 비웃고 업신여깁니다. 20절을 보면, 미갈이 이렇게 말합니다.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다니, 임금의 체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갈이 누구인가요?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야밤에 쳐들어올 때도 목숨을 걸고 남편 다윗을 피신시켰던 사랑스러운 아내조차도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삼하 6:21-22)
이런 다윗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이 알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쌓은 업적과 권위, 그 상징인 모든 치장을 벗어버리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그의 춤은 진실한 몸의 언어요, 살아있는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내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어들고 선 모세와 같이, 하나님에게 선 인간의 진실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정직한 인간의 모습 가운데, 성서가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은 바로 이 ‘춤추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능력이나 권위, 체면이나 소유, 이 세상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힘찬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춤출 수 있는 신앙’입니다. 코로나의 확산으로 비대면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음을 잘 지켜야만 하는 위기를 느낍니다. 이 위태로운 시간을 단지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꾸고 준비해가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교회건축을 진행하면서, 신앙공동체를 다시 세워야 하는 과제 또한 있습니다. 이 시기에,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결핍이 빚어낸 행위가 관계를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힘찬 춤을 추면서,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는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의 혼돈과 위협을 이겨내는 지혜와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축복의 말씀을 전하며 마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엡 1:9-10)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오늘 우리의 염려는 많고, 우리의 관심은 산만합니다. 위태로울 때일수록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힘차게 춤을 춘 다윗처럼, 주님에게서 오는 용기와 지혜를 구합시다. 하나님을 믿고 모험하는 삶을 산 이들을 본받아, 우리가 걸어야 할 믿음의 참된 길을 정성껏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