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에 이르는 양식 (삼하 11:26-12:13a, 엡 4:1-16, 요 6:24-35)
성령강림절 11 (210801)
[분단 한반도의 영원한 양식, 탈분단을 향한 상상력과 실험]
코로나 사태가 온 세계를 휩쓸면서 이번 주에는 확진자가 2억 명에 이를 것 같습니다. 이런 거대현상을 겪으며 인류는 문명 대전환의 과제를 맞고 있지만, 현실은 힘겹고, 미래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깊어서 도전이 클수록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회도 있을 것이니 힘을 내야겠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근원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얻기 위해 일하라’고 합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2019년 2월 북미 정상의 하노이회담이 결실 없이 끝난 후 남북관계는 줄곧 악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전해진 두 가지 소식은 메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화요일인 27일에는 남북 통신연락선이 13개월 만에 복원되었고, 금요일에는 민간단체가 요청한 대북 인도적 협력물자 반출을 통일부가 승인하여, 10개월간 중단한 남북교류가 재개될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종전 68주년을 맞아 이뤄진 이 작은 시도가 평화의 물고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소식들이 전해진 지난주는 김낙중 선생님이 소천하신 지 1주기가 되는 때여서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문제로 인해 잘 보이지 않던 한반도의 현실이 부각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김낙중 선생은 오랫동안 자신의 민족통일 방안을 설계해왔습니다.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통일방안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남북의 청년 세대가 각국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비무장 지대와 판문점 지역에 ‘통일독립고려공동체’를 운영할 도시를 세우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통일 한반도의 주역이 되도록 남북 정부는 점차 통치권을 이양하는 방안입니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2개의 기본 조약과 8개의 부속협정, 그리고 교섭원칙과 기구 설치절차까지 망라한 촘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구상하셨을지를 생각해보면, 읽는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감동을 줍니다.
김낙중 선생이 장엄한 설계를 했다면, 동년배셨던 홍대극 집사님은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로 다가와 직관적인 지혜를 주셨지요. 통일 한반도를 향한 당신의 재치있는 생각을 들려주셨는데, 지금 제 마음에는 그분이 하신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서 자라고 있습니다. 저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분단이나 통일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를 가장 민첩하게 움직여온 것이 경제문제였던 시대를 오래 지나오면서 가진 습관처럼 보입니다. ‘생존’의 가치가 이웃이나 공동체보다 우선했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영원한 양식’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긴급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평화와 통일을 향한 마음은 이리저리 갈라져 분단 체제에 익숙해졌고, 그렇게 ‘갈라진 마음’은 결핍과 과잉의 두 모습을 띠면서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이 넘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 현실을 무시하고 무관심하는 마음으로 시들었으니, 둘 다 각자의 형편대로 분단시대를 살아온 ‘분단체제의 쌍생아’라고 하겠습니다. (김성경, 갈라진 마음, 6-7)
그렇기에, 저는 우리 교회에서 평화와 통일에 관한 꿈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 귀중한 전통이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며 70주년 선교 비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분단시대의 저항만이 아니라, 통일시대를 향한 교류와 협력까지 준비하는 평화의 기지(基地)를 지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랍니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기장 교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활동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 주보의 목회마당에는 NCCK에 가맹한 교단장들의 목회서신이 실려있습니다.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2023년 7월 27일까지, 앞으로 2년간 진행될 ‘한반도 종전평화 캠페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선, 내년 8월에 있을 세계교회협의회(WCC) 11차 총회 때까지 100만 명의 기독교인이 한반도의 평화협정을 위해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장 교단은 오는 9월에 있을 106회 총회에서, 교단에 소속된 1,600여 교회가 이 운동을 공식적으로 벌이자는 내용의 헌의안을 발의했습니다. 때가 되면 교우들께도 참여요청을 드리겠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탈분단 시대를 앞당기는 평화의 꿈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성서와 역사에 겹쳐진 이야기 / 사무엘하 11장 26절~12장 13a절]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은 다윗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다윗이 자신의 욕망으로 생겨난 죄를 덮기 위해 충직한 군인 우리야를 사지로 내몰아 죽이는데 권력을 동원한 사건이 있습니다. 자기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 끝까지 군인으로서 책무를 다하며 나아간 우리야가 죽고 난 다음,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역사만이 아니라 해석 또한 깔려있습니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직접 기획해서 만든 그 폭력적인 사태를 떠올리며 그 시대 사람들은 절망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이 신상에 편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현대사가 분단과 전쟁을 통해 거대한 대결 구도를 만들고, 그것을 불가피하고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진 억울한 죽음과 폭력 사태로 인해 몸부림쳐야 했던 일과도 비견됩니다.
하지만 역사는 자기의 근원적인 비극을 기억하고 그 문제를 언젠가는 풀어가듯이, 오늘 성서 본문이 비록 다윗 왕조를 미화하는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지고 있지만, 그 안에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폭력적인 질서에 자포자기하며 무감각해지기보다는 억울한 역사를 잊지 않고 전승한 살아있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언자 나단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진 자의 위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과 소를 많이 가진 부자였고, 다른 사람은 암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양을 자기 딸처럼 기르며 지냈습니다. 하루는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와서 대접하려는데, 그는 자신의 많은 양과 소 떼 가운데서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가진 한 마리의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해서 벌어지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식민지 침탈의 이야기였고, 자본주의 시대 노동 착취 이야기이며, 코로나 시대에는 국가 간의 백신 불균형의 이야기요, 가부장적 편견의 시대에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잘못된 낙인을 찍는 이야기요, 이성애 이데올로기로써 비 이성애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이 이야기가 유엔의 이름으로 북에 대한 경제제재를 첩첩이 쌓아온 미국의 마녀사냥 이야기로도 들립니다.
성서로 돌아가면, 나단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은 부자의 악독에 분노하다가, 바로 거기에 자신의 위선과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이야기를 나단을 통해 듣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합니다. 성서는 여기에서부터 다윗을 향한 연민과 축복을 베풀며 왕조 이데올로기를 발동시키지만, 우리는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위에서 열거한 역사 속에서 반복된 수많은 이야기라면, 단지 개인적 차원의 윤리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실천과 공동체적인 실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작은 각성에서 더욱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개인적 차원의 도덕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꿈을 이루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한 가치라 할지라도 현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무력화되고 말 것입니다.
[삶의 성숙을 이끄는 영적 대화 / 요한복음 6장 24~35절]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와 민중들(무리, 오클로스)의 대화가 나옵니다. 네 차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삶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 대화를 보면, 생존에 지친 오클로스들이 예수를 찾아 방황하다가 그를 따라잡고 안도감에 젖어 묻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 질문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이어진 예수의 대답을 통해 밝혀집니다. 성서는 민중들이 예수를 찾아 나선 것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chortazo, satisfy) 때문’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차적인 관심에서 촉발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그런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삶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예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그래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오클로스들의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만일,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진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찾다가 길을 잃거나, 또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며 스스로 높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역사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누군 줄로 알고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분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종교적 분별은 세속적인 분별과 다른 면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살면서 통찰력(insight)을 얻고 친절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과 목표가 다릅니다. 세속적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통찰력과 사랑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종교의 지혜는 삶이 빚어내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그 문제를 겪으면서 삶에 통찰력과 친절한 사랑이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세 번째 대화에서 오클로스는 자신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빵, 만나를 먹었듯이, 당신도 우리가 보고 믿을 수 있는 일을 하실 수가 있소? 하고 예수께 묻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늘에서 참 빵을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의 빵이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이 대답을 듣고 민중들은 마지막으로 외칩니다. “주님, 그 빵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들은 이제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을 구하는 이들로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 삶은 자기 양 떼를 늘리기 위해 가난한 자의 양 한 마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요, 썩어 없어질 양식보다는 영생에 이르도록 남을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한 삶이 됩니다.
[소명을 가진 자의 삶에 대하여 / 에베소서 4장 1~16절]
바울은 그런 삶을 가리켜 부르심(κλῆσις, calling) 즉, 소명(召命)을 가진 삶이라고 말하며, 그것에 대해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하나 됨’(ἑνότης, oneness)의 이상은 바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삶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이끄는 선한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악(惡)은 ‘자신만의 파편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난폭한 힘’에서 경험됩니다. (Whitehead, Science in the Modern World, 192) 아무리 고결한 이상이라도 전체적인 비전을 무시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일방적으로 움직이면 선(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을 향해 생산되는 증오가 선일 수 없고,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옥죄는 제재가 선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도덕성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에 관한 믿음에서 끌어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6절, God above all, through all, in all)입니다. 종교철학에서 신을 이렇게 경험하는 것을 가리켜 ‘범재신론’(凡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의 ‘초자연주의적 유신론’도 아니고, 철학자의 ‘범신론’(pantheism)도 아니라, 성서의 역동적인 믿음이 발전해가면서 정립된 종교적 세계관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만물의 어버이와 같은 분이라면, 그분을 향한 믿음은 공동체를 조화롭게 세워가는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각자 은혜의 분량대로 고유한 역할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πίστις)과 지식(ἐπίγνωσις)이 따로 노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며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본문은 경고합니다. ‘온갖 교훈의 풍조’(every wind of doctrine)를 끌어대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려는 야망이 빚어내는 언어도단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풍조에 휩싸일 때 공동체는 앓게 됩니다.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각자 지체가 되어서 서로 연결된 공동체를 이루는 것, 한 마디로, 사랑으로 몸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성서에서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분단의 시대를 사는 동안 우리 사회는 남과 북이 어우러지는 전체적인 비전을 잃고, 자신만의 목적을 이루려는 거친 힘에 의존하는 습관에 익숙해졌습니다. 그 모습에 대해서 백낙청 선생은 이해타산을 위해 분단 현실을 맹목적으로 활용하는 수구세력만이 아니라, 진보진영 일각에 있는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 증후군’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 안의 분단의식을 떨치고 일어나야겠습니다.
오늘은 성서의 말씀에 기초하여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생각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코로나의 고통 속에서도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에, 한반도의 통일평화에 관한 열망이 뜨겁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갈라진 한반도의 아픔을 치유하는 평화와 통일의 꿈을 ‘영원한 양식’으로 삼고, 선교적 사명을 다하는 신앙공동체를 세워갑시다.